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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2:1-6/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 / 한경직 목사 2014-08-23 21:33:08 read : 9395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十二․二)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하나님을 의뢰할 때에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오늘 이 시간, 두려운 마음, 공포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포심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본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목적은 유익한 것으로서 첫째는 마땅히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할 줄 알고, 둘째는 인간의 생명을 위험한 곳에서 보존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타락된 후에는 이런 본능까지 변태가 되어서 마땅히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반대로 안 두려워할 것들을 많이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무 근거가 없는 공포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 공포심은 우리 인간생활에서 행복을 탈취해 가는 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공포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이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산 사람도 두려워하고 죽은 사람은 좀더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이 적게 모인 가운데서도 이야기를 잘하지마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내다 세우면 그만 입이 열리지를 않아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자를 특히 두려워하는 여자도 혹 있고, 여자를 특별히 두려워하는 남자도 혹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들은 결혼생활 하기에 대단히 곤란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빛깔을 두려워합니다. 특별히 검은 빛깔을 두려워하는 이가 있어요. 혹은 붉은 빛깔을 두려워하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소리를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큰 소리, 우뢰(雨雷)같은 소리를 대단히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가 전에 미국에서 입원해 있을 때, 어떤 날 오후에 갑자가 내 옆방에 입원해 있던 젊은 미국여자가 제 방으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니까 상기가 되어 있어요.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그 날 오후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 벼락 소리가 너무 무서워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외에 상상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튼튼하지마는 요 다음에 병 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은 취직하고 있지마는 요 다음에 실직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은 생활이 안전하지마는 요 다음에 빈궁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 다음에 고독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괜찮은데 나이 많아 늙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괜찮은데 내일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지금은 튼튼한 몸으로 잘 살면서도 항상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에 어떤 젊은 여자가 심장이 뛰며 가슴이 항상 아프다고 심장 전문의사에게 가서 진찰을 해봤습니다. 전문의가 아무리 지단해도 심장에 이상이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어떻게 되어서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파서 고통을 당할까 하고서는 심리분석 하는 학자에게 그 여자를 좀 알아보라고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사정을 알아보니 그 여자는 두 번째 결혼한 여자인데 볼래 어떤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매우 행복한 생활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남편이 갑자기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슬픔을 당하고 몇 해 있다가 참 다행히 다른 좋은 남자를 다시 만사서 결혼하고 지금은 매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 여자의 생각에 이 남편이 또 죽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공포심 때문에 결국은 이 여자의 심장이 뛰고 가슴에 고통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때에는 오해에 기인한 공포심도 많습니다. 밤에 예수님께서 갈리리 바다 물위로 제자들에게 오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모르고 무슨 요물이라고 해서, 크게 무서워서 고함을 지른 이야기를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때에는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오해를 해서 크게 무서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없는데 그저 무서운 생각 때문에 늘 마음 가운데 겁을 품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없이 않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는 모르나 그 잠재의식 가운데 어떤 공포심이 있습니다. 흔히 어렸을 적에 놀랐다든지, 어렸을 적에 어떤 무서운 사람에게 고생을 당했다든지, 이런 사람이 장성해서 그 일은 잊어버렸는데, 잠재의식 가운데 이런 무서운 생각이 나서, 항상 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심리적 현상을 가질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편지 받은 분이 혹 계실 줄 알아요. 저는 소위 행운의 편지라 하는 것도 종종 박습니다. 이 행운의 편지라고 하는 건 아무 쓸데없는 편지로서 무슨 소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편지인데 이 행운의 편지가 빙빙 자꾸 돌아갑니다. 왜 돌아가는지 압니까? 그 행운의 편지를 보면 이 편지 받는 당신은 큰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꼭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받느냐 하면, 이 편지를 이대로 다시 써서 당신이 잘 아는 친구 열 사람이나, 혹은 열 두 사람에게 꼭 보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이 있는지 압니까? 만일 그렇게 안 하면 당신은 큰 저주를 받습니다. 큰 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주받는다고 하는 말이 무서워서 아무 편지할 일도 없는데 공연히 그대로 베껴서 시간을 쓰고, 종이를 쓰고, 우표 값을 써가며 여러 친구에게 보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에게서도 이런 편지를 한 번 받은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편지를 받으면 그저 휴지통에 던지고 다시 돌지 않게 하세요. 쓸데없습니다. 순전히 사람의 공포심을 이용해서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긴 다니지마는, 아직도 날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결혼식(結婚式)할 때 날 받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공포심입니다.
무서워서 길한 날도 있고 불길한 날도 있다고 하는데 불길한 날 결혼식 했다가 다음에 잘못 될까봐 무서워합니다. 미국에 가면 여관 같은데 흔히 十三호실이 없습니다.
