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 2001-12-13 15:31:51 read : 14765
눅 18:1~8 설교자 : 임 영 수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그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에게 익숙한 내용들을 가지고 비유로 사용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환경에서 늘 보고, 경험하는 것들을 선택해서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의 비유도 역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부정적인 사회 관습을 이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 사회에서 보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 관련된 일을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재판관이 법정을 개설해서 재판을 하는 제도는 없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은 로마 사람입니다. 그 당시 로마 재판관은 뇌물에 깊이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롭고 공평한 재판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돈없고, 힘없는 가난한 미망인들의 경우 뇌물없이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재판관에게 가지고 가서 해결 받는 일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 시대 남편을 잃고 자식을 양육하며 어렵게 사는 미망인들에게는 억울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 시대 그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가능한 일을 한 가지 예로 들면, 어떤 미망인이 아들을 나라에 빼앗기고, 불의한 세리들에 의해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불공평한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그러한 경우 미망인은 그 억울한 사정을 뇌물없이 재판관에게 가지고 가서 해결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미망인은 바로 그와 같은 억울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은 그 시대 뇌물에 중독되어 있는 로마 재판관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군중들은 바로 그러한 일들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비유의 남편을 잃은 여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지고 가서 그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여인의 억울한 사연에 대해 재판관은 매우 냉담합니다.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가서 간청을 해서 드디어 불의한 재판관의 동의를 얻어 냈습니다.
예수께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생각이 있었던 사람은, 예수께서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왜 하필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어 말씀하실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분으로 비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분으로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깊은 의도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의 인격에서 비춰지는 무감각, 안하무인은 기도에는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요청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그렇게 지리할 정도로 인내와 끈기가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관심, 그의 불의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자비, 사랑, 공의 때문입니다. 이러한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야만 인내와 끈기를 갖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에 비유의 여인과 같은 인내와 끈질김이 요구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바를 오랜 기간동안 구하지만 그것에 대한 응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기도 가운데서 발견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성냥을 달라고 조릅니다.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거듭거듭 조르지만 부모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퍽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그 아이는 그것이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바로 그러한 관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생 전체를 다 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의 한 순간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의 한 순간 가운데서 어떤 일을 보고 결정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 전체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 전체 가운데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해 가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준비해 가신 것은 그의 생 한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 전체를 생각해 가시면서 그를 인도해 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시23:6)
셋째, 그러므로 기도는 항상 진지해야 합니다. 건성으로 하는 기도에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이 응답인데 건성으로 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진지함 가운데 응답이 있습니다.
야곱의 성품은 집요함 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올 정도로 집요했습니다. 그는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도 중간에서 가로 챘습니다. 그후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피하여 외삼촌의 두 딸을 아내로 맞아드리고, 많은 재물도 얻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그는 모든 가족들과 재산을 모아가지고 외삼촌의 집을 몰래 빠져 나왔습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귀향하는 도중 얍복 나룻터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그 씨름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진정 기도가 응답된 순간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도의 모범은 진지함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주 진지하게 기도하셨습니다.
"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이렇게 같은 말씀으로 세 번씩 기도하셨습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그 때의 예수님의진지성을 이렇게 묘사 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가도하시니,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넷째, 효과적인 기도는 매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기도는 모호하거나 추상적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매우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의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시편 51:1∼2)
유다 왕 히스기야가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그의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왕하 20:2∼3)
이렇게 기도하고 히스기야는 한참동안 흐느껴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그의 생명을 열 다섯 해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다섯째 기도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협력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 최봉석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별명은 최권능입니다. 그가 평양 신학교 시절 어느 기말 시험 때에 다른 학생들은 다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는데 최 학생만은 시험 공부를 하지 않고 아주 태연히 있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 수재형도 아닌 최 학생이 시험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최 학생은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만 하면 다 된다."고 답변했습니다. 그 날 밤 최 학생은 열심히 기도하고 다음 날 시험 첫 시간을 맞았습니다. 최 학생은 시험지를 엎어놓고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한 후 시험지를 제쳤습니다. 시험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한 문제도 아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최 학생은 "하나님도 시험에는 속수무책이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학생이 시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력없이, 공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섯째(마지막)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의, 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할수록 기도는 진지해지면서, "우리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어떤 결과가오더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뜻대로 무엇이나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서 그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얻은 기도의 응답은,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6 )였습니다.
하박국은 의인의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무성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아야 된다는 생각으로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의 기도는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길은 기도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대화 가운데서 우리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진지하게 배워가면 기도생활의 유익이 어떤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기도가 없으면 죽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가 많은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열거하면 정신적인 불안,영적고갈, 양심의 가책,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 죄의 유혹, 관계성의 삶에서 오는 갈등, 자기 자신과 소외 현상 등입니다. 이러한 생의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는 많은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 도날드 블뢰쉬는 기도의 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의 과정,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단순히 돈이나 종교의식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
황홀한 체험 가운데 안주하려는 것, 이것은 현실도피적인 태도입니다.
기도를 심리 치료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 스트레스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것.
기도를 자아 정체성이나, 자아 성취로 이해하는 것.
기도를 더 나은 삶, 건강증진을 위한 자기 치유나 선한 행위로 이해하는 것.
물론 기도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도 있고, 신비스러운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상한 마음의 치유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도들은 기도의 응답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일시적인 진통제 효과는 될 수 있지만 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도날드 블뢰쉬는 "참된 기도는 인간이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그들 자신을 구원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 가운데서 빈손 들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의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뇌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하나님 보좌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지한 간구입니다. 그에게는 용서, 치유, 위로, 능력이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구하는모든 것에 대한 해답입니다. 신학자 칼 발트는 "기도는 믿음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승리의 삶, 자유하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열쇠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그 효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그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그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 존재의 변화도 이루어집니다. 기도를 통한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참된 생의 목적으로 나아가는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 우리의 가정, 우리 국가 공동체, 좀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포기하시지 않고 역사해 가시고 계신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포기하시고 이 세상을 버리신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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