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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십일조가 성경적이라는 분들을 안타까워하며 2012-03-15 19:39:33 read : 65536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박창진5016park@paran.com
한국 교회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십일조를 가르치며 지켜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 근거는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바르게 잘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으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미국의 교회와는 달리 유럽의 교회는 십일조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고 십일조를 신자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십일조를 하는 쪽과 하지 않는 쪽의 주장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양자 중의 한쪽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주장이 성경적으로 정당한지를 검증하여야 한다.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아브라함이 한 십일조와 율법의 십일조이다.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율법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보다 더 진전된 것이다. 더 진전된 계시의 내용을 정당하게 살피면 그 이전의 계시의 내용은 포함되어 있다. 율법의 십일조는 땅을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 등의 가난한 지체들의 생활을 위하여 요구되었다.
율법에서의 십일조는 의무였고 그 의무를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부어주셨다. 율법 시대에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키면 부강하게 되고 다른 이웃 나라들을 통치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용하셔서 언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에 제시된 약속을 그의 백성들이 신뢰하도록 하셨다. 반면에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저주를 받는다.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에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뒤따르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와 함께 제시된 물질적인 부유함의 복이나 심판 선언은 모두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문맥 등을 제시하면서 십일조를 통한 물질적인 축복(말 3:8-12)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십일조를 언급하셨다(마 23:23).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고 책망하신다. 예수님은 율법의 십일조를 하면서 더 중요한 요소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문맥과 문법은 그렇게 말할 여지가 없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셨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다만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다.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율법의 한 조항인 십일조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조항을 그 조항에 담긴 정신과 함께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라기의 십일조 강조와 동일한 맥락이다.
중요한 점은 “율법의 십일조가 오늘날의 교회에게 유효한가?”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중요한 점은 십자가에서 이다. 십자가 이전과 이후는 극명하게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그의 몸된 교회에게 부어주셨다. 옛 언약의 백성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한정적으로 허용되었다. 율법이 중심인 옛 언약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소유하고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누리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식일도 지켰다.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심이었다.(행 21:20). 주후 70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고 돌 성전은 완전히 파괴하시기까지 그들은 율법과 복음 안에 함께 거하였다. 당연히 그들은 십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땅을 경작하여 소출을 얻는 사람들은 율법의 십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언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이방인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경우에는 율법 준수가 아예 요구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이라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천사라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하였다(갈 1:8). 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담이었는데, 예수님께서 폐하셨다고 말하였다(엡 2:15).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옛 언약이 완전히 파기되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었다.
히브리서의 내용은 옛 언약의 완전한 파기를 앞두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새 언약의 우월성을 밝히고 더 이상 옛 언약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옛 언약을 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율법이 포함된다. 율법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이 포함된다. 율법은 옛 언약의 중심적인 것으로서 옛 언약이 폐하여지면 당연히 폐하여진다.
십일조는 율법의 한 조항이다. 율법에서 아주 특별한 조항이 아니다. 다른 모든 조항과 다르지 않은 한 조항일 뿐이다. 율법이 폐해질 때에 십일조도 폐해졌다. 십일조만 예외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십일조 제정의 목적을 살피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십일조는 돌 성전 시대에 하나님께서 돌 성전과 관련하여 명하신 율법이다. 십일조의 또 다른 용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십일조는 돌 성전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돌 성전이 파괴됨은 그것에서 사역하던 레위인이 사라지고 그와 연관된 율법 조항들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구분하고 도덕법은 오늘날 유효하고 나머지는 폐하여졌다는 개혁주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에도 십일조는 오늘날 유효하지 않다. 십일조는 도덕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에 언급되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강조하셨다(마 23:23, 눅 11:42).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의 시대를 여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현재적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그 율법을 준행하셨다. 십일조 준수는 그 한 내용이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공생애 이전에는 십일조를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셔서 율법에 있어서도 흠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강조하심에 있어서 문맥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는 상황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들이 율법의 십일조를 한다고 자랑스러워함에 대한 책망이 그 문맥이다. 즉 예수님은 율법이 폐하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옛 언약의 백성에게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에서 십일조를 요구하시고 말라기서에서 강조하신 것과 동일한 성격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율법과 연관된 십일조 평가에 따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복음 안으로만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요구되지 않았다. 율법을 요구하는 자체가 죄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시계추가 율법을 지나 복음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유대인 교사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물론 복음이 그 내용 상 율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있으며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이 외형적으로 율법의 어떤 내용과는 일치하게 된다.
