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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선교 대안 입법 추진 /바르게 교훈/ 사랑의 의미(목회자 철학) 2002-03-27 18:30:11 read : 23070
농촌전담부서·선교사제도 등 요구키로
■ 농촌선교 대안모색을 위한 정책포럼
“농촌선교 활성화를 위해 시급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입법추진위원회를 꾸려야 한다.” “농촌과 도시교회가 실질적인 협력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상호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농도공동체 운동의 구체적 모델이 제시되어야 한다.” “농촌선교위원회를 연회와 지방 단위까지 설치해 모든 교회들이 농촌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14일 본부 선교국 사회선교부(부장 문재황목사) 주최로 열린 농촌선교 대안모색을 위한 정책포럼에서 최근 실시된 농어촌교회 실태조사에서 나타난 열악한 농촌선교 현실에 대한 진단과 대안모색이 활발히 이뤄졌다.
농(어, 광산)촌 선교협의회 소속 회원들과 각 연회 총무, 국내외 선교분과위원장 등 40여명이 참석한 이날 정책포럼에서는 지금껏 농촌선교에 대한 논의와 관심이 부족했던 탓인지 농촌선교에 대한 무관심·제도적 미비점들에 대한 질타와 이에 대한 대안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날 정책포럼에서 활발한 토의 끝에 결정한 사항은 크게 3가지.
△ 농촌전담부서 설치와 농촌선교사 제도 신설, 농촌목회자에 대한 최저생계비 보장과 인턴파송 등을 위한 입법추진위원회 구성
△연회와 지방 단위까지 농촌선교위원회 설치 추진
△농촌선교센터 건립과 농도공동체 운동 등 대안적 농촌선교 모델을 연구하기 위한 전문가 모임 결성 등이다.
또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되는 주5일 근무제를 농촌선교 활성화의 계기로 삼기 위한 적극적인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대두됐다.
조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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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교훈함과 책망함으로
광야에 외치는 진정한 소리여…
-잘못을 바로잡고 바른길 제시해야
-책망할 수 있는 것이 목회자 양심
현대사회를 스승이 없는 사회요 원로가 없는 사회라고 일컫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올바로 가르칠 수 없고 바른 말을 할 수가 없는 사회적 현실을 회자한 말이라 생각된다. 진정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권위가 존중되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만 것 같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회자의 권위도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목회자가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서 외치지만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회중인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말만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이 들리고 가슴을 치며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바른 교훈과 책망의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성직자의 소명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도록 그들을 온전케 하는(무장시키는) 것이다.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목회자의 기본적인 본분이라는 말이다. 목회자의 주된 임무가 양을 치는 것(행20:28)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가르치기를 잘해야하는 이유인 것이다(딤전3:2, 딤후2:24). 그렇기 때문에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1:9)”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책망하여야 될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위를 맞추려 하는 것 같은 말과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허전해 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목회자들은 우리 평신도(성도)들이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분별하도록 신앙적으로 잘 가르쳐 주고 잘못했을 때에는 엄중하게 책망해야 한다는 말이다.
입에 쓴 약은 몸에 이롭고, 단약은 몸에 해롭다는 말처럼 책망을 받을 때는 섭섭하게 받아들이더라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 앞에 선 목회자가 교인들의 잘못을 보고도 경계하고 책망치 않는다면 우리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큰 죄를 짓고 형무소에서 형을 살고 있는 죄수를 어떤 목사님이 찾아가 말씀도 전하고 기도도 해주며 회개하고 다시는 죄짓지 말도록 권면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제가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아무도 나에게 그런 짓이 죄가 된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더라는 예화가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10)”고 외치던 세례요한의 음성이 목회자의 입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널리 울려 퍼져야할 때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
목회자들이여! 여러분이 이렇게 외쳐야만 교인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교인이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설 때에만 이 나라에 소망이 있을 수 있다.
담대함을 갖길 바란다. 담대하여야만 바로 외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2∼9)”고 격려하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담대히 일어섰다.
이럴 때에 “우리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외치며 백성들이 충성을 다짐했던 것을 보게 된다.
평신도들은 무조건 책망 듣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판단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미쁜 말씀을 들고 서서 담대히 책망하는 목회자를 바라고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목회자들의 바른 교훈과 책망 없이는 결코 교회가 바로 설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면 매 한번 더 들고, 미우면 떡 한 개 더 주라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성경도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6)”고 말하고 있다.
