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분 2001-12-13 20:57:34 read : 18928
2001년 8월 26일
사 4:5-6
두려움은 만병의 원인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나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오랜 기간동안 더불어 살아왔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소외감을 서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수많은 교인들과 자기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보호와 동행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살아왔고 지금도 감사할 조건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계신다고 해도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어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소외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미국에 가장 유명한 신문 상담가 중 한 사람으로 앤 랜더스 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매월 약 1만여 통의 상담 편지를 받는데 그 편지들을 주제별로 분류를 해보았더니 두려움에 관한 편지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가장 많은 이유가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과 자기 숙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암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갑자기 죽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까봐, 직장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처한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무서운 것입니다. 실패를 했을 때 실패도 문제이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심리적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특별한 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갇히고 밀폐되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밀폐된 공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광장공포"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갇히면 편안한데 넓어지면 두려운 것입니다. 영화 같은데서 보면 옛날 서양의 왕들의 침실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그런데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씌워놓아서 잠을 자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심리입니까? 너무 넓으면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까 잠자는 곳은 좁게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광장 공포입니다. 고공공포도 있습니다. 높은 데만 올라가면 겁이 납니다. 이런 사람은 아파트 높은 층에 살지를 못합니다. 세균 공포도 있습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쌓이면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나중에는 건강마저 해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쥐 1백 마리를 철책 속에 가두어 놓은 후 그 주위에 무서운 고양이 한 마리를 묶어 놓고 쥐들을 위협하게 만들었습니다. 1백일 후에 쥐를 꺼내어 해부해 본 결과 대부분의 쥐가 심장병, 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쥐들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동양 우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전염병아, 너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 아라비아인이 물었습니다.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5000명을 죽일 것이오."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후 아라비아인은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항의를 했습니다. "너는 지난번에 오 천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합니다. "그렇지가 않소. 나는 5,000명만 죽였을 뿐이요. 나머지는 모두 공포로 죽어갔던 것이요." 두려움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지은 죄가 너무도 엄청납니다. 선지자들을 통한 끝없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멸망이 오고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은 크게 낙담하고 두려워합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저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입니다.
환경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패망의 역사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은 불타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두려워 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모든 환경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사야 4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내 것이라" 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이 있을까? 세상에 이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내게도 관심이 있을까? 목사님도 나를 잘 모르실 텐데, 이 한편 구석에 있는 나를 하나님 과연 아실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연히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수 십 억의 사람 가운데 나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정확하게 나를 지명하고 불렀습니다. 영원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지명해서 불러내시고 그리고는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 중에 "대책 없는 자"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하고, 도대체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사전에는 으악새라고 되어있지 않고 억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으악새는 방언입니다. 어쨌든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으악새를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 받고 살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 구제불능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칠 때에는 또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사랑이 있냐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대책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책 없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사랑 받을 자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4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며, 본문은 여호와께서 선민 공동체와 함께 하시어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고, 출애굽 당시 모든 날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연상케 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인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모든 일의 때를 자신들이 정해 놓고,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지 아니한다고 조급하게 안달을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 낙심,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은 적절한 보호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내 길이란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포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생각은 절망이라 하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삶의 자리는 부서지고 깨어지고 조각이 나서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상황은 끝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45:10-11절)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믿으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은혜의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다시 싸매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있다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있으므로 하나님께 돌아만 오면 소망이 있고 구원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으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인 우리 생각에는 이 때에 이렇게 되기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드시려고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인가가 부족하고 불만스러워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은 내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가정 적절한 은혜로 닿으십니다.
