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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깊은 밤에 얻은 복(추수감사예배 2002-01-06 21:59:05 read : 24115
대상 4:9-10
I. 복 받고 싶을 때
사람이 복을 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소원입니다. 특별히 어려움과 고난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복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느 마을에 말썽쟁이 아이가 크리스마스가 되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다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하도 말썽을 많이 피워서 싼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을 자신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엄마, 엄마 어떻게 하면 나도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요?”“착한 일 많이 하고 예수님께 편지를 한번 써 보려무나.” 예수님께 편지를 쓰려고 준비를 했는데 도무지 어떤 말로, 써야 할지, 자기가 했던 착한 일이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생각다 못해 이 아이는 밖으로 달려갔습니다. 성당으로 훌쩍 뛰어 들어가더니 마리아 상을 품에 안고 훔쳐서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예수님, 당신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아왔소. 좋은 말 할 때 선물을 보내시오.」
우리에겐 마리아상 인질이 아니라 약속의 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이루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기도했으며 어려운 시대를 달려갔던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복을 얻었는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요즘 기독교 서점가의 베스트 셀러 가운데 "야베스의 기도"라는 작은 책 한권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출간 12개월만에 500만부가 팔린 책이고, 우리나라에서 단 7개월만에 68판을 찍어낸 책입니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살펴보았더니 이 책의 부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 이 부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 같습니다.
나아가 본문의 주인공 야베스가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이 오늘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픔과 동질감과 느끼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꿈을 주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역사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구원족보로 이어지고 수천년을 지나 포로로부터 귀환되는 역사까지를 나열해 가고 있습니다. 무려 600여명에 달하는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이름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지고는 제대로 읽기조차 어려운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4장에서도 44명의 서투른 이름들이 열거되다가 갑자기 우리를 주목시키는 두 구절이 나타납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9-10)
이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II. 인생의 깊은 밤에
오늘 본문의 배경은 고통의 시대 즉, 깊은 밤중입니다. 고통의 밤을 어떻게 보내느냐? 여하에 따라 축복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고 저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겝니다.
어느 마을에 고약한 술 주정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술 주정꾼의 두 아들은 자라나서 하나는 아버지와 똑 같이 술 주정꾼이 되었고, 다른 아들은 신실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술 주정꾼이 된 아들에게 찾아가 물었지요. “어떻게 술 주정꾼이 되었습니까?” 술꾼이 된 아들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신실한 목사가 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술 주정꾼이었는데 어떻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까?” 목사가 된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위기(危機)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위태할 위(危)자와 기회 기(機)자로 이루어 졌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지요. 위험한 기회에 빠질 수도 있고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베스의 인생이 바로 위기의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름 그대로 고통이고 슬픔이었습니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 고난,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베스 그러면 김고통, 박아픔 그런 뜻입니다.
아마 야베스가 태어나는 과정이나 배경속에 남다른 아픔과 고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 주경가들은 몇 가지로 우리에게 설명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첫째, 태어날 때 어머니가 거의 죽을 뻔하며 태어난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자니 내가 죽게 생겼고, 내가 살자니 아이가 죽게 생겼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무릅쓴 고통 가운데 이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이 고통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어쩌면 원치 않는 아이였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시대로 보자면 서자였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김고통' 혹은 '김아픔' 이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로, 야베스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가 죽었거나 전쟁 등으로 집안에 커다란 고난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농사를 잘 지어놓으면 이방 족속들이 쳐들어와서 젊은이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농산물을 다 빼앗아 가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잡혀갔고 농산물은 다 빼앗겼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고 걱정하며 어머니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아예 고통이라고 지어버린 것이지요.
네 번째, 야베스가 태어나던 시대적 상황이 바로 고통의 시대였습니다.