십일조는 돌 성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율법으로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이 뒤따랐을 것이다. 십일조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를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왠만큼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서신서 어디에도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 요청도 십일조를 요구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인데도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기에 십일조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셨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기에 하여야 한다고 하면 안식일을 준수하셨기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만약 예수님께서 행하셨음에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된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잘못이다.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새벽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신 많은 행동들에 대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교회는 성경적인 원리를 토대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여야 한다.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새벽 기도회 등을 함께 생각하면 어떤 원리의 일관성이 없다. 십일조는 예수님께서 지키셨고 지키라고 말씀하셨기에 유효하다고 한다. 안식일 준수는 예수님이 지키셨지만 지키라고 말씀하지는 않았기에 유효하지 않다고 한다. 새벽기도는 예수님이 행하셨고 행하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본받는 것으로서 유효하다고 한다. 이는 교회가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명백한 잘못이다.
안식일 준수에 있어서는 주일 성수로의 대체가 명백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 안식일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백성에게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주일을 주셨다. 초대 교회가 안식 후 첫날, 매 주일 첫날에 공적 예배로 모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비록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따로 없더라도 언약의 점진성을 따라서 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것을 옳다. 안식일의 완성으로서의 주일과 그 날에 초대 교회가 공적으로 예배한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임이 분명하다.
그 당대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주일 성수는 아니었지만 주일을 지키는 것 자체는 사도적인 복음의 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십일조와 연결시켜 십일조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아니다. 안식일의 완성으로서의 주일과 주일 성수가 명백한 것과 같이 십일조의 완성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기 위한 것이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자신이 아닌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사도들은 완성된 십일조를 교회에게 가르쳤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물질을 두 가지 용도로 나누어 말한다. 씨와 먹을 것이다(고후 9:10). 먹을 것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는 물질이다. 씨는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어려운 지체들과 불신자들을 돕는데 사용하는 물질이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심어야 한다. 십분의 일이라거나 십분의 이 또는 삼이라는 등의 물질에 비례하는 어떤 기준은 없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을 씨로 받아들이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자원하여 즐거움으로 심는 것이 십일조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음을 말하면서 십일조는 교회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주일과 주일 성수가 옳은 것과 같이 십일조의 완성으로서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가 옳은 것이다.
이는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면서 십일조가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의 잘못도 동시에 밝히고 있다. 십일조의 정신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소득의 얼마를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적정한 수준에서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어려운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는 기준을 정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소득의 십분의 일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데 내어놓지 않는 신자라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십일조의 정신을 살려서 신자에게 물질 사용에 있어서 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전혀 잘못된 논리이다. 먼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보다 신자의 내면과 형편을 더 잘 아신다. 사람의 판단과는 비교되지 않게 정확하게 아신다. 그럼에도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게 물질 사용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또한 신자들의 모습은 다양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소득의 십분의 일조차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자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십일조를 하고서 그것을 만족하며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있다. 십분의 일 이상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여야 하는 경우에도 십일조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십일조를 하지 않고도 소득의 십분의 일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신자도 있다. 많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유럽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사회 복지와 제 3세계를 돕는 일에 자신들의 소득을 사용하고 있다. 십일조를 하는 한국 교회의 신자들보다 훨씬 비율이 높다. 바나바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지체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 것(행 4:37)도 동일한 원리이다.
만약 율법의 십일조가 옳다면 바나바가 땅을 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십일조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기업인 땅을 보존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희년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사도들로부터 듣고 바나바는 땅을 팔 수 있었다. 그 값 전부를 가난한 지체들을 위하여 기꺼이 즐겁게 내어놓을 수 있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모두를 내어놓은 것이다.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면서 십일조의 실제적인 사용은 십일조 제정의 목적과 전혀 다르게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난한 지체들과 불신자들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 그 자체이다. 그런데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며 십일조를 하게하고서는 그와는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말로는 십일조의 정신을 말하면서 행동으로서는 십일조의 정신을 저버리는 처사이다. 한국 교회는 십일조가 교회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경상비로 사용하고 있다. 구제나 선교를 위하여서는 전체 재정에 비해 너무도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십일조의 정신이 어떻게 헌금하도록 하는 방편으로만 이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폐하려고 오시지 않고 온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산상수훈은 십자가 이전에 주어진 말씀이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새 언약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은 탄생과 공생애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는 것이었다. 율법으로 흠이 없게 된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셨다.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율법과 완성된 율법이 존재하게 된다. 율법과 완성된 율법은 분명히 다르다.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같은 언약 안에 있는 형제- 사랑이다. 완성된 율법의 대강령은 예수님 같이 하나님 사랑,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이다. 율법에서 십일조는 완성된 율법에서 물질이 씨와 먹을 것으로 구별되고 씨에 해당되는 물질을 의를 위하여 심어야 한다는 것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신약의 교회에게 아브라함의 십일조, 율법의 십일조, 공생애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은 죄악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도 강하게 거부한 다른 복음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자는 그의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말이다.
