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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회상하자 2001-12-13 20:02:54 read : 17199
2001년 2월 25일
시 136:1-14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때 두려워하라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 가운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추구하며 살아갈 때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떤 목적을 성취했거나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그 자리와 그 상태를 잃을까봐 생겨나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두려움을 느껴보셨습니까?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두운 길을 갈 때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홀로 있을 때를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가산이 기울어질 때를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나빠질 때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큽니다. 재산을 잃을 때보다 명예를 잃을 때. 명예보다는 사람을 잃을 때,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을 잃을 때 상실감이 큽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을 때 인간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때 두려워하라"고.
히 12:15에 말씀합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아무리 잘 살아도 은혜생활을 못하면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히13:9에 말씀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은혜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은 커갈수록 더욱 가지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도리어 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조그만 개천들이 모여서 큰 강물이 되고 마지막에는 한 줄기의 강물이 되어 넓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하나의 강물을 이루듯이, 은혜생활도 오직 온유와 겸손으로 내려가야 바른 은혜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는 겸손한 덕이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긍과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주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로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철이 바뀌면서 옷을 갈아입고 보니까 구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옷 색깔과 구두색이 맞지를 않아 기분이 나빠서 구두가 그렇게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두를 사러 나갔습니다. 나가서 이 가게 저 가게 가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구두가 없어서 불평을 했습니다.“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구두가 없을까?”
투덜투덜 또 다른 가게로 옮겨가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어디선가 아주 명랑하게 귓가에 들려오는 찬송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찬송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아서 돌아보았더니 휠체어를 타고 있는 어떤 청년이 마이크로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보았더니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두 다리가 없어서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는 저 사람은 찬송을 부르는데 나는 그래 구두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많은 구두를 두고 이렇게 불평을 해야하나?’ 해서 이 자매는 구두 사러 나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란 소유에서가 아니라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하나님의 인자(사랑)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깨달음으로 세상과 자신의 생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집니다.
새로 태어남은 모든 세상사를 새롭게 보게 한다
어떤 형제분이 뇌일혈로 쓰러졌는데 다행히도 며칠만에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뜨면서 감격스런 가슴을 안고 , "이제 천국에 왔으니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순간 그는 밀려드는 ‘경이’와 ‘감탄’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모든 것이 기적이구나, 만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 죽음에서 깨어난 그분은 이제 <지금-여기>가 천국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시일이 지나 퇴원하는 길에 거리의 사람들을 보자, 사람마다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아, 안녕하십니까?”“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반갑습니다.”"반갑습니다.”
그에게 살아 있음만으로 감격에 넘쳤고 삼라만상이 지어져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쁨이었고, 놀라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엔 사랑이 물결쳤습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감격은 새로 태어난 이의 감격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모든 우주 삼라만상, 세상사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
오늘의 시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서 새로 태어난 시인이 세상과 자기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보고 이해하는 가운데서 지은 시(詩)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깊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을 보았을 때 세상 전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편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공통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리고 그의 수난의 민족사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을 때 세상만사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악하고, 포학해서 그렇게도 세상을 망쳐놓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그 엄청난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했습니다.
민족의 수난사를 보지말고 민족의 구원사를 보자
자기 민족이 그렇게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자체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역 생활, 광야에서 격은 고난, 가나안 땅의 정착 등 그의 민족사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게 찍혀있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수난사를 보지 않고 민족의 구원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가 깨달은 사실을 글로 남겨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깨달은 바를 시(詩)로 남겼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들의 오늘의 삶 속에 재현시키기 위해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예배할 때 이 시편을 제사장과 함께 교창한 찬양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처음 서두 1-3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4-9)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의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되었던 기념할 만한 사실들을 찬양합니다. (10-24) 마지막으로 오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 시는 끝을 맺습니다.