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2002-04-29 12:57:09 read : 33191
갈 5:16-18 // 2002.4.28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주 온유하고 겸손하여서 이웃들과 한 번도 다툼이나 싸움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혹 있다 할지라도 자신과의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진실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 갈등과 싸움이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들이 내게 가지는 기대와 평가가 내가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과 너무 차이가 나고 머리가 멀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이 나를 평가하고 기대하는 것과 내 자신의 솔직한 모습이나 수준과 너무나 동떨어진 차이를 느낄 때, 아니 자신이 알고있는 그 모습이나 수준이 자신이 자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가 너무 차이가 많고 괴리감을 느낄 때 갈등하게 되고 자기와의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 된 신앙인 에게는 날마다 싸우고 있는 전쟁과 갈등이 있습니다. 내면적인 전쟁이고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한편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요, 또 다른 편에선 그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시지만, 우리의 심성이 당장에 천사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이 거룩한 마음을 방해하는 악한 심성의 방해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영성학자 안소니 멜론의 인생에 관한 우화를 소개해 드립니다.“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 버스에 탄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누가 버스 상석에 앉을 것인가? 누구에게 갈채를 보낼 것인가? 누구를 중요한 인물로 여길 것인가에 대해 말다툼하느라고 여행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입니다.“
이 우화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이 우화에 등장하는 관광객들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고, 아니 아예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갖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좀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누구를 우리 그룹의 중심 인물로 삼아서 그를 중심으로 삶의 기반을 다져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골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관광 열차가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을 지나가고 있지만 우리 마음의 창문이 다 가리워져 있어서 그러한 새로운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닫혀진 세계에서 만들어 내는 일들
닫혀진 세계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일들은 매우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언제나 아침 조간신문 저녁 TV 뉴스 시간에 큰 화제로 취급되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몸담고 살면서 무엇인가 우리의 노력으로 이 현실을 그렇지 않은 현실로 바꾸어 보려고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살아 보려고 노력도 하고, 그러한 것을 구호로 정해 다른 사람에게 선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지치면 스스로 좌절하기도 하고, 자포자기 가운데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경험해가고 있는 현실은 언제나 어둡고 문제가 많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감사한 것은 때때로 성령이 우리의 닫혀진 마음의 커튼을 젖히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을 보게 하고 경험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새로운 현실을 비행기를 타고 몇 만 마일을 날아 지구 저편 다른 곳으로 가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바로 성서 속에서 발견하고 경험해 갑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역시 우리는 그러한 새로운 현실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닫혀진 현실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일들이 음행, 더러운 방탕,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분파, 질투, 술 취함, 흥청거리는 연회,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현실주의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하고, 없는 것을 있다하고 병든 것을 건강하다하고, 새 것을 낡은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닫혀진 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그 부정적인 현실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새로운 사실은 그렇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가 우리의 방식대로 그러한 우리의 현실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거스르고'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고, `대적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거스른다', `대적한다'라는 말은 동일한 수준의 것이 있는 데서는 사용될 수 없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현재 있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에 반대되는 생각이나 의지적 결단을 할 때 사용되는 용어들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닫혀진 가운데서 만들어 가는 어두운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영이시며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인인데 이는 보통 모태에서 출생하여 본능과 지성과 경험에 따라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땅을 만들어져서 땅만 쳐다보며 땅을 연구하고 땅을 차지하다가 땅속으로 되돌아가는 단 한번의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처음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 같고 찾아보면 희망이 있을 것 같고 취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겼는데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허무함을 느낍니다. 인생이 아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또한 중생인이 있습니다. 중생이란 두 목숨이란 뜻입니다. 미쳐 이 육체가 땅속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늘을 쳐다보고 모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깝지 않은 삶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시대 최첨단 산업이 컴퓨터 산업입니다. 그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공장에서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하드웨어 만드는 공장에서 하드웨어를 생산한 다음 그것을 조립하는 공장에서 조립만 하면 아주 훌륭한 컴퓨터가 탄생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성능을 지닌 컴퓨터라 할지라도 그것을 돌리는 전력이 없으면 하나의 고철에 불가합니다. 그러면 그 컴퓨터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은 고객에게 팔려서 고객이 컴퓨터의 전기코드를 전선에 꼽는 순간일 것입니다.