여기 어떤 여관에 四호실이 없습니다. 우리 서울에도 어떤 큰 병원에 가보니까 四층이 없습니다. 三층 다음에 五층입니다. 그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미국 사람들은 十三이라고 하는 수가 불길하다 하는 미신이 있어서, 한국 사람은 四자라고 하는 건 줄을 사(死)자로 통하는 것이라 해서 그걸 다 무서워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미신에 사로 잡혀서 공포심 가운데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우리 마음 가운데 공포심이 항상 있으니 행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공포심에 사로잡히면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고양이 앞에 쥐를 구경한 분 계십니까? 저는 정말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 쥐라고 하는 놈이 뒷다리가 길어서 발리 걸어서 빨리 달음질합니다. 뒤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쥐가 고양이를 한 번 본 다음엔 빨리 달아납니까?
빨리 달아나면 살겠는데 못 달아나요. 부들부들 떨면서 그저 천천히 기어갑니다. 그러니까 잡혀 죽지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고양이에게 잡히기 전에 공포심에 휩쓸려서 신경이 마비되었고, 근육이 제대로 놀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공연히 밤에 길 가다가 바윗돌을 보고도『아이고 저게 호랑이가 아닌가?』나무 한 그루를 보고도『아이고 저기 도깨비가 나왔다』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볼 것을 바로 못 보고, 생각을 바로 못하고,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마비되어서 활동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기에 서커스단에서 줄 타는 사람들이 한창 줄을 잘 타다가도 어떻게 아래를 잠깐 내려다보고 무서운 마음이 생기게 되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강에 나가서 헤엄을 잘 치자가도 무서운 마음이 생기게 되면 그만 빠지고 맙니다.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서 전쟁을 잘하다가도 무서운 마음이 나게 되면 패전을 하고 맙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주는 영향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애굽에서 나와 여러 해 수고를 하면서 광야를 다 지나, 마지막에 가데스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거기서 진격만 하면 가나안 땅입니다.
모세는 본래 그렇게 할 작정으로 거기서 진격할 태세를 갖추면서 그 준비로 열 구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서 가나안 복지를 정탐하려 보냈습니다. 열 두 사람이 몇 달 동안 가서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가 보니까 참 토지가 좋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 포도를 보세요. 포도 한 송이를 둘이 메고 왔습니다. 참 좋습니다. 어서 진격합시다.』 이 말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입니다. 그런데 열 지파 대표들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가 보니까 땅은 좋긴 좋습니다. 한데 거기 사는 아낙 자손들은 키가 구 척이요, 모두 건장한 장사들인데 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해 보니까 우리는 메뚜기만도 못합니다. 그러니 땅은 암만 좋지마는 메뚜기만도 못한 우리 같은 것들이 어떻게 그 곳에 가서 점령한단 말입니까?』이렇게 겁부터 먹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부 공포심에 사여서 통곡을 하면서 이젠 돌아가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광야에서 三十八년 동안을 방황하다가 그 겁쟁이들이 다 죽고 새 세대가 일어나서야 겁 없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해 이기게 된 것입니다. 공포심이 三十八년 동안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공포심이 이렇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욥기 三장 二十五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면 그대로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항상 실패할까봐 무서운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그 사람은 흔히 실패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생각도 바로 못하고 일도 잘못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간호원들이 같은 병원에서 같은 전염병 환자를 대하지마는 어떤 사람이 전염이 잘되는지 압니까? 병 옮을까봐 무서워하는 간호원이 영락없이 전염됩니다. 왜냐하면 무서워하면 몸의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저도 이태 동안을 폐병으로 입원해 보았지마는 같은 폐병환자 중에서도 특별히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무서워하니까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드 五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왕께서는 마드리갈 이라고 하는 곳에 아예 가지 마세요. 그 마드리갈 에서 왕이 장차 죽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무서워서 자기의 좋은 궁전을 지어놓고도 二十一년 동안 거기를 못 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만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 옆에 있던 사람이『이 곳은 마드갈레 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드리갈 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아이고 나는 죽겠구나!』하더니 며칠 안 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죽였다는 말입니다.
공포심이 사람의 마음을 엄습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혈압은 높아지고, 위액 분비가 잘 안 되어서 소화도 안 되고, 심장이 뛰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실상은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이 공포심이 원인이 되어서 병 나는 이가 더 많고, 죽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우리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러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들여다보면 공포심을 안 가진 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 공포심을 어떻게 해야 극복합니까? 미국의 카네기라는 사람의 저서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공포심이나, 근심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는 무서워하는 것, 또는 근심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나씩 하나씩 책에 기록을 해 보라. 그러면 실상 그 가운데 대부분은 근거가 없는 공포라고 하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둘째로 나머지 공포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해 보라.
