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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목사: 왜곡의 역사/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2003-11-28 22:02:53   read : 65536

현장강좌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핵심 사상은 ‘무아’입니다. ‘없을 무’(無)에 ‘나 아’(我), 즉 나는 실재하지 않는 무아라는 것입니다. 무아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부터 생로병사의 고통이 수반되기에, 인간 스스로 무아임을 깨달음으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그는 설파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사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했습니다. 인생은 ‘무’임을 자신의 죽음으로도 재확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그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스승의 시신을 화장한 뒤 사리를 찾기 위해 젓가락으로 재를 뒤지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은 ‘무’를 강조하려 자신의 시신마저 태워 없앨 것을 명했건만, 제자들의 관심은 ‘무’가 아닌 ‘유’(有)였던 것입니다. 그 이후 입적한 스승의 재속에서 사리를 찾는 불교의 관습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인간 ‘무아’임을 죽음으로도 가르쳤던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이렇듯 대를 이어 ‘유’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런 제자들에 의해 과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누구도 아닌, 불제자들에 의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왜곡되지 않겠습니까?
불경의 내용을 왜곡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타종교인이 아닙니다. 불경과 무관한 자에 의해 불경이 왜곡되는 경우란 없습니다. 불경은 불경을 아는 자에 의해 왜곡되게 마련입니다. 이슬람교의 코란이나 힌두교의 베다 역시 그 종교에 소속돼 있는 사제나 교인들, 즉 누구보다도 경전의 내용과 의미를 바르게 지켜야 할 내부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고, 또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역사란 실은 자기 경전의 왜곡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님은, 인류의 역사가 스스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과연 예외이겠습니까?

종교의 역사는 자기 경전의 왜곡 역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첫 번째 인간인 남자와 여자를 에덴에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 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6하∼17).

‘모트 타무트’ - 하나님께서 ‘죽다’는 동사 ‘무트’를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상 같은 단어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강조형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을 받은 여자는 사단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여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교묘하게 왜곡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결국 여자는 금단의 열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던 자는 남자였음에도 여자가 내민 선악과를 남자도 아무 거리낌없이 먹었다는 것은, 남자 역시 말씀을 왜곡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았던 첫 번째 인간에 의해 제일 먼저 왜곡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에서 진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는 몇 주가 지났건만 돌아올 기미가 없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아론은 백성이 가져온 금붙이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단을 쌓고, 그 이튿날을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했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손으로 빚어 만든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공포함으로써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말씀을 금송아지로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아론은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그 초대 대제사장에 의해,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참하게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 제도 역시 시내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대리인과도 같았습니다. 모든 제사는 그들을 통해야 유효했고, 그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간주되었습니다. 세월이 경과한 후, 하나님께서 제도권 안에 있는 제사장과 제도권 밖에 있는 선지자를 동시에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 시대에 사독이나 아비아달 같은 제사장이 있었음에도 그들과는 별도로 선지자 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17장의 엘리야 선지자를 기점으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제도권 속의 제사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지자만을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처럼 제사장 출신도 있었지만, 그들이 선지자로 쓰임 받을 때는 더 이상 제도권에 속해 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를 기점으로 선지자만을 쓰셨는가? 그 해답은 엘리야의 소명장인 열왕기상 17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왕상 17:2∼5).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셨습니다. 당시는 온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과 흉년이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근이 들면 도시로 가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있습니다. 기근에서 생존키 위해선 북이스라엘의 최대 도시 사마리아를 고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엉뚱한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동쪽으로 가서 요단을 건너면, 밀알 한 톨 구할 수 없는 길르앗 협곡이나 동굴 지대가 나올 뿐입니다. 흉년에 굶어죽기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시켜 먹을 것을 공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엘리야는 곧 사마리아를 떠나 길르앗 협곡으로 갔습니다. 만약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오지 않으면 엘리야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양식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자기 생명을 의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육체를 위한 종속 변수로 부리려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어야 할 삶의 절대 목적으로 삼고 순종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엘리야의 절대적 순종을 계기로 하나님의 촛대는 제사장에서 선지자에게로 옮겨졌고,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제도권 속 제사장들은 엘리야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살기 위한 도구로, 종속 변수로 왜곡한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먹고사는 것이란 단지 육적 양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기득권, 목회적 야망, 인간적 명예심, 조직의 논리에 대한 집착 등의 총칭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장엄한 예식의 제사를 쉬지 않고 주관했지만, 바로 그들에 의해 당신의 말씀이 왜곡되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강도의 굴혈에 지나지 않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말씀이 왜곡되지 않는 성전 밖 선지자들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성전 밖 선지자라고 해서 다 같은 선지자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3:30∼32).

