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0:9-15/ 전도자의 축복 / 한경직 목사 2014-08-26 14:52:17 read : 14184
어제는 우리 온 국민이 ‘어버이날’로 지켰습니다. 오늘은 세계 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성일입니다. 또 5월은 특별히 우리 교회에서 ‘전도의 달’로 정해서 전도를 힘쓰는 달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버이들을 기억하면서 또 전도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자리에 앉은 여러 청년들은 전도까지 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를 잘하면 여러 부모님들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옛날부터 효도는 양지(養志)로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뜻을 치는 것으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입니다. 여러분께서 전도를 잘하는 그러한 경건한 자녀들이 다 되면 어버이들은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부모님들이 교회에 나오시지 못하는 부모님을 모시는 분들이 혹 계시면, 무엇보다도 이달에 그런 부모님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꼭 힘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이상의 큰 효도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전도할 수 있는 자녀들이 실상 효남 효녀입니다.
또 어버이되시는 여러분들도 다 전도하시는 어버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아직까지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자녀를 둔 분이 계시면, 이 달에 어떻든지 힘을 써서 자녀들을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유산보다 더 귀한 유산을 자녀에게 남길 수 없습니다. 신앙의 유산만 잘 남겨지면 그 밖의 유산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입으로 예수를 내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과연 그러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처럼 아름다운 발걸음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녀들의 발걸음처럼 아름다운 발걸음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어버이들의 발걸음처럼 아름다운 발걸음이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온 세계 인류에게 미치는 모든 축복, 영적인 축복, 정신적인, 문화적인 모든 축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게 되면 복음 전하는 그들 자신이 먼저 큰 축복을 받습니다. 이 시간 특별히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축복, 그 자신들의 축복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은 우선 그 자신들의 구원이 확실하여집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한번은 70문도를 택해서 여러 동네에 전도하도록 내어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기쁨으로 보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을 하더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대답하신 말씀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은 그 이름이 분명히 하늘에 기록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 우리의 신앙이 더욱 튼튼하여져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더욱 확실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일찍이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운 것을 스스로 느끼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지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선한 싸움을 의미하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격은 최선의 수비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내 신앙은 자연히 지켜집니다.
인도에서 성자라는 말을 듣는 선다 싱이라고 하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이 한번은 히말라야 산맥의 한 고개를 넘어가다 보니 어떤 사람이 너무 추워서 더 걷지를 못하고 길가에 쓰러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업고 고개를 넘어가노라니 넘어지고 자빠지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말하자면, 두 사람이 씨름하는 것처럼 수고를 하면서 그 고개를 거의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고개를 거의 넘어와서 보니 길가에 어떤 다른 사람이 하나 쓰러져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자기보다 조금 앞서서 그 고개를 홀로 빨리 넘어가던 분이었습니다.
자세히 들으세요. 둘이 같이 피차에 도우며 넘어가던 이들은 둘 다 살았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홀로 가던 이는 그만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의 도상에도 이렇게 쓰러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우며 같이 노력할 때에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낼 뿐더러, 우리 자신의 영혼도 확실히 구원을 얻습니다. 다른 이들을 영적으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유혹이나 시험에 빠지지 아니합니다. 구원이 확실하여집니다.
둘째로 전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그 믿음이 더욱 튼튼하여지고 또한 장성합니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뛰어 놀면서 운동을 합니다. 이렇게 놀며 운동하는 동안에 아이들의 몸이 튼튼해지고 또한 그 몸들이 장성합니다. 운동은 건강과 장성의 필수 조건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나 홀로 믿지 아니하고 복음을 다른 이에게 전파하면서 봉사하면서 믿는 이들은 그 자신의 믿음이 더욱 튼튼하여지고 또한 계속하여 자라납니다.