박창진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말씀사역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밝혀 교회를 개혁하며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되기를 꾀한다. 하나님 나라가 민주주의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완전하게 하기에 이 사회와 역사의 진보를 꾀한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BCRestoration(개혁과 진보)이다. 트잇은 @pcj501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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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나누기(34개)
양사랑 (112.163.44.49)
2012-03-11 18:34:08
목사님의 용기있는 글 감사합니다.
신성남 선생님의 글을 참으로 통감합니다.
십일조의 문제는 우리교회도 심각합니다.
우리교회의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100만원 수입있는 성도가 10만원 십일조내고 어렵게 생활하는 성도가 있고 300만원 수입있는 성도가 30만원 십일조 내고 270만원가지고 생계를 꾸미며 살고 또어떻 성도는 1000만원 수입이있어 100만원 십일조 내고 900만원을 가지고 호화롭게 살고 100만원 십일조 내었으니 헌금의 의무를 다했다고 하는 성도들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든 수입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것 좋은 신앙고백이지요 10%라는 구지 구분지어 헌금을 내는것은 모순이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서 목사들이 헌금을 성도들에게 강요하는것이 아니라 성도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헤에 감사하며 인색함없이 드리는것이 진정한 헌금이며 신앙생활하는것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설교시간마다 무슨 서약서를 할때마다 십일조의 강조와 형이상학적인 헌금 강요로 인하여 성도들이 교회나올때마다 목사보기에 미안스럽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 현실이지요.
담임목사는 매주 성도들이 얼마나 헌금을 하였는지 관찰하고 이사람은 얼마를 내야할사람인되 내지않는다고 평가하고 하지말아야될 설교시간에 예를 들며서 설교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 깝습니다.
연말되면 헌금적게한다고 신앙생활의 문제가 있다고 집사직분을 주지않는 것이 우리교회의 현실이며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경제적 형편이 좋은 성도가 오면 온갖 아부를하며 심방을 자주가며
무엇이라도 내어줄것 처럼 행세하는것이 우리교회의 현실이며 교회의 가난하고 병들고 돈없고 나이들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생색내기식의 도움을 주고 떠들어대는 교회 환멸을 느낌니다. 목사님들은 그러한걸 못느끼는지 화인 맞은 목회자가 많습니다.
얼마전 교회의 연간 수십억원의 헌금 사용내역서를 공식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하고 홈페이지에 올리는것 좋지 안겠느냐고 건의하였더니 목사공격하고 사탄이 교회지도자를 음해한다고 설교시간에 공개적으로 말하고 그런성도는 떠나라고 합니다.
하나님보기에 두렵지도 않는지 천국가서 어떤심판을 받을지 무섭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요즘세상은 기업체든 관공서든 어느곳이든 투명하게 돈을 사용한 내역서를 공개하고 감사를 받는데 교회는 왜이런지 목사님과 성도들의 답변 부탁합니다. (제왕적인 목사는제외)도저히 이유를 알수가 없으며 떳떳하게 왜 공개를 하지않는지 너무너무 탄식합니다.
이렇게 하니 많은성도들이 저희교회를 떠나고 또 이런사실을 모르고 들어온 성도들이 들어와보니 이것은아니다 하여 소문듣고 성도들이 떠나는것을 너무나 많이 볼수가 있습니다.
이렇케 교회가 잘못을 저질러놓고 많은성도들이 주5일제니하여 핑게를 달아 성도들이 예전처럼 열심이 살아지고 떠난다고하고 있습니다.
교회 목회자는 반성을 하여야 합니다. 책임은 교회지도자의 책임이 엄청큼니다.
신앙생활을 돈의 부담과 목사의 평가없이 예배를 드리며 기도 하며 신앙생활했으면 하는것이 저희의 소원입니다.
요즘 세상에 이것이 이루어 질까 속상합니다.
예수님오면 이루어 지겠지....
부목사님도 담임목사의 눈치보고 담임목사의 의중에 맞는 설교를 하야하고 바른소리하면 떠나하면 부목사님의 생명이 끝나는 현실 이것 또한 참담합니다.