대부분의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전의 이득과 자기 욕망의 성취, 자기 영달과 입지 강화를 위함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인간들의 역사인데, 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의 역사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불교 신자나 회교도에 의해 왜곡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직업적으로 맡은 자들에 의해 왜곡돼 왔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서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항상 왜곡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생명을 걸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는 늘 정화돼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함이 없이 자기 삶의 절대 목적으로 삼은 자를 통해서만 이 땅에 육화(incarnation) 되기 때문입니다.

씨에 대한 옥토의 완전한 자기 의탁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여러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셨는데, 그 첫 번째 비유가 본문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씨란 곧 하나님의 말씀인 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현됨을 알게 됩니다.
농부가 주어진 시간 내에 더 많이, 더 널리 뿌리기 위해 씨를 공중에 흩날렸습니다. 마침 씨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씨가 떨어진 장소는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옥토 이렇게 네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맺힌 곳은 옥토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 맺은 옥토와 그러지 못한 나머지 세 곳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 차이점은 오직 옥토만 씨앗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역시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단 한 치의 간격도 없이 아예 씨와 붙어 있었지만, 씨를 온전히 삼키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씨의 생명은 새들에게 먹히거나, 태양열에 말라 죽거나, 가시의 기운에 막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옥토는 씨를 원형 그대로 삼켰기에, 씨의 생명이 왜곡됨 없이 열매로 귀결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옥토가 씨를 삼켰다는 의미를 좀더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옥토가 씨를 삼키면 그 즉시 씨가 옥토를 삼키기 시작합니다. 옥토 속의 수분을, 영양분을 삼키면서 움이 트고 싹이 나며 열매가 거두어집니다. 그러므로 옥토가 씨를 삼킨다는 것은 곧, 씨가 자신을 마음껏 삼킬 수 있도록 씨에 대한 옥토의 완전한 자기 의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누구보다 성경 공부에 열성적이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였으며, 성경을 줄줄 암송할지라도 말씀을 삼키지 아니하면, 자신에 대한 말씀의 지배 속에서 말씀을 좇아 살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 기득권을 위해, 야망의 충족을 위해, 이기적 명예심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고 왜곡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속성인 까닭입니다. 그런 자는 흔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세상에서 어렵지 않게 소위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무 쓸모 없는 돌밭이나 남을 해치는 가시떨기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자가 아닌, 말씀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말씀 속에서 변화되고 변형되는 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옥토와 나머지 세 곳의 두 번째 차이점은, 옥토에만 자기 부인이 선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길처럼 굳기만 했던 땅이 몇 차례나 갈아엎어졌습니다. 보석처럼 품고 있던 돌덩이들도, 왕관처럼 쓰고 있던 가시떨기도 미련 없이 포기했습니다. 그와 같은 자기 부인의 과정을 거쳐 황무지는 씨앗을 삼켜 열매를 맺는 옥토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말씀의 농부가 되기 위해선 이처럼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욕망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고 싶은 자기, 아론같이 대중적 인기에 영합키 위해 말씀을 왜곡하려는 자기,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종교적 기득권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려는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지 않으면, 종교적 열심이 깊을수록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백해무익한 돌밭과 가시떨기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을 삼키는 옥토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성전 건물과 동일시되면서 건물 건축을 위해 말씀이 왜곡되었습니다. 성장제일주의와 최고최대주의로 인해 말씀이 왜곡되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세속주의에 의해 말씀이 왜곡되었습니다. 뿌리 깊은 기복주의로 인해 왜곡되었습니다. 이기적인 개교회 간의 무한 경쟁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선교 단체와 기독 기관의 폐쇄적인 조직 논리에 의해 왜곡되었습니다. 직업적인 교역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삶이 표리부동한 교인들에 의해서도 말씀이 왜곡되었음은 물론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역사도, 신실한 말씀의 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 큰 흐름은 왜곡의 역사였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교회, 기독 기관, 선교 단체들의 몸집은 마치 공룡처럼 비대해졌지만 세상을 새롭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비판과 경계 그리고 개혁의 대상인 가시떨기, 돌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시급히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명해졌습니다. 우리 각자가 왜곡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일본 교과서 왜곡엔 공분을 느끼면서도 자신에 의한 말씀의 왜곡은 자각치도 못한다면, 우리의 숫자가 하늘의 별처럼 늘어난다 한들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다. 왜곡의 역사를 청산하는 길은 결코 복수거나 다수가 아닙니다. 조직의 논리와 목표를 말씀보다 우선시하던 그릇된 자세를 버리고, 우리 각자가 우리의 삶과 생명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것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송아지 형상으로 왜곡하고 그 앞에서 벌였던 광란의 축제가 무엇으로 종식되었습니까? 모세가 던진 계명의 돌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교황을 정점으로 한 가톨릭 조직 논리에 의한 말씀의 왜곡에 항거(protest)한 것입니다. 무엇으로? 오직 말씀으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왜곡의 역사는 종식될 수 있습니다. 오늘 언더우드학술강좌를 통해 이 시대의 모세와 마르틴 루터가 단 한 명이라도 배출될 수 있다면, 이 땅의 역사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미래와 리더십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홀로일망정,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1년 전 미국에서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미국 명문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신학교를 나왔지만, 안수 받는 대신 자신이 사역해야 할 세상을 먼저 알기 위해 수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해온 청년입니다. 제가 귀국하는 날, 그 청년이 허겁지겁 공항으로 달려와 제 손에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많은 한인 기업들이 불법 체류자들을 불법으로 고용하면서 봉급을 수표나 예금 이체가 아닌 현금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손쉽게 직원 수와 외형을 속이고 탈세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직원 중에도 봉급의 일부를 현금으로 받기를 선호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의료보험 등 필수 항목을 위해 봉급에서 최소한의 금액에 대해서만 세금을 물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청년의 편지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 직접 읽어드리겠습니다.

