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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16-31/ 놀라운 평화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31:20 read : 10385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十四․二十七)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여러 가지 있으나 가장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생입니다. 죽어도 사는 영생한 생명을 주십니다. 또 하나는 여기에 말씀하시는 평안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주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여기에 주님께서 평안이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가 주를 믿으면 아무 환난이나 재앙이 없겠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에 특별히 나의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나의 평안은 곧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지셨던 그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히 육신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육신생활을 생각해 볼 때에 그의 일생은 평안한 생활이라고는 본 수가 없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무리 둘 곳이 없노라.』하는 생활을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본래 마구간에서 나시고 어렸을 때 애굽에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고 갈릴리 나사렛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어렸을 때부터 수고롭게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전도하는 동안에도 많은 고생과 핍박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의 일생을 우리가 회고해 볼 때에, 육체적인 면에서는 평안한 생활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나의 평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름 아닌 곧 심령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 가 바람으로 말미암아 그 표면에는 파도가 일지마는 깊이 六十척 七十척, 들어가면 언제나 잔잔한 것과 같이 윌 주님의 생활이 바깥에서 볼 때에는 여러 가지로 풍파가 많고 요란한 생활이었지마는 그의 심령 깊은 속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생활 가운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같이 하시는 생활 가운데서 오는 평안인 것입니다. 또한 깊은 심령 속의 고요한 양심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른 이들은 이와 같은 평화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악한 헤롯왕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해서 예수 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야고보를 손을 들어 칼로 죽였습니다.
이것을 유대사람들이 오히려 기쁘게 생각한 것을 보고, 다른 사도들도 해하려고 사도 베드로를 구속해서 깊은 감옥에 두고 여러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읽어보셨는지 모르지마는 거기 보면 내일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 그는 그 날 저녁에 평안히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구원한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는 놀라운 평화가 그의 심령 속에 깃들였던 것을 우리는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十六장을 읽어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역시 핍박을 받아서 억울하게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서 그 밤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발과 손을 착고(着固)에 채우고 대단히 부자유한 가운데서 그 날 밤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에 옥터가 움직이고 큰 지진이 일어난 이야기를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심령 속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화가 깃 들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귀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력이 많고,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지위가 있고 무엇이나 다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 이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령 이런 것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 이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마음만 평안하면 만난 을 돌파할 수 있지마는 마음이 불편하면 적은 일도 할 수 없다.』심지어 편지 한 장을 바로 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병도 속히 고칩니다. 혈액도 순환이 잘됩니다. 소화도 잘됩니다.
요새 의학계의 말을 들어보면 병 가운데 거의 六, 七활이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서 심리적 원인으로 생긴다고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머리가 맑아져서 생각을 바로 합니다. 손과 발이 바로 움직여져서 모든 일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장사도 잘할 수 있고 마음이 평안해야 공부도 잘할 수 있고 학생들도 마음이 평안해야 시험을 바로 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인들은 마음이 평안해야 밥도 바로 짓습니다. 마음 불편한 부인들이 지은 밥을 잘 못 먹다가는 이빨 상하기가 쉽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바느질도 바로 합니다.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 바느질하다가는 손톱눈 상하기 쉽습니다. 평안한 마음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마음의 평화를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 축복을 받았습니까? 이 축복을 받으려면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우리 심령간에 평화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옳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자연법칙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어떻게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법을 어기고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일이 많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를 지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양심에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고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일 옳지 않고, 생활이 옳지 않을 때에, 어떻게 마음이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먼저 화평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아름다운 윤리적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아름다운 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죄의 값인 사망을 만민을 대신해서 홀로 지시고 자기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누구든지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주시고 따라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和平)을 가져오고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죄 사함과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무리 과거에 험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 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금 생뿐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첫째로,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간에 평화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우리 사람이 다 자기자신은 하나이지마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때에는 양심이 분열되어서 자신 안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 국민의 제일 큰 고통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마는 아마 제 생각에는 제일 큰 고통은 이 三八선인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가 한 나라요. 우리 민족이 한 민족이요. 우리말이 같고 풍속이 같고 문화가 같은데 三八선이 가로막혀서, 둘이 되어 이 둘이 간단없이 싸움을 합니다. 六․二五가 났습니다. 지금도 죄 우편에 거의 백만 대병(大兵)이 서로 동족끼리 총칼을 마주 대고 있습니다.