나그네 (218.237.151.172)
2012-03-15 17:55:38
십일조 내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목사님이 내라고 해서 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내기때문에 낸 돈은 누가 어디에 써도 할 말이 없습니다. 돈은 내 손을 떠나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판단하고 내면 되겠습니다.
rydls123 (121.168.246.42)
2012-03-15 17:41:14
댓글을 보며 잘 생각해보자 십일조 헌금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도대체 받을 근거도 없고( 이미 세계교회들은 다 폐지함) 헌금 내역도 안 밝히는 엉터리 헌금이다 정말 떳떳하다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깨끗하고 자유로와야 하지 않을까? 개신교가 이런 곳인가 실망이다 100번의 설교보다 이 점에 먼저 당당히 나서라!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면 또 사이비 교회가 아니라면 왜 근거를 못 대고 왜 내역을 못 밝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복음을 논하지마라!!! 삯꾼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ㅍㅎㅎ하 (112.155.201.14)
2012-03-14 16:54:32
신약시대 이후엔 십일조뿐만 아니라 다바쳐야 한다.
개가 웃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다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횐 십일조 만아니라 다 바쳐서 필요를 따라 나누었씁니다. 안 바친 부부는 죽어버렷습니다. 예수님 제자 되려면 가진것 모두 주께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안바친다고 쇠고랑안차고 경찰이 안잡아 갑니다. 하지만 십일조도 못하면 그건 교인도 아닙니다. 겨우 십일조도 못바치고 어떻게 예수처럼 살겠다고 합니까? 교회는 가진것 다 내놓으라 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장청 (65.49.14.82)
2012-03-14 17:34:35
성경을 모르니 용감해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모든 소유를 바치지 않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모든 소유를 바치지 않았음에도 마치 바친 척 거짓말을 해서 죽은 것입니다. 죽은 이유는 성령을 떠본 '거짓말'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5장의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전재산을 바치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이적과 표적과 권능이 나타나자 신자들이 충만해져서 자발적으로 전재산을 바치고 각자 필요한만큼만 가져다 쓴 것입니다. 행2장,5장의 전재산 나누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다른 초대교회들은 전재산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편지한 고린도교회, 다른 이방교회들도 초대교회인데, 이들은 신자들이 교회에 전재산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소정의 연보를 냈습니다. 사도는 가난해진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고 이방교회들에 연보를 부탁했습니다.
만약에 요즘 사람들에게 전재산을 바치라는 곳이 있다면 더러운 이단종파라는 의심을 받을 겁니다.
ㅍㅎㅎ하님은 아래 율법을 일점 일획도 빼지 않고 지키십니까?
◈새신랑은 1년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 기간 동안 새신랑은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다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하고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
◈남자는 결혼한 여자가 숫처녀가 아니면 친정집 문 앞에 끌어내서 돌로 쳐 죽이라.
◈안식일에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
◈짐승에게 짐을 싣거나 내릴 때 도와줘야 한다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
노장청 (65.49.14.86)
2012-03-14 16:28:10
십일조는 사라졌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바리새파 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한다고 했으나 사도들과 장로들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행15장)” 외에는 이방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바리새파가 누구인가? 십일조를 과잉으로 지키고 자기들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를 설명하려면 십일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바리새파는 인과 의와 신은 무시하고 살지라도 십일조만큼은 과잉으로 지켰다. 바리새파가 사도행전 15장 5절에서 모세의 율법을 제시했는데, 구약을 살펴보면 모세의 법에는 할례가 대표적이고 바리새파가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켰던 십일조도 포함된다. 바리새파는 할례를 선봉에 세워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주장하면서 아마도 공회에서 십일조도 언급했을 것이다. “많은 변론”(7절)이 있었다고 한다. 공회의 많은 변론 중에 바리새파는 할례를 비롯해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고 주장했고(5절), 15장에는 십일조는 나오지 않고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많은 변론 중에 바리새파에 의해 제시됐다고 하는데, 아마도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에 포함되는 것들을 일일이 열거했을 것이다. 십일조도 언급했을 것이다. 공회 결과는 성령의 이름으로 사도들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피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이방교회에 요구하지 않았다.
십일조 헌금은 내 소유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의미한다는 말도 악용의 소지가 있다. 만약에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신앙고백이 없다는 말인가? 만약에 십일조는 내지 않지만 의롭고 정직하게 살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는 사람이 소득을 생활비로 잘 쓰고 직접 남을 도와주는 삶을 산다면 이는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인가? 내 소유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왜 십일조 헌금으로만 설명하는가? 십일조를 하지 않고 헌금을 소정액만 교회에 내도 나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을 십일조로 정해놓은 것은 악용의 소지가 많다. 만약에 교회에 헌금하는 십일조만이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돈을 신자들의 헌금을 탐내는 사람이다.