(25-2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 공동체 역시 그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역사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질병, 실패, 사고와 같은 것들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사람에 따라서 지나온 자신의 역사에 있었던 질병이나 사고나 성공이나 깜짝 놀랄 일 등에 대해서 각자 다르게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에는 후회가 있고, 죄책감이 있고, 즐거운 기억도 있는데 여기서 “후회란 쓰라린 기억이고, 죄책감은 자신을 고소하는 기억이며, 감사는 즐거운 기억이라 했고, 이 모든 감정들은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 양식에 어떻게 통합하느냐는 방법에 따라 깊이 영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시편 본문에서 시인은 시인 자신과 그의 민족의 지난날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서 긍정적인 통합점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역사는 비애와 수난의 역사였지만 미래의 희망을 위한 긍정의 역사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구구절절 마다 “감사하라”는 찬양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문제로 제기 되는 것은 먹고, 입고, 거하는 것 외에, 수치, 분노, 억울함, 후회 없는 오늘을 살 수 있는가 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원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의 그러한 경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또는 국가적 고통이든지 잊어버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그 잊혀진 기억들이 독자적인 힘을 갖고서 우리가 인간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일을 가로막게끔 자신을 허용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역사를 우리가 꿈꾸는 환상에 맞추려고 유쾌하고 편안한 크기로 잘라내고 있습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일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선생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들과 직면하려 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는 가운데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계절이 되면 우리에게는 부담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날들에는 즐거운 기억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리고 감사한다고 해도 그것이 형식적인 것이 되곤 하기 때문에 내면과 일치되지 않는데서 오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감사하는 계절이 되면 다른 사람과 비교 가운데서 무엇인가 조금 나은 것을 찾아 감사하곤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거의 비교 가운데서 찾아낸 궁색한 감사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감사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감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가운데서 지나온 생의 역사에 있었던 일들을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가치로 보면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 더 낫고, 뛰어나서, 모면해서, 더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수치와 비애, 상실, 고통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경험한 가운데서의 감사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온 모든 날들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오늘 현재‘내’가 있을 수 없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드리는 감사 찬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은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세상 복을 많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가 아닙니다. "질병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실직 가운데서 지금까지 사랑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죄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거짓과 불의의 삶 가운데 있었는데도 나를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화해와 용서 없이 살아온 나인데도 나를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못나고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건강, 재능, 재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이러한 감사에서만 미래를 위한 새로운 다짐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감사에 새로운 삶에로 결단이 있게 됩니다. 새로운 삶에로 결단이 없는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할 때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서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새롭게 통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나온 생을 돌이켜보며 감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관점으로 바꾸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그의 십자가 부활은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감사로 받아드리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새로운 희망 가운데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비밀, 숨기고 있는 것들이 많은 우리들의 지나온 날들의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진열장에 다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담대하게 드러내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미련함, 나약함, 어리석음, 부족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한 감사입니다. 그러한 감사에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한 감사에 하나님 나라가 열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해 보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있었던 실패, 슬픔, 고통, 질병, 성공 등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후회, 분노, 부끄러움, 억울함, 고통스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손길이 수없이 개입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자하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우리는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지난날의 우리의 과거를 받아드리게 하고 오늘이라는 이 시간에 감사할 수 있게 하고 우리의 미래를 새로운 각오로 맞이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보는 것은 은혜입니다
보지 못한 경험이 있는 자들은 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압니다. 보지 못한 경험을 해야 보지 못하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기도문에서 "하나님이여,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시각장애인들로 3일만 눈뜨게 하시고, 전 세계 모든 눈 뜬 사람들로 3일만 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이는 보면서도 보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육의 눈을 뜨고 영의 눈을 감고 사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투시할 수 있는 영적 눈이 있다면 무엇을 보기를 원합니까?
보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게 하려고 만드신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습니다. 욥은 고생 끝에 하나님을 보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도, 지식도, 물질도, 건강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주셔서 구원하신 것부터 무엇하나 감사가 아니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몇 가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1. 국방을 자랑합니다. 4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스라엘이 1억의 아랍을 이길 정도로 국방은 잘 되어 있습니다.
2. 교육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문맹자가 하나도 없습니다.13살이 되면 율법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3. 정신력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왔습니다. 유대인을 삼키려고 한 민족이 지금까지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어느 민족도 유대인을 소화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애굽이 삼켰었으나 토해놓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이 삼켰었으나 토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가 삼켰었으나 소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로마가 삼켰습니다. 그러나 뱉어 놓고야 말았습니다. 사라센 제국이 삼켰습니다. 그러나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독일도, 심지어 소련도 삼켰었으나 소화는 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요나 민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기에 우리도 그 무엇이 삼킨다 할지라도 소화되지 못하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36년 간의 모진 고통으로부터 견디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한 신앙의 기초 위에서 어떤 세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삼킬 수는 없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삼일운동이 있은 후 에 일본 식민 통치 총독부가 선교부 책임자를 불렀습니다. 