어제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직원들 중 불법 체류자들에게 봉급을 현금으로 주어온 저희 회사의 사정을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불법 체류자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1999년 일단 풀타임으로 일할 일반 직장을 찾는 과정에서 퍼시픽 벨(Pacific Bell) 사에 엔지니어 자리가 나서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저를 평가해 줘 입사 시험과 구두 인터뷰를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발령을 기다리는 중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회사의 부사장이 구조 조정을 하면서 제가 들어가서 근무하게 될 부서의 일을 하청 회사에 넘겨주고 해당 부서를 폐지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해 온 이 회사에서 적어도 2∼3년은 풀타임으로 일할 것을 기도 중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가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퍼시픽 벨 쪽의 봉급과 같은 금액의 봉급을 주신다는 사장님의 약속에는 그 중 일부를 현금으로 주겠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잠시 갈등한 후에 제가 ‘예스’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얼마나 어리석게 여겨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 봉급을 올려주신다고 하면서 수표 쪽의 금액이 아닌 현금 쪽을 올려주시는 데도 저는 또 침묵했습니다. 한심한 짓이었습니다. 이전의 6년 동안 파트타임 봉급만으로도 크리스천으로서 행복했던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는 그 삶을 청산하기로 결정하고, 사장님께 아직 못 받은 현금 금액을 포함해 이제부터 현금을 받지 않겠다는 말씀과, 그 금액만큼 봉급을 자진 감봉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사장님께서는 단호히 제 요청을 거절하셨지만, 저는 어떤 경우에도 그릇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 다짐 드렸습니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만약 제가 그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으면 자기가 요구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도 똑같은 것을 느꼈다고 해서 주님의 뜻을 함께 확인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하기도 하지만, 이런 사실을 우리 부부가 아닌 한 분이 더 알고 계시다는 것이 동일한 시험이 올 때 힘이 될 줄로 믿고 편지를 드립니다.
2002년 9월 13일, K올림