미국도 십일조는 몰몬교, 안식교와 일부 교회에서만 한다. 미국의 한인교회도 거의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미국백인교인들도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십일조를 하는 소수의 미국백인교인들마저 한국처럼 의무로 요구하거나 신앙고백으로 설명해서 십일조 헌금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유럽은 교회십일조가 없다. 시민들은 소득 10%를 십일조로 교회나 정부에 내지 않는다. 10%가 아니라 소득의 0.8~2% 정도이다. 독일은 정부에 등록된 기독교인만 종교세 명목으로 소득의 1~2%만 정부에 납부한다. 소득이 100만원이면 만원만 종교세를 정부에 낸다. 독일정부가 종교세를 모아서 교회에 나눠준다. 독일은 한국처럼 전체 소득의 10%를 교회에 내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른 유럽나라도 소득의 1% 정도만 교회를 위해 종교세로 국가에 바쳐서 국가가 그 종교세를 교회에 나눠준다. 이마저도 완전히 폐지된 유럽 국가들도 있다.
율법은 십계명이 도덕법으로 그리스도인의 규범이 되어 남아있다. 이점에서 나는 박창진님과 의견이 많이 다르다. 제사는 사라졌다(히10:10-12) 구약 십일조는 의식법에 속한다. 성전과 제사가 사라진 지금은 십일조가 구속력을 잃게 되었다. 내가 말미에 제시한 율법들이 더 이상 신약 그리스도인에게 구속력이 없듯이 십일조도 신약 그리스도인에게 구속력이 사라졌다. 십일조 제도는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연보가 들어섰다.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으로 고난에 빠졌는데 이방인 교회가 십일조를 하고 있었다면 바울이 이방교회에 간단하게 십일조를 모아놓아서 예루살렘 형제들을 도와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편지에서 연보만 부탁한다. 적어도 이방교회는 십일조가 없었다. 부유한 지역인 고린도의 교회도 십일조가 언급되지 않는다.
십일조는 종교국가인 이스라엘의 성전과 제사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된 국민 의무금이었다. 성전과 제사장을 유지하려는 종교세 같은 성격이다. 주후 70년에 건물성전이 무너졌는데 적어도 그때까지 이스라엘에 제사장 제도가 있었을텐데 건물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제사장들은 십일조도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과도기였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성전과 제사장 제도가 전혀 효력이 없어졌고 스데반이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건물성전이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외치다가 신성모독죄로 돌에 맞아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에 바울이 스데반을 배격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그랬던 바울이 이제 예수를 믿고 성전과 제사장이 없어졌다고 선포한다. 성전과 제사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방지역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십일조제도가 없었다. 사도들도 공회에서 이방교회에 요구하지 않은 십일조를 지금 우리가 신약에서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도들을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 이제 성전과 제사장이 없고, 십일조도 없다. 예수님이 구약 제사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이 완성하셔서 제사는 신약교회에 구속력이 사라졌다. 지금도 짐승과 곡식을 바치는 제사가 있고 건물성전이 있는가? 가나안 땅을 못받고 그 건물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금도 있는가? 예수님의 영단번 제사로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짐승 잡는 제사장도 필요없고 건물성전도 필요 없다. 그 제사장들을 먹여 살리는 십일조도 없어졌다.
십일조는 건물성전에 바쳐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주어야 하는데, 신약에 십일조는 누구에게 주고 어디에 바쳐야 하는가? 예루살렘 건물성전은 무너지고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고,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인데, 구약 제사장과 레위인과 제사와 건물성전이 사라진 지금 십일조는 누구에게 주고 어디에 바쳐야 하는가?
누구보다 율법을 정통하게 이해했던 바리새파 출신의 엘리트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완성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율법의 구속력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십일조는 말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내는 연보만을 간절하게 언급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 출신의 바울은 십계명에 속하는 살인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탐심을 품지 말라와 같은 많은 규범들을 편지에 적어 신자에게 지키라고 제시하지만 십일조, 할례, 다른 모세의 법은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에 하는 할례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모세의 의식법들도 지키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도 십일조가 아닌 연보만 제시한다. 십일조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을 제시할때 '자유'를 중요하게 다룬다. 연보도 복음의 정신으로 신자가 자유롭게 책정해서 교회에 내면 되고, 직접 다른 사람을 도와줘도 된다.