야베스가 살던 그 시대를 그려주고 있는 사사기는 2장 10절에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영적인 열악한 환경,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했던 참으로 어려운 한 시대에 이 아이가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산물이 바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2:12) 그들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또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성전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속 들었습니다. 성전의 모든 종교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에게 도무지 관심이 없는 시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사기를 연구해 가다 보면 계속되는 사사기 2장 6절 - 10절에서는 그 시대의 비극을 몇 가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현실 안주 의식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더 이상의 모험과 더 이상의 희생을 감내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이만하면 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사사기 1장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베섹 땅을 정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 전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와서 이만큼 정복했으면 됐지, 더 이상 피 흘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즐기며 살자'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을 거부하는 시대, 더 이상의 노동을 거부하는 시대, 더 이상의 땀 흘림을 거부하는 시대, 더 이상의 모험을 거부하는 이런 현실 안주의식이 새로운 세대 사이에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병들어 가고 있었고 바로 야베스의 시대는 비극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자세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냄비에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아주 편안하게, 기분 좋게 죽어 갑니다. 현실에 만족하는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져서 자기가 죽어 가는 줄도 모릅니다. 밖으로 뛰쳐나와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편안한 환경은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킵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도전을 상실한 세대는 죽음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조지 바너의 주전자 속의 개구리)
둘째, 꿈꾸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을 상실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신앙은 더 이상 그들의 가치관이 되지 못했습니다. 신앙은 그들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체험의 상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타협과 불순종의 범죄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야베스 시대는 회개와 도전과 비젼. 그리고 그 비젼을 이루어 가기 위해 당당히 치러야 될 희생을 거부하는 시대였습니다.
불신앙의 문화였습니다. 그 속에 파묻혀 살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살고자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오면서도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비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높은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온 백성들이 세속에 빠져 거룩한 사역에 관심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에 한사람 야베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고난의 시대 가운데 내가 해야 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청사진이 있고 목적이 있다. 주여 내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이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시대를 구원하는 인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소금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 맛을 낼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이름으로 염화나트륨이라고 합니다. 염화나트륨이란 염소와 나트륨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염소와 나트륨이 각각 따로 있을 때에는 둘 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쳐서 소금을 만들어 우리 인생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살아가던 시대, 야베스가 처해진 삶의 환경은 독소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던 시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기도를 붙들었습니다. 믿음의 그릇을 키워가게 될 때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고난의 시대에 벌떡 일어나 기도했던 야베스가 어떤 맛을 내었습니까? 오늘 시작하는 본문의 말씀은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라" 그랬습니다. 공동번역에 "야베스는 일가 가운데서 가장 세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씨족 사회를 살려낸 인물,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한 부족을 벌떡 일으켜 세운 인물이 "야베스"였습니다. 나중에 기록된 성경에 보면 그 땅 이름을 "야베스"라 불렀고, 그 부족을 이름하여 "야베스"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종종 훌륭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도로나 마을 이름으로 쓰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충무로'‘세종로' ‘을지로'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가끔 공항도 보면 ‘드골 공항' ‘카네기 공항'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등 세계적인 공항에도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따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II. 깊은 밤에 빛나는 믿음
어떻게 고통과 슬픔의 인생인 야베스가 가장 존귀한 자가 되었을까요?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야베스의 변화의 비밀을 깨닫기 바랍니다.
첫째, 야베스는 인생의 깊은 밤에 빛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야베스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상실해 가고 있을 때에 위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세계를 보는 눈, 캄캄한 칠흙같은 어두운 땅을 걸어가면서 내일을 바라보는 신령한 눈,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을 이름하여 우리는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이 처한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자학하고 이웃을 향하여 불평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스럽고 슬픈 인생을 축복의 인생으로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거룩한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새로운 인생, 존귀한 삶, 축복 받는 미래는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야.' '하나님은 나를 위해 위대한 미래를 예비하고 계신다.' '고통의 시대를 걸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는 반드시 그 이유와 목적을 이루고야 말리라.'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묘사하는 구절 가운데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작품" - 원문에 보니까 포이에마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에서 poem - 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시(詩)와 같은 인생이다. 문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시(詩)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한 불만이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의도대로 시적인 삶,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는 보석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시와 같은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데, 더 이상 고통과 슬픔의 인생을 살 수 없다'라는 현실에 대한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야베스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버지의 작품입니다. 걸작품처럼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자랑스런 한편의 시가 되고 싶습니다. 시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 야베스의 기도 - 였습니다.
