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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고상한 행동이 나타날 때까지 2002-03-28 23:10:48 read : 26011
설교 본문 : 요한복음 12:1-8 방송 듣기
오늘 본문은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깊습니다. 마리아는 일시적인 흥분이나 우발적인 몸짓으로 옥합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행위는 한마디로 믿음의 고상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 마리아의 믿음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행동의 조화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첫째, 충동입니다. 믿음은 어떤 충동에서 시작됩니다. 무언가 더 있다, 무언가를 내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은 믿음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합니다. 여리고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영원한 무엇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신적인 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예수님을 갈망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키가 작은 그는 예수가 어떤 분인가 보기 위하여 길가에 있던 뽕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나무아래 머무시고는 그를 올려보며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거하여야 하겠다"(눅 19:5). 이 말씀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삭개오는 종교적 현실의 가능성에 대하여 마음 문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먼저 어떤 예비적인 충동을 일으키시고 그 다음에 곧 주님이 말씀으로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충동입니다. 여기에 모든 선교의 원초적인 가능성이 있습니다(행 8:14). 삭개오는 바로 그 날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늘 그의 집을 방문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말씀듣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좋았습니다. 그녀는 진리를 기뻐했고, 그녀의 영혼은 늘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녀의 태도를 예수님이 칭찬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이것이 말씀의 충동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내적소명이 택하심을 확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충동으로 거듭났고 말씀 충동의 은혜속에서 살아갑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제일 귀한 것으로 사모했고 예수님은 그녀의 가치판단을 긍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내부의 충동은, 어떤 성공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를 참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은 외부로부터, 하늘로부터, 어떤 것이 와야 한다는 뼈저린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은 격동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한 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그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열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원합니다. 믿음은 격정을 동반합니다. 격정의 결과들을 보십시오. 릴케가 말한 연애의 격정, 키엘케갈이 말한 결혼의 격정, 바울이 말한 선교의 격정 그것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온은 일찌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열정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믿음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믿는 이에 대한 사무친 열정으로 가득해집니다.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세요. 그들은 한사코 부르짖습니다. 매달립니다. 한 번만 구하고 만다면 그것은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구하되 날마다 구합니다. 부르짖어 구하고 계속 구합니다. 하나님은 그 밤낮 부르짖는 바를 반드시 응답하시고 속히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기도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루 몇 번씩 기도합니까? 몇 날이나 계속해서 기도합니까? 사도 요한이 말씀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그가 들으시는 줄을 믿는다면 그가 주실 줄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반드시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다 반드시 받고 발견하고 열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주의깊게 여러차례 들었습니다. 얼마후면 인자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오순절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마음 속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시몬의 집에 앉아 주님을 주목하면서 주님의 영혼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눈가에 나타나는 임박한 고난과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마리아의 가슴속에 일어났던 믿음의 충동은 이윽고 해일같은 격정으로 뛰놀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그녀가 표시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나의 소유가운데 수천만 원짜리 나도 한 근을 그분께 드리자. 나의 몸으로는 여자의 영광인 내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씻어드리자."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전체로 주님께 내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이 귀중하지만 주님께는 나도 한 근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행 20:14). 속절없이 늙고 사라지고 말 나의 일생을 주님께 드리는 격정의 기쁨속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세 번째 과정은 추방입니다. 믿음의 과정에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고들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힘들이 사랑의 꿈을 파괴합니다. 모든 희망들을 없애버립니다. 추방의 과정은 불협화음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속는 것은 아닌가? 내가 잘못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렇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마리아는 자기 행동이 몰고 올 폭풍을 생각해 봅니다. 어디를 보아도 성난 눈초리입니다. 쇼크를 받은 비난과 불만의 모습입니다. "웬 낭비냐? 너 미쳤니? 너 그렇게 부자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큰 교회는 있어도 부자 교회는 없습니다. 작은 교회는 있어도 가난한 교회는 없습니다. 모자람도 부족함도 없이 예수님이 쓰실만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파괴적 생각을 추방했습니다. 그녀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과정에서 뒤를 돌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역자는 목회의 현장에서 자꾸만 선교를 생각합니다. 선교도 귀하지만 이곳의 영혼구원은 더 귀합니다. 유학을 생각합니다. 유학도 귀하지만 이곳의 영혼양육은 더 귀합니다. 유학도, 선교도, 목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목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목회와 교회가 수단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도 선교도 똑같이 귀합니다. 안 죽고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위해서는 거절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거부하는 일 없이 주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추방하는 일 없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을 가장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영혼속에 비친 빛이 너무나 찬란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 믿음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파괴적 사고들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이해, 사람들과의 대화, 사람들의 믿음, 그런 것들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녀의 가슴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영원한 왕으로서 실제적인 왕이시었습니다. 그녀는 그 왕에게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넷째, 마지막 과정은 과시입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믿음의 고상한 행위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의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이제 그녀를 억제하고 주저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꿈꾸던 아름다운 꿈이 실현됩니다. 마리아는 병머리를 깨고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습니다. 마음껏 사치를 과시합니다. 전력을 기우려 그녀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예배도, 교회도, 선교도, 희생도, 헌신도 하나님을 위한 과시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과시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일으키신 파문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말씀의 충동에 모든 것을 거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한번 주신 은혜의 줄기를 붙들고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 충동은 모든 것을 삼키는 열정으로 바꾸어집니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감정을 함양하십시오. 세상에 열정없는 사랑을 보았습니까? 사랑은 자기를 잊게 만듭니다. 사랑은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행위가 나타날려면 부정적인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반대하는 상황을 넘어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부정을 제어해야 하고, 주위의 반대를 용감하게 뛰어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도약했다면 이제 마음껏 자신을 과시하십시오. "내 영혼아 너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리로다"(시 27:8). 온 몸과 맘을 드려 찬양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영의 귀를 기울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가까이에 당신의 기쁨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의 믿음의 고상한 행위는 바로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예배였습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아름답고 신령한 예배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거침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녀가 드린 예배는 눈물과 감사, 찬양과 희생이 조화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마음, 깊은 마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시는가를 성찰했습니다. 예배는 복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녀의 예배는 또한 얼마나 적시에 드려진 것입니까? 주님은 죽으시기까지 그 같은 예배를 다시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예배는 지상에서 주님께 드려진 가장 적절한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종말론적인 예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그렇게 받아주십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선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종말론적인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계선교의 추수군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선교사의 가정들은 중국선교의 정탐군으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됩니다. 그녀의 예배를 흠향하신 주님은 그녀를 안아올려 주십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의 고상한 행위를 치켜들어 주십니다. 복음의 영광과 함께 복음의 혜택이 그녀에게 무한히 흘러 넘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녀는 적시에 주님을 예배하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에 겨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몽땅 받는 환희를 누립니다. 주님의 기념을 받는 고귀한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이 네 가지 행위의 조화로서 이루어집니다. 충동, 정열, 추방 그리고 과시, 그것은 또한 주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로 귀결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복음으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들의 믿음의 고상한 행위에 향기로운 기념비를 세우시고 우리들과 깊은 공감대를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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