저는 이런 청년을 만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욕망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던 자기를 과감히 부인할 줄 아는 청년,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의탁키 위해 상대적 불이익마저도 오히려 진리로 인해 기꺼이 감수할 줄 아는 청년, 바로 이런 청년이 미래를 책임질 진정한 크리스천 리더요, 이런 청년을 도구로 삼아 주님께서 친히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 안이든 밖이든, 우리 주위를 보면 참으로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서든 주님의 말씀에 나의 생명을 드리기만 하면, 거기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습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해 말씀을 왜곡해 온 결과, 겉은 화려하나 실은 생명을 잃은 돌밭과 가시떨기 같은 우리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왜곡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기 원합니다. 말씀을 왜곡하려는 자신을 가차없이 부인하는 용기를 주십시오. 말씀이 나를 지배하도록, 말씀을 삼키는 옥토가 되게 해주십시오. 말씀 위에 두었던 조직 논리, 기득권, 관행과 관습, 인간적 야망, 물신주의를 이제 우리의 손으로 끌어내리게 해주십시오. 모세가 황금 숭배자들의 광란의 축제를 향해 던졌던 그 말씀에, 마르틴 루터가 자신을 의탁했던 그 말씀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명을 걸게 해주십시오.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의 역사가, 교회의 리더십과 미래가 정녕 새로워지게 해주십시오. 아멘.

빛과 소금
글·이재철 장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10년 간 목회했다. 목회 초기에 약속한 대로 스스로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고 장로회(통합) 총회 파송 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3년간 한인 교회를 섬겼다. 지금은 개인 복음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저서로 「참으로 신실하게」,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회복의 목회」, 「회복의 신앙」 등이 있다.
사진·이남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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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존 스토트 칼럼



‘2003년 5월 4일 영국 All Souls Church에서 “Behold Your Coming King: Jerusalem Reclaimed”라는 제목으로 행한 설교다(본문: 슥 1:1∼21).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고 종교와 정치의 중심이며, 무엇보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머무는 곳이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적국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결국 자신들을 버리신 게 아닌가 하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 ”(애 1:1∼12). 그로부터 약 70년 후 기원전 520년, 바샤 제국 다리오 왕의 통치 2년째다. 스가랴 선지자는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시작한다. 학개 선지자와 더불어 영적 리더십을 발휘해 성전이 재건되고 하나님의 언약이 재개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에 대해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제 스가랴서 1장 말씀을 놓고 절망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보자.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회복과 환상
스가랴서 1장의 핵심은 14절과 15절 말씀에서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시고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있다. 질투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실의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 메시지를 주신다.
첫 번째 메시지는 1∼6절 말씀으로 주시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메시지는 나머지 구절에서 환상으로 보여주신다. 이는 약속의 메시지들이며 이스라엘의 희망에 대해 직·간접으로 말씀하고 있다.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가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은 열조들을 본받지 말고 악한 행실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는 데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재건은 철저한 회개의 기초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7∼17절 말씀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11절 말씀에 말을 탄 인물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다”고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이 말씀에 대한 의미를 놓고 많은 해석들이 분분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바샤의 압제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인데, 평안하고 정온하다(at rest and in peace)니 과연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의 맥락을 살펴보면 부정적인 의미로 보는 게 맞다.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긍휼을 유보하신 70년의 세월을 하나님께 고하자, 하나님께서 선하고 위로의 말씀으로 대답하셨다고 적고 있다. 위로는 구원 또는 구속과 동의어다. 이스라엘이 고통 받은 그 평안과 정온의 세월에 대해 이사야서 40장 1절에서 말씀하시는 위로가 임하시는 것이다. 이는 16∼17절 말씀에서 주시는 회복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고, 둘째는 하나님의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며, 셋째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한 측량이 이뤄지고, 넷째는 하나님의 도시들이 넘치도록 풍족해지며, 다섯째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택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삼고 있는 강력한 제국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세 번째 메시지로 18∼21절에서 네 뿔과 네 명의 공장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신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치고 그 백성들을 흩어버리고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 열국의 뿔들을 공장(craftsmen) 네 명이 와서 두렵게 하고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위의 세 가지 메시지를 종합해 보자.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고 도시와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시며, 그들을 헤친 악한 열방들을 무너뜨리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언약의 백성을 위해 진노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
왜 이런 약속을 주셨을까? 그 해답은 하나님 언약의 신실함에서 찾아야 하며, 앞서 강조한 14∼15절 말씀이 관건이다.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해 크게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열방에 대해 심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질투와 진노 또는 분노는 크리스천으로서 경계하고 지양해야 하는 심리 상태로 알고 있다. 그런데 질투와 분노가 하나님의 성품이라니, 어떻게 보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와 질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먼저 의로운 분노와 의롭지 못한 분노가 있다. 우리의 분노에는 원한, 악의, 상처받은 자존심 또는 앙갚음이 배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는 이런 것들이 전혀 없고 오직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며 죄에 대한 완전한 거부인 것이다.마찬가지로 정당한 질투와 부당한 질투가 있다. 질투는 라이벌에 대해 견디지 못하는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누가 나보다 사역에서 훨씬 뛰어나고 지혜롭다면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옳지 못하고 부당한 질투다.
그러나 결혼 관계에서 당사자와 배우자의 사이에 제3자가 끼어 든다면, 이때 발생하는 질투는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은 언약으로 묶인 결혼과 같은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올려드리는 영광을 제3자와 나눠 가지시는 분이 아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외의 다른 관계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하나님의 정당한 질투가 불 같이 발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흩어버린 열방의 죄에 대해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는 분이시다. 스가랴서 2장에서 “시온을 범하는 자는 나의 눈동자를 범하는 자”(8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본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와 정당한 질투를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아직도 많은 곳에서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버리셨느냐며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항상 그 백성과 교회를 위해 크게 질투하시며 박해자에게 심히 진노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이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빛과 소금
글·존 스토트 / 일러스트·장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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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인 스미스 칼럼