서두르면 이스마엘, 기다리면 이삭
아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지 못해 범죄한 결과 오늘날까지 중동에 눈물이 그치지 않음을... ‘서두르면 이스마엘, 기다리면 이삭’입니다. 하나님께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음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출13:21), 새벽에는 불 구름 기둥으로(출14:24) 인도하셨고, 행군 중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먹을 수 있게 하셨으며(출15:25),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먹여주셨고(출16:12), 먹을 물이 없을 때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고(출17:6),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케 하시어(출17:13)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아주 적절한 때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를 따라 때마다, 일마다 함께 하십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적절한 은혜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모두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적절하신 도움과 보호
스펄전(Spurgeon)목사님이 자기가 돌보는 고아원을 위하여 300 파운드의 모금을 했답니다. 헌데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조지 뮬러(Muller)에게 그 돈을 주어라.” “주님! 제 고아들에게도 이 돈이 필요해요.” 주님의 음성은 계속 들렸습니다. 해서 스펄전 목사님은 뮬러 목사님을 찾아가 300파운드를 전하고 자초지종을 간증했지요. 그러자 뮬러 목사님이 “나는 지금 하나님께 300파운드를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울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후 스펄전 목사님이 자신의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300파운드 보다 더 많은 300기니의 헌금이 놓여 있더랍니다. 하나님의 적절하신 도움과 보호는 전지전능의 보호입니다.
완전한 보호
출애굽 하여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 밤의 추위, 독충, 방향, 먹고 마실 음식과 물, 이방부족의 습격... 인간의 힘이나 생각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것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어떠한 것, 위험, 고난도 하나님의 보호 벽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천막", "그늘"은 택한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하는 상징어이며, "낮의 더위",‘풍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하려는 악한 세력을 뜻하는 상징어입니다(6절).
목회자에게는 성도들의 급작스런 교통사고, 각종 악성질병, 사업, 물질, 직장, 부부생활, 자녀의 문제가 언제 터질지 몰라 항상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밤늦은 시간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와 치료, 해결에 대한 확신의 믿음이 있기에 말씀 안에서 기도하며 담대히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에서의 생활이 아닙니다. 문제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문제의 완전 해결자로 함께 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아래 감추시며(시17:8), 영원한 팔로 받쳐 주시고(신33:27), 뒤에서 호위해 주시며(사52:12), 앞서 가시어 험한 길을 평탄케 하시고(사45:2), 우편에 계시어 요동치 않게 하시며(시16:8),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시어 지켜주시고(슥2:5), 마음과 뜻을 감찰(히4:12)하시는 완벽하고도 완전한 지키심입니다. 허나 완전한 보호에는‘믿음’이라는 하나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담이나 울타리를 치고 삽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뜯을 수도 있고 헐 수도 있으며, 넘어 갈 수도 있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나를 지킴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에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인생을 내 힘으로 준비하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보호는 삶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 보호이십니다.
영원한 보호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 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인간이 인간을 보호함은 일시적입니다. 보호하겠다고 하고도 불리하면 떠나고 배신하기 일수입니다. 왜일까요? 이기적이고 보호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우리를 위험하고 힘든 세상에 혼자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지난날도 그랬고,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영원히 붙드시고 건져 주시며, 치료하시고 고쳐주시며, 해결해주시고 도와주시며, 함께 해주십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치신 백성(계7:3)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어느 것에도 넘겨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영원히 보호의 은혜를 보장받은 백성들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사인(sign)된 자들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사43:1,2).”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것이기에 내가 너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여정을 걸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구속을 입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다"라는 철저한 확신과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습은 커다란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된 근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까? 이사야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창조(조성)와 구속 그리고 지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 "창조와 조성"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존재케 된 피조물과 관계된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나된 존재는 하나님 자신의 창조에 기인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구촌에 살면서 그리고 이 지구촌을 거쳐가는 사람들 중에 누가 감히 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 아니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구속"은 다른 사람을 대신 희생시키면서 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곧 죄 중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값을 지불하신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삶 속에서 절망과 낙심과 한숨과 고통 속에 잠겨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값을 지불하시면서도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구속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된 근거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부르셔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된 특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됨으로써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의 축복과 함께 보호와 존귀입니다. 이사야 43:2절에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2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물 속으로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강을 건널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불이 네 곁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 데도 불구하고 물을 지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강을 건너는 어려움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열심히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데도 불구하고 불 가운데로 지나는 고통의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까? 임마누엘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환난과 역경이 성도에게도 찾아오지만 주님은 그 곳에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 길에 풍랑이 일고, 불꽃이 나를 삼킬 것 같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을, 존재 세계를 있게 하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나의 연약함과 나의 형편을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나를 두려움에 빠뜨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당당히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호입니다. 2절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침몰치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확인이 되어졌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세 청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머리터럭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존귀입니다. 4절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된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느 백성보다도 성도를 더 사랑하시고 보배로운 존재로 삼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내가 처한 세상적인 환경이 초라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존재임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 손에 아무 것도 쥐고 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나를 존귀케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아시다시피 영국은 해적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세계 최초로 자기 나라말로 성경을 번역한 나라가 영국이며, 국기는 두 개의 십자가로 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복음가수 레나 마리아는 날 때부터 두 팔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장애자 딸을 주신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양육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1만 2천명의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혼을 매료시켰는데 “나는 꽃다발을 받을 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고 있기에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 찬양 후의 그녀의 간증입니다.