이 내란이 우리 민족의 모든 고통과 빈곤과 모든 재난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하게 우리 개인 하나를 놓고 볼 때에도 사람은 하나인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부가 분열이 되어서 분열된 자신들이 서로 싸움을 합니다. 양심과 정욕이 서로 싸움을 합니다. 이성과 본능이 서로 싸움을 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분슨의 말을 들어보면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서로 싸움을 합니다. 왕양명의 말을 빌리자고 하면 우리 속에 도둑놈이 있어서 이 도둑놈과 항상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란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면 성신의 소욕(所欲)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거슬러서 마음속에서 싸움을 합니다.
우리 마음속 자체에 이런 분열이 있고 내란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불안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七장에 보면『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한 글귀를 우리가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가운데서는 이런 글귀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 마음에 이렇게 분열이 있고, 우리 마음에 이렇게 내란이 있지마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마음속의 모든 원수를 소멸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통합하고 하나로 만들어서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은 그 말입니다.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평강(平康)이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이 내 생활 전체의 주가 되어서 내 의지를 다스리고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에 모든 분열한 것을 다 통합하고 오직 하나로 만들어서 평화를 우리 마음 가운데 가져옵니다. 여러분, 내적 분열과 충돌하는 욕만으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밤잠 못 자는 이가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맡기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기뻐할래 야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웃을래 야 웃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이 다스리게 만드세요. 그러면 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평화를 여러분이 맛볼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과의 평화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형제와 형제간에 불화와 분쟁이 있을 때, 자연히 우리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야고보 四장 一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물론 불화와 분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많이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간단하게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불화와 분쟁은 각각 자기 중심주의, 자기 이기주의로 살게 될 때에 둘이 서로 충돌하여 자연히 불화가 생기고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각 진정한 신앙생활에 들어와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가 자기 생활의 중심이 되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 생활에서 떠나 그리스도를 중심 한 생활로 산다면, 자연히 둘 사이에는 불화가 없어지고 다툴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영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주님의 그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된다면 자연히 불화와 분쟁이 적어질 것입니다.
혹 이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에게 적대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이상,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는 이상, 내게 다시 원수는 없을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입니다. 불안과 공포를 우리에게 항상 가져오는 이 험악하고 변태무쌍(變態無雙)한 세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기할 수 없는 장래에 대한 위험이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험악한데 나는 약합니다. 우리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자연히 우리 마음속에 불안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황막한 광야를 건너서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갈 때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이 생겼습니다. 광야는 물도 없는 곳이요, 먹을 것도 없는 곳이요, 또 원수가 많아서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위험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그의 마음 가운데는 불안이 생겼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압니까?『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내가 네게 쉬 임을 주리라.』『마음에 불안해하지 말라. 안심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하면 환경 때문에, 알지 못하는 장래 때문에 우리가 미리 근심하고 미리 염려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도 맨 마지막에 이런 약속을 하였습니다.『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전에 리빙스톤이 자기 고향을 떠나서 백인들이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 중앙지대를 탐험하며 전도할 때, 언제든지 그의 머리 속에는 이 성경 구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데 내게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하는 신앙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담대히 이긴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피곤하시니까 잠깐 쉬십니다. 그 때에 마침 갈릴리 바다에 큰 풍파가 일어나서 물결이 배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황겁(惶怯)해서 예수님을 깨우면서『아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주님께서는 잠만 주무십니까?』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앉아서 바다를 향해서『잔잔하라, 고요 하라』고 말씀하실 때 바다 가 고요해졌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연까지 지배하시는 초자연적 능력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이적입니다.
그러나 그 뜻만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풍파를 잔잔케 하시는 권세가 있다고 하는 뜻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때는 풍파가 일어납니다. 근심의 풍파가 일어납니다.