이러한 이들은 자연히 기도도 더 힘쓰게 되고, 성경도 더 공부하게 되고, 교회 출석도 더욱 힘쓰게 되고, 일반 생활에 있어서도 더 조심해서 모범이 되길 힘씁니다. 그러는 중에 자연히 그 자신의 심령이 점점 장성해서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전도를 힘쓰지 않고 믿는 이들은 말하자면, 영적 소화불량에 걸리기 쉽습니다. 생명의 양식도 먹기만 하고 운동을 하지 아니하면 소화불량이 되어서 그 자신이 점점 약하여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나라에는 작은 바다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요, 또 하나는 사해, 죽은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고 언제나 물고기가 많아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해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어부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간단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멀리 헐몬산에서 눈이 녹아 내려오는 맑은 물을 북편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남편으로는 그 물을 요단강으로 흘러내려 보냅니다. 그러나 사해라고 하는 이 바다는 요단강에서 내려오는 물을 흡수만 하고 내어보내는 데가 도무지 없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증발되어 그 물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사해의 물은 너무 짜서 그 속에는 물고기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죽은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두 바다는 우리에게 큰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은혜도 받기만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남에게 줄 줄을 모르는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결국은 그 은혜가 그만 점점 스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을 뿐더러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그는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곧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더 튼튼하여지고 더욱 장성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셋째로는 전도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참된 기쁨이 따릅니다.
먼저 농부의 기쁨이 있습니다. 도시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농부의 수고만 보고 그 기쁨을 흔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농촌에서 자라면서 농부의 수고를 알 뿐더러 그 기쁨도 다소 압니다. 이른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뜨거운 여름날 김을 매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고 하는 성경의 구절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고 가운데 또한 큰 기쁨이 따르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린 후 며칠만 되면 땅을 헤치고 곡식들이 나옵니다. 새싹이 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씨 뿌린 이에게는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루 이틀 지나면 점점 자라납니다.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익은 곡식이 황금의 물결을 이루는 것을 보는 그 기쁨은 무엇이라고 다 형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가 되어서 단으로 묶어서 집으로 그 곡식을 가지고 오게 될 때에는 우리가 찬송가에 부르는 찬송과 같이 “기쁨으로 단을 가져 오리로다” 기쁨으로 우리가 추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잘 압니다. 우리는 다 진리의 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어떤 씨는 물론 돌짝밭에 혹은 가시덤불에 혹은 길가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또한 옥토에도 많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추수를 거두는 때가 있습니다. 전도하는 이들만 이 영적 추수의 기쁨을 맛봅니다.
여러분, 혹 해방 후 아마 둘째 해인가 셋째 해인가, 남산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여러 교우들과 또 그때 미군들과 다 합해서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아마 한 3만~ 4만 명 모이지 않았는가, 그렇게 추측이 됩니다. 그때에 한 선교사가 자기 옆에 선 원일한 박사, 지금 연세대학에 계시지요. 또 그분은 한국에 제일 먼저 나온 선교사 원두우 박사의 손자입니다. 그분에게 돌이켜 하는 말이, “만일 당신의 할아버지가 60년 전에 이 한국에 오지 않았던들 오늘의 이 광경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전도한 이들만 추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이들은 어부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지요? 한국에도 가만 신문을 보니까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얼른 보면 낚시질처럼 갑갑한 건 없는 것 같습디다. 매일 그렇게 앉아서 그것이 갑갑해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낚시질에 미친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유난히 낚시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좀 갑갑하긴 하지만, 큰 고기가 하나 물려 나오게 되면 종일 갑갑하던 생각이 일시에 다 사라지고 기쁨이 아마 충만하여지는 모양입니다. 전도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 어떤 한 무명 전도사가 전도를 하러 안주에 갔는데, 거기의 유력한 한 실업가가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분을 전도한 다음에 자기 친구에게 하는 말이, 이번에 아주 큰 고기를 하나 잡았다며 아주 기뻐하더라.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큰 고기를 잡았다고 하는 말을 들은 분은 아마 여러분 가운데서 아시는 분 상당히 계실 거예요. 그가 누군가 하니 고한규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분이 안주에서 유명한 실업가인데 그분이 예수를 처음으로 이 전도자에게 듣고, 믿고 자기 고향 이쪽에다 큰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전 총회를 위해서 총회 회계를 아마 몇십 년 늘 담당해서 맡아 왔고, 숭실대학 이사라 각 방면으로 크게 해방 전에 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에는 이곳에 내려와서 말년에 우리 영락교회에서 장로로 수고하시다가 몇해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참 큰 고기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어요.