오늘날은 멀쩡한 장애자가 많은 시대입니다. 육체적 장애자가 불구자가 아닙니다. 정신적, 영적 장애자가 진정한 의미의 불구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인이 아니면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구자가 됩니다. 한계성이 있는 인간은 신뢰를 곧잘 깨뜨립니다. 허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떠한 경우, 어떠한 환경에서도 피난처이시오 보호자이시며 해결자이시며,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십니다(시121:8).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요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며 결코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어떠한 피조물의 힘이나 방법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보좌 앞에 있는 사람을 이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신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시야에서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내 삶을 파괴하려고 하는 사단의 시험에 농락 당해서는 아니 됩니다. 죄를 지었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고 회개하면 버림받지 않습니다. 회개만 하면 죄는 기억치 아니하시고 언약만 기억하시며 실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아픔에 동참하시고 연대화 하시는 아픔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은총이란 신과 인간의 인격적인 재결합이다.” 폴 틸리히(P. Tillich)의 말입니다. 인간의 굶주림이란 음식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필요(need)에의 부족이 주림이며, 이의 완전한 충족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꽃으로서 봉오리일 때는 행복이며 완전히 피면 천국이다.” 이는 허베이(E. L. Hervery) 말이며, “하나님은 모든 굶주린 입을 보살핀다.” 이는 브라우닝(R. Brownning)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보호는 계속적이요 끊임없는 보호이시며 이 세상 끝 날까지 유효합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는 대상의 생각과 생활에 따라 달라지며, 작고 큼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은 모든 일을 하는데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고 계속 성장시켜 나갑니다. 또한 힘이 있어야 다른 사람도 돕고 살 수 있으며 힘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므로 힘을 얻기도 합니다. 따라서 힘을 얻는 음식이나 방법이라면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의 힘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힘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이 우주를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힘을 각 사람에게 주십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 28:1)는 말씀대로 우리가 죄를 떠나 의롭게 살면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에게서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크리스찬들이 왜 힘이 없습니까? 그것은 여호와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요,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힘의 근원은 어디에 입니까? 여러분은 힘이 넘치는 크리스찬입니까? 아니면 힘이 없는 크리스찬입니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고 조용히 기다려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기다려라. 정신을 차리고 민감하게 깨어 기다려라." 믿음이란 자동차에 기어를 넣는 것과 흡사합니다. 믿음은 즉시 가동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즉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가동시킬 수 없을 때는 기어를 후진으로 하지말고 중립으로 해야 합니다.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족함이 없지만 여전히 희망이 있어서 기도할 기도 제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시 23편 외의 그 많은 시편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희망을 담은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간절한 희망을 담은 도고의 기도가 있습니다. 자기의 심령을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지켜달라는 애절한 간구의 기도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있어서 바라는 것마다 두드리면 다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도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고 소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부족함이 없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그 긴밀한 관계를 깨달은 후 그 안에서 참된 만족을 얻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참으로 위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할 깨달음입니다.
모든 날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분,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희망을 가지고 남아있는 모든 날들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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