은사에 따라 일할 것인가 필요에 따라 일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를 빚으셨는지 생각하고 나의 은사와 기호(嗜好)와 관심사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우선 고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또 자신의 내면을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바깥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
일전에 친구의 아들 크리스가 진로 문제로 고민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현재 의학부 예과 3년생인 크리스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의료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의 소명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의학에 필수적인 자연 과학 과목들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반면에 인문 과목 특히 예술과 드라마에서 뛰어난 가능성을 보였다. 그는 연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던 터라, 교내 연극에서 몇 차례 주역을 맡기도 했다. 크리스는 연기에 재능과 열정이 있어서 현재 연기자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연기자를 직업으로 가진다면,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데 의료 선교만큼 공헌하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간직해 온 인생의 목표를 그리 쉽게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 과목들을 더 열심히 공부해 의학을 계속해야 하는가? 세상을 보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의료 선교사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연기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재능과 은사에 대한 발견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최선에서 떠나게 되는 사탄의 유혹인가?

내면보기 vs 바깥보기의 갈등
많은 사람들이 여러 상황에서 이와 유사한 갈등을 자주 느낀다. 한편에는 사람을 돕고 사역할 수 있는 황금의 기회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천부적인 은사나 기호와 더 잘 어울리는 어떤 기회가 있다.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절망적일 정도로 멀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직업의 선택뿐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이런 내면보기 vs 바깥보기의 이슈에 부딪힌다. 교회를 섬길 때도 도움의 필요성이 지대한 분야와 자신의 은사 및 기질에 더 잘 맞지만 상대적으로 도움의 필요성이 덜 한 분야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자신의 내면보다 바깥을 보는 편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충고를 기독교 범주에서 흔히 듣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ability)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도움(availability: 언제든지 곁에서 도와줄 수 있는 상태)을 원하신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귀중한 충고가 되겠지만,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은사가 결여된 한 분야에서 책무를 떠맡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믿음으로 최선의 수완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존중할 만한 선의의 시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내면보기와 바깥보기 중 어느 쪽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가?