지난 19세기에, 미국에 오늘날 빌리 그래함처럼 유명한 전도사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디 엘 무디(D. L Moody)라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원래 어떤 양화점에서 구두를 파는 한 점원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어떤 무명 평신도 청년이 가서, 그 사람 이름은 에드워드 킴벌(Edward Kimball)이라고 하는 분인데, 이분이 가서 “우리 같이 교회 나가자.”고 그렇게 전도를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무명 청년이 무명 청년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그 후에 유명한 디 엘 무디가 되어서 수십 만, 수백 만 생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전도를 해서 믿는 그들이 이 앞에 어떠한 무슨 큰일을 할는지 모릅니다. 전도를 하는 이들만 이 영적 어부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읽어 보면 거기에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은 돈을 찾는 비유, 잃은 아들을 다시 만나는 비유 등 세 개의 유명한 비유가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기쁨, 잃었던 돈을 찾는 여자의 기쁨, 잃었던 아들을 다시 만나는 아버지의 기쁨은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편지할 때에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에 “너희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 기쁨, 이 면류관, 복음을 전파하는 이 외에는 찾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실 전도자의 가장 큰 기쁨은 하늘나라에 가서 맛볼 수 있는 줄 압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가니까 그런 줄 모르지만, 하늘나라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우선 평소에 그리워하던 우리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될 것이고, 그 감격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바울과 여러 사도들을 만나게 되고, 그 기쁨은 무한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먼저 간 여러 친척들,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고, 그 큰 기쁨을 또 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이 땅에 있을 때에 눈물로 기도하고 애쓰고 인도하던 이가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되면 그 얼마나 더 기쁠까요? 가령 베드로가 오순절에 자기의 설교를 통하여 새로 믿고 구원을 받은 3,000명을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에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 겁니까? 하늘나라에서 이런 기쁨까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다 믿고 구원을 얻는데, 그건 다 같아요. 우리가 다 생명의 면류관을 각기 다 받아요. 그러나 생명의 면류관에 달리는 그 별의 수는 같지 않을 것이라.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 하나하나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뿐더러 그 면류관 위에 달릴 별들이 많은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어떻게 생각하면 전쟁과 비슷합니다.
사실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악마의 나라 사이의 큰 싸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 있어서 제일 먼저 공군이 출동하지요. 적국에 들어가서 군사시설을 폭격해 버립니다. 그다음엔 해군이 동원됩니다. 가까이 배를 타고 가서 그 포대의 요새를 집중 사격을 해서 함포 사격을 통해서 파괴해 버립니다. 그러나 공군과 해군만 동원되어서 완전히 전쟁을 이깁니까? 그것이 있은 다음에 육군이 들어가서 한 치 두 치 적의 나라를 온전히 점령해 버려야 온전한 승리가 오는 것입니다.
전도에도 공군 기수단 역할을 하는 전도 방법이 있어요. 라디오방송, TV방송, 문서전도, 많은 문서를 인쇄해서 뿌려요. 말하자면 복음의 폭탄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또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같은 큰 대중집회는, 말하자면 함포사격과 비슷한 전도 방법이에요.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고 됩니까? 전도에도 육군이 있어야 합니다. 보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을 마음이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씩 붙잡고 교회로 인도하고, 그분을 하나하나씩 인도하고 도와 주어야 온전히 그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공군의 역할을 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다 방송전도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다 글을 잘 써서 문서 전도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다 빌리 그래함 같은 대설교자가 되기는 힘들어요.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육군이 될 수 있어요. 보병이 될 수 있어요.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에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나라의 보병, 육군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췬다”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칠 수 있는 빛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을 불러서 구원하였사온즉 저희들 하나하나에게 믿음을 주시어,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어, 내 스스로 구원을 얻을 뿐더러 다른 사람까지 구원으로 인도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십자군의 정병이 다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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