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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4:16-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조용기 목사 2014-09-10 20:58:55 read : 9496
이제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셔서 위대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읽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운행하시자마자 흑암을 없애고 광명을 채워놓고, 무질서를 없애고 질서를 채워놓고, 사망을 생명으로, 무에서 풍요로운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냥 임재하시는 영이 아닙니다. 그는 창조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전에는 아무런 일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30세에 요단강에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들어가서 40주40야를 금식하시고 마귀와 싸워 이기시고 나오시고 난 다음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기에 창조하신 그 역사를 다시 재현했습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마다 죄는 용서와 의로, 더러움은 깨끗함으로, 병은 치료로, 혼돈은 질서로, 배고픔은 풍요로, 죽음은 삶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는 교회 위에 강림하시고 오늘날에는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운행하실 때는 반드시 새로운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몸 된 교회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지체인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지금도 창조적인 역사와 활동은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가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을 집행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이 계신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시는 곳에는 창세기적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와 창조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변화와 창조와 풍요한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형식과 의식과 제도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무질서에서 질서를, 사망에서 생명을, 가난에서 부요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역사를 베푸는 영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임하여 계신 성령께서 어떠한 역사를 우리 가운데 베푸시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고 성령과 협조해야 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성령이 오시면 가난 대신에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은 타락이 가져온 공허와 혼돈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독립해서 살자고 나오자마자 그들의 영적인 공허와 혼돈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이 죽었고 그 다음 영속에 있던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떠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도 사라져버리고 말았었습니다. 영적으로 황폐하게 되고 황막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심적인 공허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참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의가 사라졌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신념이 사라지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혼돈과 공허가 꽉 들어차고 미움과 슬픔이 꽉 들어찼습니다. 시기와 분노와 질투의 황막한 혼돈이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환경적인 공허와 혼돈도 다가왔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있어야 될 것이 없고 가난과 실패가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모든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나 국가는 혼돈과 공허와 황폐함이 있고 그 속에 가난이 꽉 들어찬 것입니다.
저는 70년 동안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반역한 소련의 현실적인 생활을 저의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그 곳에서는 국가적인 사회적인 공허와 혼돈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혼돈하고 경제적으로 무질서하고 사회적으로 혼돈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할지 모릅니다. 오직 절망만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상황을 누가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성령의 운행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보혈로 씻음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영적인 공허와 혼돈을 질서와 영광으로 채워놓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영적인 공허와 혼돈 속에 영생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셔서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영적인 부요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심적으로도 믿음, 소망, 사랑이 꽉 들어차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예수로 말미암아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물댄 동산 같고, 마음에 부요가 꽉 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생활적인 환경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제하여 버리고 저주를 없애고 성령께서는 가난에서 부요를 창조하시고 공허에 알찬 축복으로 채우는 여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면 가난 대신에 복된 소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 충만히 채우시는 역사를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이상입니다. 의식 이상입니다. 제도 이상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창조적인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 믿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면 성령께서 우리 개인, 가정, 생활, 환경에 이와 같은 창조적인 역사를 베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자유를 주시는 영이신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포로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이 계신 곳에는 어디를 가나 모든 묶여진 밧줄이 풀어지고 자유함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버리고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그 후손들은 자동적으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귀신들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더러운 귀신에게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더럽고, 말이 더럽고, 행동이 더럽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잡혀있으나 그곳에서 해방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 사지가 더러운 귀신의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악한 귀신이 있습니다. 악한 귀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악하게 만들어서 서로 물고 찢고 싸우게 만듭니다. 분열을 가져옵니다.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악한 귀신이 들어오면 가정이 파괴되고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사회가 혼돈하게 되고 국가와 국가 간에 대결하여 싸웁니다. 이 악한 귀신이 우리를 묶어서 오늘날 우리에게 평안이 없게 만듭니다. 누가 이 악한 귀신에서 놓여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거짓말하는 귀신에게 수많은 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생각이 거짓말로 꽉 들어차고 입술만 열면 거짓말을 합니다. 서로 속이고 속임을 받습니다.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국가 간에 약속도 거짓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하는 귀신에게 묶여있는 이 밧줄에서 해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점치는 귀신이 있어서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한계점에 도달해서 미래를 알고 환경을 알고 싶어서 점치는 귀신의 포로가 됩니다. 수많은 인텔리들이 몰래 점치는 귀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문이나 잡지에는 매일 그 일수 점을 치는 것을 게재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점치는 귀신이 오늘날 온 세계와 사회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약한 귀신들이 와서 사람들에게 허약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허약해져서 불안하고 공포에 처하게 합니다. 