왜 불렀느냐 하면 삼일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일본은 그동안 있었던 헌병 무력통치를 종식시키고 이름하여 문화통치를 시작합니다. 문화통치라는 이름 하에 훨씬 더 처절하고 깊고 험악한 식민지 통치가 시작됩니다. 창씨개명도 있었지요. 또 일본 황제를 향해서 절을 하고 예배하는 신사참배도 있었지요. 엄청난 문화통치라는 이름 하에 식민지화가 진행이 됩니다. 선교부 대표를 불러서 선교부 대표들과 합의를 했습니다. 그 합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일본의 총독부는 식민지 통치만 하겠습니다. 종교신앙은 삼일운동 만세를 불렀던 교회 사찰 등 종교와 조선인의 얼에 관해서는 조선인에게 맡깁니다. 그 일에 상당부분을 선교부 본부인 당신들이 맡아 주십시오. 가야바와 총독간에 맺었던 것과 비슷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사실 삼일절 기념 만세 삼창을 교회에서도 부르고 사찰에서도 부르고 유교의 향교에서도 부르고 온 민족이 나서서 만세를 부르면서 좌절된 사건, 그 사건이 지나고 나서 이제 우리는 엄청난 시련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일본 경시청에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종교신앙은 아무리 짓밟아도 도대체가 죽을 줄 모르니 무언가 묘안을 찾아내면 좋겠다. 그래서 경시청기록에 보면 새벽기도 나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조사해서 보고를 올리시오. 내용은 이렇습니다. 더 이상 식민지하에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지금처럼 데모할 수도 없고 나가서 외칠 수도 없고 그것은 유일한 방법은 새벽에 기도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가서 소리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만 오면 자유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일본 총독부가 자유의 공간이 아무데도 없는데 교회 새벽기도 시간에만 유일한 공간입니다. 새벽이 지나서 주일날이 되면 예배 때마다 찬송소리와 기도소리는 온통 독립 이야기뿐입니다. 그리고 구원 이야기뿐입니다. 자유 이야기뿐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 가는 사람을 감시할 것. 그래서 엄청난 감시가 있었습니다. 이런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를 위한 외침이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찬송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자유를 외칠 방법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에는 말씀하고 찬송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행동입니다. 찬송은 혁명입니다. 독립입니다. 자유입니다. 이런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이 울려 퍼질 때 아멘으로 화답하면 하나님은 그 아멘을 받으십니다. 이런 때를 우리도 36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의 빌라도 총독에게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때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넘긴 것은 법적으로 가야바 제사장입니다. 대 제사장이 예수를 고소합니다. 이분은 우리 종교를 훼방한 것이 아니라 당신네 로마통치에 반하여 이스라엘을 세우려고 하는 불법을 저질렀으므로 고소합니다. 그래서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십니다. 그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 "내가 진리이니라 " 나한테 오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를 받은 사람은 여러분 해방 받고 자유 하게 됩니다. 유대교 학자 중에 유명한 사람 중에 헤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을 보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말라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기록한 신앙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의 총 제목이 뭡니까? 구약의 총 제목은 자유라는 한마디 말입니다. 천지창조도 자유의 행위, 말라기에는 구원도 자유의 행위, 여호와 하나님은 자유라 이름한 그분입니다. 구약은 자유의 역사이고 이스라엘은 자유의 역사, 해방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구약입니다. 그 해방의 역사, 자유의 역사를 예수그리스도께서 받으셔서 그리스도 안에 오면 누구든지 그 진리를 받아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자유를 바랍니다. 식민지였을 때 삼일운동의 외치는 목소리는 자유의 함성이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속박에서 자유가 우리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헌신하는 자유
고린도후서 9장 19절에 보면 이렇게 사도바울이 썼습니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자유한 다음에는 모든 것의 종이 되십시오. 마틴 루터가 이 말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속박을 누르고 지배하는 주인입니다. 지배하는 자유로운 주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의 종입니다. 섬기십시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십자가에서 죄에 대항해 죽은 예수그리스도는 죄로부터 해방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인을 만들었습니다. 죄에서 해방입니다. 해방된 자유인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역사 때문에 사랑으로 다시 종노릇합니다. 일단 자유를 받으십시오.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으면 사랑으로 다시 섬기는 사람으로 되십시오. 이 진실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이외에는 누구도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자유하십시다. 어디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공중의 나는 새는 공중에 있을 때에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물 속에 들어오면 속박입니다. 물에서 사는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을 때만 자유합니다. 물을 벗어나서 공중으로 나오거나 물 밖으로 나오면 물고기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물고기와 새도 장소에 따라서 자유가 있고 속박이 있습니다. 어느 장소에 있어야 자유합니까? 어디가도 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자유함을 얻습니다.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자유하고 그 다음에 부활의 능력을 심어서 하늘나라를 향해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 잘 아는 자유를 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다 썼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빈곤으로부터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불신앙으로부터의 자유, 이게 우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유, 하늘나라를 향한 자유. 기쁨의 자유 이 자유가 오늘 여러분의 자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자유는 나 혼자만의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하는 자유가 중요한 자유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여러분 애굽 땅에서 해방된 자유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유함을 받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미신을 섬기겠습니까? 다른 신을 섬기겠습니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자유의 주인이신 그분만 모시고 살겠습니다. 가나안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죽은 사람입니다. 죄에서 해방 받으십시오. 하늘을 향하여 생명을 향해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죄에서 해방 받으면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유를 항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삼일절을 기념하면서 민족의 자유, 가정의 자유, 우리 각자의 자유를 다시 그리스도안에서 회복하십시다. 이래야 삼일절은 우리 오늘의 삼일절이 되고 82년 전의 역사유물로만 남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옛 선 조들이 이루었던 자유의 역사가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여러분께 간구 드립니다. 자유하신 예수께서 여러분들의 주인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회생해봅시다.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을 맞을 수 있도록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총궐기했던 그때, 은혜의 때를 회상해봅시다.
빈 부대 자루는 세울 수 없습니다. 무언가 담아져야 합니다. 건강한 물고기는 염도가 0.4% 짠 바닷물 속에서도 절여지지 않습니다. 단 생명을 잃고 죽은 고기만은 짠 고기가 됩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을 뿜어냅니다. 우리 모두가 새싹이 돋고 백목련이 피기 전 이 겨울을 벗으면서 죄성의 두터운 옷과 불평과 원망과 세속적 안일과 타락의 옷을 벗어버립시다. 은혜를 회상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새봄을 맞이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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