한국남자들은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수술해도 된다. 그러나 만약에 지금 우리들 교회가 할례를 구원의 길로는 지키지 말아야 되지만, 단순히 신앙의 유익으로 할례를 받자고 주장한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단순히 신앙의 유익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고 신앙고백차원에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근데 구약 율법 십일조는 왜 이제와서 신앙고백차원에서, 내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 차원에서 지키자고 하는가?
구약 율법인 십일조를 지키는 분들은 아래 율법들을 여전히 구속력 있게 지키고 계신가? 만약 안지킨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아래 율법은 안지키면서 유독 십일조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신랑은 1년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 기간 동안 새신랑은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다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하고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
◈남자는 결혼한 여자가 숫처녀가 아니면 친정집 문 앞에 끌어내서 돌로 쳐 죽이라.
◈안식일에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
◈짐승에게 짐을 싣거나 내릴 때 도와줘야 한다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
바다로 가는 샛강 (211.187.2.91)
2012-03-13 22:26:36
하나님의 법의 무서움을 모르고서....
십일조가 지금 교회와 무관한 것이라면,
첫째, 교회재정을 무엇으로 확보할 것인가요?
구약에서의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하나님의 전에서 전임으로 일하는 제사장과 기업을 가지고 있지 못한 가난한 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재정의 절반 이상의 수입이 십일조에서 옵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으로 재정을 확보해야 하는지 답을 주세요.
둘째, 그렇다면, 담임목회를 위해서는 담임자가 이중직업이거나 자비량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새벽예배 및 수요예배 혹은 금요예배를 당장 폐해야 할 것입니다. 직업을 가진 담임자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란 버거울 것입니다. 답을 주세요.
셋째, 사실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목회는 부한 자나 후원배경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답을 주세요.
교회의 부패가 십일조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지극히 불신앙입니다. 교회의 부패나 쇠락은 당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는 그러한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질주의, 현실중심주의 등도 당연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비판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생각으로 너무 쉽게 난도질하는 것입니다.
나이들수록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엄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한방울 내지 못하는 인간이 무슨 인간의 말로 하나님의 법과 그 뜻을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너무 쉽게 지금 우리와는 무관한 것처럼 말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성도의 시각이 물질중심적이고, 현세중심적인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쇠락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신학교에서 배운 어저짢은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의 깊은 진리와 뜻을 너무 쉽게 난도질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구약의 법을 안식일 교인들처럼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을 내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시대가 변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려고 하면 됩니다.
구약의 법을 목회자가 자기 중심적으로 혹은 목회자를 위한 인간의 법과 성도들을 속박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위해 행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를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시한 문제제기에 대한 성경의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이 글은 그저 비난이나 자기 중심의 논리에 의한 비판일 뿐입니다.
이상주의자는 아니신지요? 주님도 땅을 밟으셨는데, 땅을 밟으세요.
그리고 주님이 십일조를 왜 하라고 하셨는지 깊이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부모님을 왜 공경하라고 하는지 생각해보세요.
이미 지난 구약의 법이니 지키지 말아야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법이니
이방인인 우리들과는 무관한 것입니까?
답을 주세요.......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면, 함부로 글을 쓰지 마세요.....
신성남 기자님 펌글 (65.49.14.86)
2012-03-14 16:31:05
전세계 90% 이상의 교회들이 십일조 없이 운영하고 있습니다(펌)
신성남 (49.50.206.22)
2012-03-14 11:49:06
전세계 90% 이상의 교회들이 십일조 없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은 사도바울의 가르침대로 '자율적인 헌금'으로 충당하면 됩니다. 십일조가 없었던 사도들의 교회가 그랬고, 현재 십일조가 없는 대부분의 외국 교회들 역시 그리 하고 있습니다. 님의 논리라면 위의 외국 교회들은 모두 문을 닫았어야 하겠군요.
그리고 과연 지금 한국 중대형 교회들이 십일조가 없어서 운영을 못할 정도로 가난한가요. 무리한 건물 증축이나 사업 확장을 하지 않는다면 주일 헌금으로도 얼마든지 적절하게 운영을 할 수 있습니다. 단 미자립 교회의 경우는 어차피 별개의 문제입니다.
보다 큰 문제는 인식의 차이에서 옵니다. 어차피 교회 재정은 신도들의 주머니에서 충당됩니다. 그런데 '강요적 십일조'가 아니면 헌금을 충분히 걷을 수 없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의 신앙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요. 건강한 교인들이라면 헌금 종류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교회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형편에 따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낼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 옳구요. 반강제적으로 내는 것은 결코 '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십일조가 없으면 담임목회가 불가하다는 논리는 잘못입니다. 아울러 자비량 목회는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일 뿐입니다.