셋째로 그 중에 무엇을 먼저 하는 것을 작정하라. 넷째로는 그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서 작정한 대로 행하라. 그러면 그 어떤 공포심이든지 대체로 이길 수 있다.』이런 말을 했어요. 물론 이런 것도 다소 도움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비결은 우리의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하나님을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十二장 六절 이하에서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 뜻은 하나님은 참새 하나 떨어지는 것도 다 보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 신데 이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있으니 이 하나님을 믿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은 제자들과 같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예수님은 배 한쪽에서 주무십니다. 마침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배에 들어옵니다. 제자들은 큰 공포에 싸여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주님은 모르시냐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너희가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인간의 생사가 하나님께 있으므로 아무리 풍파가 높을 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을 때에 공포심은 자연히 없어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모세가 애굽 왕 바로의 위협 아래서 무서워 도망을 쳐서 미디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 곳에 오래 있는 동안에 한 번은 시내산 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전에 도망을 쳐 나왔던 그 애굽으로 담대히 돌아가서 자기를 죽이려고 위협하던 애굽 왕 바로 앞에 용감히 서서 민족을 구원한 여사를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공포심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에 한 번은 밤에 아름군대가 와서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광경을 본 엘리사의 종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 때에 엘리사의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그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종의 눈이 밝아져서 보니까 불 말과 불 병거(兵車)가 도단성을 둘렀더라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 위험한 곳이 섰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대에는 천군 천사가 다 우리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충만하면 공포심은 자연히 쫓겨 나갑니다. 시편 二十七편을 들어보세요.『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또 四十六편에는『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을 가지세요.
기독청년 면려회 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롤링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아침에 깨면 제일 먼저『나는 믿습니다.』하는 말을 세 번 외운다고 합니다.『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그 뜻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자기 마음속에 잠재의식에까지 믿음이 충만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좀 해 보세요. 성경 말씀을 먼저 외워 보세요. 시편 二十三편을 외워 보세요. 二十七편을 외워 보세요. 모든 공포심이 자연히 없어집니다.
우리가 사 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 복음에 나타나는 생활에 확실히 다른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 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생활을 보면,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면서 여러 가지 진리를 배우기는 배우지마는 공포심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무서워했고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뿔뿔이 다 헤어졌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같은 사람까지 그 대제사장 집 문에까지 따라간 것은 좋지마는, 그 곳이 가서『너도 갈릴리 사람이지?』하고 어떤 계집종이 물을 때,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남은 제자들이 어떤 방에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무서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즉 공포심이 없어졌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었지만 이제는 몇 천명이 모인 가운데서 예수는 과연 메시야라고 담대히 증거 했습니다.
공포심이 없어졌습니다. 대제사장과 그 일당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위협 공갈을 했지마는 그들은『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이냐? 사람의 말을 순종할 것이냐?
너희 스스로가 판단해 보라』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매맞고 나오면서도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또 다시 그 자리에 가서 복음을 여전히 전파했습니다. 공포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된 셈입니까?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시대의 사도와 사도행전 시대의 사도, 그 중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열흘 동안의 기도가 있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 마음가운데 강림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가운데는 공포심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에게 아직까지도 왜 전도를 못하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무서워서 전도를 못합니다. 사람을 만나서 말하기가 무섭단 말입니다. 입이 안 열려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오순절 후의 제자들의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어떤 말씀보다도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야곱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윗, 다니엘,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시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야고보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바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권면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공포심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一․七)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 인간생활의 행복을 빼앗고 우리 인간생활에 큰 방해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죄, 하나는 공포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실 뿐 아니라 공포심 가운데서 해방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의지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에는 공포심까지 없어집니다.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그가 젊었을 때, 큰 은혜를 받기 전에 미국에 전도하려 갔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고 돌아가는 뱃길에 대서양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아주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큰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가운데 모라비아 교회에서 이 곳에 전도하려 왔다가 돌아가는 선교사가 몇 사람 있는데 이 사람들만은 아주 태연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당신 네 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무섭지 않습니까』그 때에 그 중 하나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그러면서 그 청년이 웨슬레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영접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계셔서 성령과 힘과 능력을 주십니까? 그리스도에게는 공포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二十세기에 사는 현대인의 양상을 보면 과학문명이 발전되었고, 예술이 발전되었고, 모든 방면에 큰 진보와 발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처럼 불안과 공포에 쌓인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간의 四대 자유를 주정할 때에, 한가지는 공포에서의 자유를 부르짖었습니다. 몰론 공포 없는 세계를 만들면 그것은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대, 어떤 환경에 살든지 공포심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분명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해서 내 마음속에 어떠한 공포심이 있든지, 이 시간 온전히 주님 앞에 내 놓으세요.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충만히 채우세요. 성령을 충만히 받으세요. 기도를 힘쓰세요. 새벽 기도를 힘쓰세요. 가정에서 기도를 힘쓰세요. 구역에서도 기도를 힘쓰세요. 이 가을부터 기도를 힘쓰세요. 그리해서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할 때에 공포심은 스스로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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