IV. 인생의 깊은 밤에 찬란한 비젼을
야베스는 위대한 비전의 사람입니다. 야베스는 그가 가진 거룩한 불만이 승화되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가진 약점을 뛰어 넘는 영향력 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내 힘을 뛰어 넘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비젼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헬렌 켈러여사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한다니 참 안되었구려.” 그러자 헬렌 켈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 보다 비전이 없는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 꿈이 없이, 목표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불행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10절을 다 함께 읽도록 합시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비젼이 무엇입니까?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그냥 축복을 많이 해 달라는 말 같습니다. 물질의 복, 사업의 복, 건강의 복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는 것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비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축복하고 그가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그에게 저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야베스가 달라고 하는 복은 바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말합니다. 복의 근원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는 복을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의 복을 얻었던 것처럼, 주여 저로 말미암아 주변의 모든 사람이 복 받는 역사가 있게 해 주소서"라는 비젼을 야베스는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야베스의 삶은 이름 그대로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야베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그대로 고통과 슬픔을 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그가 섬기는 보디발 장군의 집에 큰복이 임합니다. 감옥에 가면 전옥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끼칩니다. 그가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자 온 나라와 백성들에게 7년 간의 대 기근을 이기게 하는 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야베스의 기도는 아브라함과 요셉과 같이 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단지 복을 무진장으로 받는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꿈과 비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합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게 하는 능력입니다.
월트 디즈니 공원이 드디어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원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디즈니는 천국에 가고 없습니다. 사회를 맡은 분이 그 부인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월트 디즈니 씨가 살아 계셔서 이 공원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자 디즈니 부인이 강단에 등단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남편 디즈니는 이 공원을 보았습니다. 제 남편의 꿈과 비젼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공원이니까요.”
야베스는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위대한 비젼을 가졌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중에 약속을 붙잡고 떠났던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도저히 꿈 꿀 수 없고 볼 수 없는 세계를 야베스는 가슴에 품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비젼의 사람입니다.
좀 좋지 않은 얘기이지만 속알딱지가 벤댕이 콧구멍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 인생과 기도의 폭을 넓히십시요. 행복동산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구도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들이 모임에 오면서 먹을 것을 해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꽃바구니를 손수 만들어 오는 사람, 국화 꽃 화분을 들고 오는 사람. 도우미들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쫀쫀하게 살지마십시요. 커피는 만원짜리를 먹으면서 헌금은 몇 만원 가지고 바들바들 떨어서야 어찌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까?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김 집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역시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천국에서도 어깨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한테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 주는 거에요. 김 집사가 졸래졸래 쫓아다니면서 이거 뭐예요. 신기하네요. 저거 뭐에요. 신기하네요. 그러는데 어느 집이 으리으리한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저거 뭡니까? 물었더니 저거는 보면 실망스러워 보지마.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베드로 사도님 보여 주세요. 가서 문을 열어 주었어요. 문을 열었더니 선반이 좍 있고 아주 하얗게 된 상자에 빨강 리본으로 묶여 있어요. 거기에 좍 쌓여 있었어요. 뭐지요. 그 상자 밑에다 사람 이름을 죽 적어 두었어요. 이거 열어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런데 김 집사 보면 실망스러워. 보여 주세요. 보는데 보니까 김 집사??? 열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 집사가 열어봤더니 하나님께서 김 집사에게 내려 주시고자 했던 복들, 그런데 그것을 그가 간구하지 않아서 못받았던 복들이 그득히 써 있어요.
천국엔 멋있게 산 사람들을 위한 보물창고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풍성한 복이 있습니다. 차원 높은 기도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V. 밤이 깊을수록 큰 기도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젼을 이룰 수 있을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비젼을 이룹니다. 기도하는 자 만이 비젼을 성취합니다. 야베스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바로 기도의 위대함에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것이기에 위대하다고 하는 걸까요?
먼저 그는 기도 자체가 위대하기 때문에 그의 기도는 위대합니다. 엘리야가 위대했기에 그가 기도하니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엘리야가 위대해서 다시 기도하니 3년 반 동안이나 내리지 않던 비가 다시 내린 겁니까? 아닙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 그 자체는 우리와 똑 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엘리야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엘리야는 위대합니다.