노장청 (65.49.14.86)
2012-03-14 16:29:12
부족하지만 답을 드립니다
첫째, 교회가 사업체입니까? 교회가 먹고 사는 곳입니까? 교회의 재정확보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결국 목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군요.
둘째, 새벽예배, 수요금요예배.. 있어도 되지만 없어도 됩니다. 아디아포라입니다.
주의 날에 모여서 예배드리면 되겠습니다.
셋째, 바울은 자비량을 했습니다. 자비량을 하지 않으려면 신자들에게 목사의 최소생계는 유지해달라고 호소하세요. 그래도 신자들이 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사모들이 나가서 생활비를 벌어오는 교회도 많습니다. 가난하다고 목회가 불가능하다는 발상은 불신입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충족돼야 목회가 가능하다는 발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마23:23에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직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는 제사가 필요없고 십일조도 필요없습니다.
신자는 소득의 10%를 십일조로 교회에 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신자의 마음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이 주신 법이지만 십일조는 신약에 사라졌으며 더이상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데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신자들에게 말하면 신자들의 영혼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일조를 말하지 않고 연보를 말했습니다. 연보는 자유롭게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똑똑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서 성경을 적은 바울은 연보만 말했습니다.
목회자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억지로 해석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설교하면 안됩니다.
가난이 싫고, 풍족히 먹고 살고 싶으면 목사를 하지 말고 사업가가 돼서 풍족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다.
목회자 (61.170.232.92)
2012-03-12 18:21:25
십일조를 탈세하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격이 없으며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창17:9-14 모세 이전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이라”고(요7:22) 하였듯이, 십일조에 대하여서도 모세에게 율법으로 명령하시기 이전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미리 말씀을 하였습니다.
창14:18-20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
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
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
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살렘(예루살렘)왕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여 말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하고 복을 빌어 주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모세의 율법시대 이전에 믿음의 시대인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법을 좇아 순종하였습니다.(창26:5)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아브람)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히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
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일체(一切) = 모든 것. 온갖 사물.
아브라함이 일체(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5년-10년 동안 신앙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자들이 많고, 그리고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 중에도 혹 정직한 금액의 십일조를 바치려고 하니 돈이 너무나 아까워서, 50%-70% 정도의 거짓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달의 소득이 천만 원이면 십분의 일인 백만 원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쳐야 하는데 아까운 생각이 들어, 백만 원을 다 바치지 아니하고 50만원-70만원을 십일조라며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의 드리지 않고 자신이 착복한 30만원-50만원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을 한 것이 됩니다.(말3:8-9)
아브라함과 야곱처럼(창28:22) 십일조는 일체(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복을 받습니다.
히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노략물(擄掠物) = 떼를 지어 약탈한 물건.
아브라함이 노략물(창14:1-16) 중에서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십일조)을 저(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노략물 중에서 좋은 것으로 주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사기(詐欺) = 꾀로 남을 속임.
신약시대인 지금은 십일조를 돈으로 드리지만, 구약시대에는 가축과 농산물 등의 물건으로 드렸습니다.
가축은 흠이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하였으며(레22:17-25), 가축의 떼 중에서 흠이 없는 좋은 것이 있는데 그 좋은 것은 두고, 흠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사기하여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말1:13-14).
신약시대인 지금은 돈으로 십일조를 드리니 은행에서 신권(새돈)을 찾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옳은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고후9:7,출25:2) 좋은 것으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레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곡식(穀食) = 사람의 양식이 되는 쌀, 보리, 콩, 조, 수수 따위를 통틀어 일컬음.
과실(果實) = 과수에 생기는 사과, 배, 감, 밤 등의 열매.
성물(聖物) = 하나님 앞에 구별된 거룩한 물건.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하였으니, 모든 곡식과 과실의 십분의 일(십일조)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부가가치세라는 세금이 있는데, 상품 등의 물건에 국가가 부가하는 세금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나라에 10%의 부가가치세를 바치듯이,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십일조를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눅20:19-26)
우리나라의 국민들 중에서 소득세와 취득세와 부가가치세 등의 각종 세금을 탈세하는 사람은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으며 탈세범이 되어 징역을 살듯이,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탈세하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격이 없으며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레27: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속(贖)하다 = 바꾸다.