육체를 허약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질병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의 노예가 되게 하는 원수 마귀는 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을 따라가게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가게 하고 안목의 정욕을 따라가게 하고 세상 자랑을 따라가게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어난 일들의 관심을 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풍속을 쫓아 따라가다가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절망에 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이 귀신의 포로된 자에서 자유케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오시면 포로된 자에게서 자유를 얻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불은 이 모든 마귀의 밧줄을 그대로 태워버리고 마귀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신 곳에는 더러운 귀신의 밧줄도 끊어지고 악한 귀신의 밧줄, 점치는 귀신, 허약을 가져오는 귀신, 세상의 노예가 되게 하는 귀신의 밧줄들은 끊어지고 귀신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도 도망치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우는 자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의 임재함을 아니고는 우리가 마귀에게서 해방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귀신의 모든 억압에서 자유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의 삶 속에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며 항상 말씀 읽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자유를 얻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시면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은 영안이 있었고, 육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바라보았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과 함께 에덴에서 거닐면서 대화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만물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반역하자마자 그는 영안이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아담, 하와의 자손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영이 죽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안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의 눈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영적으로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을 보지 못함으로 인본주의적인 무신론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는 사람밖에 없고 사람이 중심이고 신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영적인 존재임을 보지 못함으로 유물론자가 됩니다. 내가 영혼인 것을 알지 못하고 육체로써 살다가 육체로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직 물질만이 있고 물질만이 만능임으로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야 된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다가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면 그 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고 삽니다. 무엇이 참으로 사는 의미가 있고, 무엇이 참으로 사는 가치가 있는지 이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영안이 닫혔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70-80년 진흙창 가운데서 먼지와 티끌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삶의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방향감각을 잃고 삽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 지를 모릅니다. 그저 태어났다고 먹고 입고 살다가 죽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 죽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려 놓고 영안을 열게 해 주셔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에서 가르쳐도 아무리 연구를 해도 육의 공부는 육이지 영이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을 육이요, 성령으로 난 자여야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영안을 열게 해 주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의 구주인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적 무신론자가 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 살아 계신 신본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영적 존재임을 못 보았으나 성령이 오시면 깨닫게 됩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자로써 영원히 사는 존재요 육신을 옷 입고 있다가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으로 가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됨으로 이제는 육신 위주로 살지 아니하고 영혼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로써 성령이 와서 영안을 열어주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됩니다. 우
리가 사는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영원한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나 죽는 것이 없는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그 의미가 우리 생활 속에 있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란 그러므로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어떤 사업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처했던지 그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 삶의 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길 잃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는 길을 찾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죄인으로 태어났지만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서 이제 천국을 가게 됨으로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 지 방향감각이 뚜렷합니다.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부는 바람에 따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분명히 바라보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우리의 삶 속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가르쳐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영안이 열려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들의 마음의 영안을 뜨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넷째로 성령이 오시면 성령께서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도 사람은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 자유롭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그 때로부터 죄악과 마귀와 절망에 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자유롭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다 죄악에 눌리고 낙심과 좌절과 절망에 눌리고 마귀에게 눌려서 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육체가 병들고 사회악에 눌려서 부정과 부패 속에 곤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 없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한 것이요, 미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죄악의 눌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를 청산하시고 죄를 씻으시고 죄의 묶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마음속의 모든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다 주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평화로써 채우시고 믿음으로 채우는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눌린 것은 다 옮기고 치료하여 줍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성령과 권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쳤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가 눌러서 영혼이 병들고 마귀에 눌림을 받으면 마음에 시험이 들고 마귀가 누르면 육체가 병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이 누름 다 제껴 버리고 우리에게 치료를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사회의 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회를 새롭게 하려고 해도 성령의 역사 없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악을 행합니다. 우리가 새 한국 창조로써 새 사회건설을 아무리 도모하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또 악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속에 있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악의 누름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은 성령의 운동력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참으로 눌린 데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성령께 의지해서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과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은혜의 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지는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50년 만에 자기들의 모든 빼앗긴 것들을 찾습니다.