미쁜 말씀으로 성도들을 바르게 교훈 하고 잘못에 대하여는 엄중히 책망하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사명 잘 감당함으로 우리 감리교회를 위대한 감리교회로 세워 나가는데 큰 몫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이 다 되길 간절히 바라며 네 차례에 걸친 부족한 글을 읽어 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상규 장로(사회평신도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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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존재론적 의미
목회자를위한철학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성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그의 근원적 존재성, 즉 영원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인간론적인 필연성을 가진다. 이 필연성을 밝혀보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성서의 모든 기록은 구원 즉,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구원이란 어떤 것을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래 있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구원이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영원한 생명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불트만은 사랑을 삶의 규정성, 즉 살아있음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했다 (Liebe ist die Bestimmtheit des Lebens).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로 제시하고 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하면 ‘나’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성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그의 근원적 존재성, 즉 영원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인간론적인 필연성을 가진다. 이 필연성을 밝혀보자.
사랑의 인간학적 필연성을 드러내기 위해 먼저 우리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혹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와 같은 어떤 도그마적인 인간학적 정의도 전제하지 않고, 인간의 일상적 모습을 그대로 기술하는 작업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물들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지, 사회적 동물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사람의 존재양상을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여기서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하는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물들에서 출발해 보자. 이 사물들은 단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루고 사용한다. 우리가 사물들과 관계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물들이 가지는 유용성이다. 우리는 이 사물들을 ‘도구’로서 만난다. 우리가 도구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그 도구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위해 사용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도구들은 고립된 개체들이 아니라, 서로 수단과 목적이라는 기능적 종합관계를 이루고 있다.
집을 짓기 위해 많은 도구들이 사용된다. 이때 목재, 망치, 기와, 시멘트 등은 집을 짓는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기능을 중심으로 서로 종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망치는 망치질을 하기 위해 있고, 망치질을 하는 것은 못을 박기 위함이고, 못을 박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정하기 위한 것이고 등등. 이러한 종합적인 관계는 다른 도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도구들은 결국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집은 추위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도구들이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기능적인 종합관계를 우리는 ‘세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적인 관계는 결국 인간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이 관계의 중심에 서있는 인간을 우리는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이렇게 도구적 관계 속에서 사물들을 만난다.
모든 도구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수단과 목적이라는 기능적인 종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도구적 관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 또는 존재가능성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는 존재자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존재가능성은 ‘죽음’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될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에 도달한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인간은 지금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의 궁극적 존재가능성으로써의 죽음에 미리 관심을 가지는 존재이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이 존재가능성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미 인간의 운명으로서 존재한다. 세계내존재로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인간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지금(현재), 미리(미래), 이미(과거)’ 라는 통일적인 작용에 기초한다. ‘지금’은 ‘미리’와 ‘이미’와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만 지금일 수 있으며, ‘미리’는 ‘지금’과 ‘이미’를 내포하며, ‘이미’는 ‘지금’과 ‘미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미’일 수 있다. 이들 세 요소들은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으로 하나의 인간의 존재양상을 나타낸다. 다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다른 인간존재의 이런 삼위일체적 특징을 우리는 ‘시간성’이라고 한다.
남궁연 - 혼돈
이 ‘시간성’에서 인간존재의 유한성이 드러난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자신 속에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는 넘어설 수 있는 한에서만 한계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존재가 ‘시간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즉 유한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초월하여)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존재성은 사물들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웃’인 것이다. ‘시간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타자와 관계를 맺는 사건이 바로 ‘사랑’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웃이며 사랑이다.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성이 ‘사랑’이다. 그런데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들은 그 관계가 어떤 가치기준을 가지고 형성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M. 쉘러에 의하면 인간은 4 종류의 가치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첫째 유형은 ‘유용성’을 가치기준으로 하여 형성되는 관계이다. 도구적 관계가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유형의 관계에서는 ‘고상함’이나 ‘천박함’이 그 기준으로 작용한다. 세 번째는 ‘아름다움’이나 ‘추함’, ‘정의’나 ‘불의’, ‘진리’나 ‘거짓’ 이라는 가치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예술, 법, 그리고 학문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여기에 해당된다. 네 번째이자 가장 고유한 의미에서의 관계는 ‘거룩성’을 기준으로 하여 형성된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관계(사랑)가 여기에 해당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타자의 존재 그 자체를 가치기준으로 하여 형성된다.
인간의 존재성을 회복시키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사랑은 타자가 유용성이 있거나 고상하거나 정의롭거나 진실하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의 존재는 단순히 나의 존재를 완전하게 해주는 하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의 존재는 이미 나의 존재와 함께 총체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는 이미 나의 존재의 전체이며, 나는 이미 타자의 존재의 전체이다. 따라서 나의 존재는 타자의 존재에 ‘빚지고’ 있으며,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빚지고’ 있다. 빚지고 있기 때문에 타자와 관계할 때 나는 감사함을 갖는다. 이러한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성(사랑)은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는다.
오 희 천 목사
·서울신학대학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수료
(철학과)
·쾰른대학교 철학석사(M.A)
·쾰른대학교 철학박사(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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