시험과 유혹의 풍파도 일어납니다. 큰 슬픔의 풍파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도 큰 풍파가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실 때에 모든 풍파를 잔잔케 하실 능력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 四十一장 十절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우리가 사실 예수를 믿고, 사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님을 영접해서 내 마음에 모시고, 사실 예수 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같이 동행하면 이 축복이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미술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그림을 그려 오라고 하면서 평화라고 하는 제목을 내주었습니다. 졸업생마다 자기가 구상하는 대로 평화의 그림을 한 장씩 그려 왔습니다.
그 여러 가지 그림가운데서 특별히 대조되는 두 그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한 가지 종류의 그림은 산골짝의 호수를 그린 것입니다. 아름다운 푸른 산이 둘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잔잔한 호수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풀밭이 있습니다. 그 풀 위에는 소, 나귀, 말, 양, 산양 이런 짐승들이 한가하게 풀을 먹고 혹은 누워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몇 사람이 한가하게 적은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합니다. 산이 조용하고 물리 잔잔하고 바람이 없고 모든 것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그림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아주 다른 성격의 그림입니다. 바다 옆에 절벽이 있는데 때 마침 바람이 붑니다. 파도가 밀려와서 그 벼랑에 부딪치고는 다시 바다로 거품을 뿜으면서 흘러갑니다.
바람이 심하니까 나무가 꺾여져 내려옵니다. 나뭇잎이 춤을 추며 달아납니다. 얼핏보면 평화가 아니고 전쟁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절벽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갈매기 한 놈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갈매기둥지 옆에는 어미 갈매기가 가만히 앉았는데 둥지 속에는 깐 지 며칠 안 된 갈매기 새끼들이 고요히 눈을 감고 바람은 불거나 말거나 물결은 세거나 말거나 낮잠만 자고 있습니다. 선생은 이 둘째 그림에다 일등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림은 평화는 평화인데 그건 인간의 이상뿐입니다.
이 세상엔 그런 평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폭풍우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참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사실 그런 줄 압니다. 이 세상은 요란합니다. 언제나 혁명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냉전이 계속됩니다.
지금도 월남이 대단히 위태합니다. 지금 우리 귀한 청년들이 그 곳에 가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세상은 풍파가 높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환경에 관계없이 아무리 파도가 높아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세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실 때에는 어떠한 역경이 닥쳐도, 아무리 세상의 파도가 높아도 우리 심령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요한 양심의 평화인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여러분 이와 같은 평화를 받았습니까? 이 평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 평화를 한 번 받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이 평안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환경을 당해도 내 심령은 항상 평안합니다. 그 첫 걸음이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두고 우리 양심이 평안할 수가 도무지 없습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예수 님을 내 구주로 삼으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살아 계신 주님을 내 마음 가운데 온전히 영접해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긍휼(矜恤)과 주님의 생명이 우리 마음에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제가 두 주일 전에 전주에 집회를 갔었는데 그 주일날 오후에 전주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 소생원(蘇生院)이라고 하는 데를 갔었습니다. 거기 있는 수 천명의 나환자가 꼭 한 번 와서 예배를 봐달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가보니까 여기 저기 솔밭 사이에 아주 잘 지은 건물이 있고 예배당도 벽돌로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오후 서너 시 반쯤 우리가 거기 도착하였는데 벌써 三시부터 그분들이 다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을 하는데 예배당 가까이 가니까 찬송소리가 먼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이 가득 모였는데 어떻게 찬송을 부르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떤 분의 얼굴은 나병으로 말미암아서 좀 이상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이 그 때 四三九장 찬송을 부르는데 어떻게 잘 부르는지 제가 그 사람들을 위로할까 하고 가긴 갔었지 마는 오히려 제가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에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참 귀한 것은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다. 이들이 주 예수 님을 알지 못했던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희색이 만면해서 찬송을 부를 수 가 있겠나? 몸은 비록 불치의 병에 걸렸어도 마음속에는 질병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가 있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가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없습니까? 근심에 싸이고 걱정에 싸이고 염려에 싸이고 불안과 공포에 싸이고, 크고 무거운 짐을 진 분은 없습니까? 이제 주님께 나와서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삼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도 겸해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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