혹은 생활 속에 가난해서 집을 팔아먹거나 땅을 팔거나 몸을 종으로 팔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희년인 50년이 다가오면 49년째에 속죄제사를 드리고 50년째 나팔을 불면 모든 옛날 것이 복구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팔아먹은 집도 도로 찾고 땅도 도로 주인에게 돌아오며 종으로 팔렸으면 해방되어서 다시 처자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유대인의 사회 속에서는 집과 땅이나 종을 사도 50년밖에 소유하지 못합니다. 희년이 다가오면 다 내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이 오시면 이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우리는 팔렸습니다. 마음이 팔리고, 영혼이 팔리고, 육체가 팔리고, 생활이 팔리고, 세계가 팔렸습니다. 마귀의 종살이하며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며 눈물과 슬픔으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대 속죄제사를 지냈습니다.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지은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서 모두 청산하시고 난 다음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셔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팔을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증거는 바로 희년의 나팔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와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죄에 묶인 자는 돌아서라. 마귀에 묶인 자도 나오라. 병에 묶인 자도 해방을 얻으라. 저주에 묶인 자도 자유를 얻으라. 사망에 묶인 자도 해방을 얻으라. 이제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빼앗긴 땅으로 돌아오라. 빼앗긴 삶을 다시 회복하라.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게 되라. 희망과 영광을 가지고 살라." 우리는 참으로 이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때 빼앗긴 땅에서 다시 자유를 얻고 잃어버린 삶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원리대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지고 살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어떤 종교적인 제도나 조직이나 의식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일하는 영이신 것입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혼돈은 질서가, 공허는 충만한 축복과 삶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망은 생명으로 가득 차고, 가난은 부요로 가득 차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명을 주되 넘치게 주는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창세기 때 수면에 운행하던 그 신은 예수님 오셨을 때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역사하셔서 흑암 대신에 광명을, 무질서 대신에 질서를, 죽음 대신에 생명을, 병 대신에 건강을, 그리고 가난 대신에 부요를 베푼 성령께서는 오늘날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면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 운행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놓고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적인 역사를 성령께서 반드시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이 있는 신앙을 해야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지식이 신앙이 아닙니다. 의식이 신앙이 아닙니다. 성령이 계셔야 참된 신앙인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 밑에 나가서 매일같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 우리 마음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성령을 충만히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하지 않고는 주지 않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말씀을 읽고 하루에 1시간 이상씩만 기도한다면 매일매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요. 성령이 여러분 생활 속에 운행하기 시작하면 성령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삶 속에 모든 흑암을 불살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무질서를 불살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 저주를 불살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망을 세력을 불살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영이 되십니다. 부요의 영이 되십니다. 치료의 영이 되십니다. 승리의 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창조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에게 참된 구원과 변화를 체험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왔다갔다만 하고 내가 지식만 많으면 된다고 머리 속에 지식만 가득히 넣어 놓는다고 해서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와서 모든 형식과 의식을 다 집행하고 의식을 다 행한다고 해서 내가 신앙에 온전히 선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다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루 충만했다고 해서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매일매일 충만해야 됩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1시간이상 기도해야 됩니다. 매일 예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다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어야만 됩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성령을 충만히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우리의 삶 속에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성령의 바람을 따라 살게 되면 여러분의 삶은 참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붙잡혀서 눈부신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않으나 하나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잡히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풍부에서 풍부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에서 승리로 진전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더 큰 생명으로 진행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더 큰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도록 하나님께 성령충만을 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죄악의 포로가 되어 썩어져 가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 계신 성령이여 오늘 성령께서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우리 가운데 운행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공허하고 혼돈한 우리 마음 위에 운행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질서를 만들어 내어 주시옵소서. 생명과 영광과 축복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이여 성령님을 오늘 의지합니다.
지혜의 영, 총명의 영, 모략의 영, 재능의 영이시여,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의 영이시여, 경외케 하는 영이시여 오늘 우리 가운데 크게 운행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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