사람이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의 십분 일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면, 그것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인 사과 열 개를 다른 사과로 바꾸어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면, 다른 사과 열 개에 그 오분의 일인 두 개를 더하여 사과 열두 개를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가축의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레27:32-33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우열(優劣) = 우수함과 열등함.
교계(較計) = 서로 견주어 살핌.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소나 양이 지나가는 통로 위에 막대기를 걸쳐놓고 그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소나 양)의 열 번째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십일조로 바치는 소나 양의)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여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니, 속하지(바꾸지) 못하리라.
땅의 곡식이나 과실의 십분의 일을 속하려면(바꾸려면) 그것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속 할수 있지만, 소나 양과 같은 가축의 십분의 일은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 것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으니, 지금도 시골에서 축산업을 하시는 분들은 가축이 새끼를 많이 낳으면 통로 위에 막대기를 걸쳐놓고,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 것마다 구별하여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치면 됩니다.
(십일조인 가축의 새끼를 팔아서, 돈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구약인 모세의 율법에는 아론의 후손들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기업도 없고 분깃도 없는고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며, 레위인들은 그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십일조)를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에게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민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
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기업(基業) = 부모나 근친에게서 물려 받은 재산(토지).
분깃 = 분배하여 받을 몫(주로 토지를 말함).
하나님께서 제사장인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아론)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고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하나님이=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목사들과 전도사들도 이 세상에서는 기업도 없고 분깃도 없으며, 하나님이(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분깃이며 기업이니, 자신들의 기업이며 분깃인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하시기 바랍니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내(하나님)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민3:17 게르손, 고핫, 므라리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민1:47-53,3:5-9,21-37,4:1-33) 갚는다고 하였습니다.
민18: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거제(擧祭) = 제물을 들어서 드리는 제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에서 일을 하는 레위인들에게, 땅의 소산과 가축과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민18:25-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
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모세)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취하여 너희(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취할 때에, 너희들이 받는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십일조)를 거제로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분의 일(십일조)을, 레위인들이 거제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민18:28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
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
에게로 돌리되.
거제물(擧祭物) = 하나님께 거제를 드린 제물.
너희는(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는 모든 것(십일조)의 십일조 중에서(십분의 일을)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라.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받는 모든 것(모든 십일조)의 십분의 일(십일조)을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고, 하나님께 드린 그 거제물(레위인들이 바친 십일조)은 제사장 아론(아론과 그 자손들)에게로 돌리라(기업으로 주라)고 하였습니다.
말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
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도적질 =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짓.
헌물(獻物) =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 (첫열매, 서원 예물 등)
사람이 어찌 감히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기독교인들은) 나(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이스라엘 백성들=지금은 기독교인들) 곧 온 나라가(이스라엘 온 나라의 백성들이=지금은 우리나라 온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나의 것(하나님께 바칠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기독교인들이) 저주를 받았느니라.
앞으로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지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실 때가 반드시 있으니,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이제부터라도 정직하게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바쳐서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온전(穩全) = 흠결이 없이 완전함.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기독교인들)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교회)에 들여 나의 집(하나님의 교회)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쳐 교회에 양식이 있게 한 것으로) 나(하나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온전한 십일조를 바친 자들)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교회에 들여 나의 집(하나님의 교회)에 양식이 있게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드리는 십일조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인가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
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반드시 = 꼭.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모든 것(소득)에서 십분 일(십일조)을 반드시 하나님께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십일조에서 50%-30%를 떼어놓고 그 나머지를 하나님께 십일조라며 드리는 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닙니다.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인 것입니다.
마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
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찌니라.
의(義) = 사람이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 옳은 행위.
인(仁) = 어질다. 불쌍히 여기다.
신(信) = 믿음. 신의. 믿음성이 있고 성실함.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 등 물질의 십일조는 잘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물질의 십일조보다도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의 십일조는 잘 드리되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다고 하신 뜻은,
1).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좇아서 의롭게 살지 아니하는 것이 의(義)를 버린 것입니다.
2.)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어질지 아니한 것이 인(仁)을 버린 것입니다.(엡4:32,호6:4-6)
3). 입으로는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믿지 않는 것(시106:24-25,막1:15)이 바로 신(信)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박하와 회향과 근채 등 물질의 십일조도 정직하게 드리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의와 인과 신도 행하여야) 할찌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고 아울러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온전한 십일조에 대하여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정직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둘째는, 물질의 십일조와 아울러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약속대로 반드시 부어 주실 것이니,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롬4:18-22)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으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버린고로, 천국에 들어가지(마5:20) 못하였습니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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