엘리야와 우리의 차이는 기도의 차이였습니다. 야베스와 우리의 차이는 바로 기도의 차이였습니다. 야베스의 위대함은 바로 이것입니다. "불평거리를 기도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불평하기 보다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누구나 불평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우면 불만을 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나 기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베스는 고통과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기도로 승화시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오늘의 어려움과 고통을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기도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고통을 축복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이며, 자기 독백에 불과합니다. 어떤 점에서 정신병원에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정신병자와 무엇이 다를 바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은 바로 우리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베스와 가장 비슷한 삶을 산 분이 바로 야곱일 겁니다. 야곱 또한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성도 똑 같죠. 둘 다 "야"씨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창세기 28장 12-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이 어디를 가던지 그곳이 하나님께로 통하는 하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광대한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복 받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디를 가던지 지키시며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베스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이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너무 흡사합니다. 같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 같고,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은 야곱이 누운 땅을 주신 다는 것이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은 주님이 항상 지키시고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가는 자에게도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자신에게도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구하는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야베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야베스의 하나님이 바로 저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하심으로 축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운명의 뒤집는 기도였습니다. 저주를 뒤집어 복으로 바꾸는 기도였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경제, 부모로부터 전해진 가문의 취약점,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만한, 일본에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오토다케 히르타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TV에도 나왔습니다만, 이 사람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팔과 다리가 10cm에 불과한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도 없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러한 자신의 신체를 가르켜서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독특한 개성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개성 중에서도 ‘초 개성'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주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글씨를 쓰는가 하면, 뺨과 어깨 사이에 연필을 끼워 써내려 갑니다. 또 가위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다른 쪽을 어깨로 누른 채 얼굴을 돌려가며 종이를 자릅니다. 양쪽 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블하고, 겨드랑이로 철봉을 껴안고 턱걸이를 합니다. 그는 그것을 가르켜서 '자기 만의 장기'라고 자랑도 합니다.
그런 그가 쓴 자서전 ‘오체불만족(五體不滿足)'이 출판 후, 6개월 간 260여 만부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의 유년시절 별명은 ‘휠체어의 왕자'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주눅들기는 커녕 골목대장 노릇을 해서 붙여졌습니다. 오토다케는 ‘모두 부모님과 주위의 배려'라고 말했습니다. 사지가 없는 오토다케씨를 출산 후, 한달 만에 처음 본 어머니도 ‘아, 귀여워'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도 그의 존재를 알리려 일부러 산책에 데리고 나갔습니다. 초등학교 은사 다카기 선생은 자원해 4년 간 담임을 맡아주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절대 나를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하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었다'고 오토다케는 술회했습니다. 오오다케는 자신의 운명을 이겼습니다.
성도는 고난에 눌려서는 안 되고 세상 영화에 취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가 기도하는 것은 고난을 이기려는 믿음의 행위요, 세상 영화에 취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나 믿음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광풍을 고요케 하시고 물결도 잔잔케 하십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야베스처럼 하나님 앞에 복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은 우리 한국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 국가라는 점에서도 다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나라에서는 부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데,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국에서는 부자가 존경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과정이 투명합니다.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지 다 압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돈을 버는 과정만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과정도 존경스럽습니다. 재산을 모아서 사회를 위해 다시 기부합니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사회에 헌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부자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한국에서는 부자가 존경을 받지 못합니까? 한국 부자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정경 유착, 부정 부패, 뇌물, 탈법, 불법, 비리를 저질러서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자가 아닌 것처럼 행세하고 부자로서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앞으로 한국이 선진 국가가 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국에서도 부자가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실력을 쌓아서 미국의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오기 위해서도, 부자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어야 합니다.
VI. 야베스의 기도를 뛰어넘는 또 다른 기도를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야베스의 기도를 뛰어 넘는 더욱 위대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복을 구하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멋진 교회의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더 힘있게 지기 위하여, 복을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한국인 맹인으로서 최초의 유학생이 되어 공부를 했고 지금은 부시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영우 박사란 분이 계십니다. 그는 젊은나이에 내가 왜 맹인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 하다가 그는 자리 박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 차원 높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십시요.” 과연 고난을 헤쳐나가며 다른 사람을 오히려 섬기는 그의 모습을 과히 감동적이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강영우 박사의 얘기를 듣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인생 얘기를 듣고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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