내면 은사와 세상 요망의 균형 잡기
두 가지 사안은 결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바깥 세상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 짐에 관심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릴 것을 말한다. 하지만 곧바로 ‘산 제물’로서 자신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 자신의 역량을 사려 깊게 평가하십시오”(롬 12:3 필립스 역). 우리는 가능한 현실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이해를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독특한 은사와 특질들을 잘 감별해, 선한 청지기로서 이를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에 관한 지각 있는 결정은, 자신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실들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 및 봉사의 기회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상호 적절히 배합시킬 때 이뤄질 수 있다.
나아가 우리의 자기 이해는 단지 내면을 볼 때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어울림을 통해 부상한다. 만일 나의 은사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때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아마 평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요망 사항을 이해하고 그에 부응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유능한지 측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은사를 발견할 수 있고 강점과 약점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정도 대담한 실험도 필요하다.
필자는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스로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어느 토요일 밤에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다음 날 오전에 주일학교의 대학부 시간을 목사님 대신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아마 죽을 쑬 것이라고 염려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성경 공부가 끝난 후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셨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그 경험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매우 즐거운 것이었다.
인생에서 실험의 필요성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은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거나 창조적 지평을 모두 답사했다고 확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시다. 간혹 우리의 능력 밖이라고 생각해 오던 일들을 근사하게 수행해 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든 심지어 노령에 들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수완이 있음을 보여 주실 수 있다(시 92:12∼14).
필자가 아는 어느 부인은 중년의 가정 주부로서 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워싱턴 DC의 빈민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 도움을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교외에 거주하는 중산층 여성에게 없는 편두통도 생길 법한 업무였다. 그녀는 사회 사업이나 다른 문화권 사역에 전혀 경험이 없었지만, 일단 하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대단히 유능하게 사역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편두통도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때로 용기 있는 실험이 우리의 잠재 능력에 놀라운 빛을 비춰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경험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은사에 따라 일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현실에서 기독교적 삶의 순례 여행을 여러 차례 실시하면서 자신의 잠재 능력을 더욱 완벽하게 발견해 나간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에 때로 우리는 자기 이해의 높은 고지로 올라가, 자신에게 특정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사용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이런 은사와 동기 부여 받기의 패턴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잠재력과 잘 일치하도록 삶에 모종의 변화를 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면보기와 바깥보기 간의 갈등이 특별히 심각해지는 때가 바로 이런 경우다. 자신의 은사가 관심이 큰 분야에서 가장 탁월하게 일을 수행한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자신의 잠재력을 간신히 열어줄 만한 기타 어떤 일이나 타인들의 요망 사항을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경우에 필자는 은사에 강조점을 둬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은사의 지휘에 따라야 할 자유와 동시에 의무가 있다. 바울이 주장한 로마서 12장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하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은사들을 사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롬 12:6∼8).
하나님께서 어떤 분야에서 은사를 주셨는지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분야에 삶을 투자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각자 받은 대로 은사에 집중한다는 것은, 능히 수행할 수 있는 기타 가치 있는 일들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하나에 집중시킬 수 있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혜택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시켜 수행하게 하실 것이다.

자기 이해의 우선이 평생 원칙
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큰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들의 요망 사항이라는 비교적 추상적인 문제보다 자기 이해에 더 비중을 둬야 한다. 이를 평생 동안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생각을 신중하게 표현하고 싶다. 자신의 일에 마음을 쏟다 보면, 남들의 요망 사항에 대해 마음을 강퍅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기꺼이 자신의 일에 한계를 뛰어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청지기직을 수행하기 위해 할 말을 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들 예컨대 은사, 재능, 성격적 특징, 에너지 수준 등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선택을 내릴 때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것들이 언제나 잠정적 이해 차원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런 정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기 원하시는지 나타내는 아주 중대한 표식이다. 이를 알려 주는 성경의 가르침은 풍부하다.
또한 우리는 바깥 세상을 봄으로써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고 계시는 모든 일들 중에 아주 작은 한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작다. 우리의 일에 대한 결과가 어떠한지 판단하는 데도 빙산의 일각밖에 보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바깥만 본다면 전체 그림을 충분하게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은사와 창조적 기호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필자는 크리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없다. 이후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잠재 능력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직업적 삶의 방향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게 된다. 그러나 만일 크리스의 가장 큰 재능과 흥미가 연기임을 계속 의식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미 깊은 사역을 주실 것으로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낮은 소명을 위해 고상한 소명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하셨는지 알고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면, 자신을 향한 주님의 최고 소명을 이행하는 것으로 확신해도 좋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어떤 은사와 에너지를 주셨는지도 중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그 점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있을 때, 세상의 요망 사항을 위해 인생을 어떻게 투자할 것인지 아주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한 인간이 될 때 남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다.

빛과 소금
글·블레인 스미스 느헤미야 미니스트리 대표로 크리스천들의 재능과 잠재력을 일깨우고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Knowing God’s Will 외 8권의 저서가 있다.
일러스트·안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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