사람은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인가에 의해 이끌려서 전력과 같은 생명의 기운을 공급받지 않으면 죽은 삶입니다. 아무리 그의 삶의 내용이 컴퓨터 내부처럼 이리저리 섬세하고 빈틈없이 계획되어져 있다 할지라도 소용없습니다.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점점 녹 쓸어 갑니다. 육으로 난 자는 육일 뿐입니다.
세 가지 종류의 싸움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연과의 싸움입니다. 많은 재난-홍수라든가, 혹은 지진이라든가, 또 춥고 더운 기후에서 오는 것이라든가-많은 질병, 이런 것들과 우리는 싸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이기면 건강하고, 이 싸움에 지면 죽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연과의 계속적인 싸움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입니다. 이웃을 협조자로, 반가운 사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못 하고, 이웃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긴장관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상점에 가서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우리는 신경을 씁니다. '어떻게 하면 속지 않고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을까!' 또, 파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팽팽하게 긴장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왜 이러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먹느냐, 먹히느냐,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 하며 팽팽하게 싸워 한 평생 싸우며 살아가는 이 비참한 모습. 왜 이러해야 되는 것입니까? 다른 해결은 없을까요?
또한 우리는 부득불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웁니다. 그러면서 자기 진실을 지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느냐?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 혹은 경제문제에 대하여, 정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 또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많이 생각하고 고민도 합니다. '왜 저 사람이 내게 이렇게 대할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많은 고민이 있지만,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민해 보셨습니까?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말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해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한 번 나를 돌이켜 보셨습니까? '나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많은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나?' 그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해 보았습니까? 자기 진실, 자기 존재를 찾으려고 얼마나 몸부림 쳐봤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찾기 위하여 고민해 보셨습니까?
파리와 좀나비의 우화
이솝우화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파리와 좀나비라고 하는 이야기인데, 어느 날 파리가 꿀 항아리에서 꿀을 먹다가 변두리에서 조금씩 빨아먹으면 될 텐데 조금 더 조금 더 많이 먹으려고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요. 날개가 꿀에 젖어서 이제는 날 수가 없게 되고, 그냥 거기서 꿀 좀 먹다가 죽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신세가 됐을 때에 그 좀나비라 하는 나비 가 펄펄 날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야 이 놈아, 아니 조그만 놈이 변두리서 좀 빨아먹어도 충분할 걸 뭐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었느냐, 이 미련한 놈아."그랬답니다. 그러다가 해가 졌어요. 주인이 등불을 켰더니 좀나비들이 모여드는데 불 가까이로 막 모여들다가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나비가 모여들다가 그만 그 속에서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파리가 하는 말이 "너는 나 보다 더 바보다." 그랬답니다.
자기 욕심,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여기에 끌려 가다가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모습. 우리는 이 군상을 보며 이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나는 누구입니까. 내 마음, 내 몸, 내 뜻, 내 습관, 내 성향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이대로 괜찮습니까?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신앙의 위인이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장면이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 그리고 바울을 세계적인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존경하고 있는 그 로마사람을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편지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적나라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박하게 이렇게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진실을 이렇게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속의 은혜를 고백하게 됩니다. 자기 진실! 아주 진실한 자기 모습을 자기는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고린도후서 12장에 가서는 더 절박한 얘기를 합니다.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겸손할 수 없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교만하고, 이것이 아니면 은혜에 살 수 없는 존재이며, 나는 못된 놈이라고...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나를 계속 찔러야만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라고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실패했다고 하면 그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심이 많았어요. 욕심이 지나쳤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실패한 데는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생을 걸만한 확실한, 확고부동한 목적이 없었어요. 그런 목적으로써는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적이 문제였어요. 세 번째는 내가 세운 목적에 대한 합리적 값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큰 것을 원했으면 수고해야 하고 학자가 되려고 했으면 열심히 공부 해야하고, 내가 지불해야 될 진실과 충성과 열정을 다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자기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내 지식, 내 감정, 내 판단, 이런 것들이 도대체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의지 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됩니다.
승리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일등이 되고자 하는 욕망! 이것을 포기하기 전에는 우리가 승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경쟁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웠고 허무한 일에 너무 많은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 내 욕망, 내 의지, 내 판단을 쫓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네 욕망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네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로는 안됩니다. 이것을 바꾸어야 됩니다.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살려고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제 그만 어리석도록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 거기다가 부지런을 떨면 점점 더 멀리 갑니다. 미련한 사람이 또 고집을 부립니다.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합니다. 생각 좀 달리 해야 합니다. 아주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중생하며 예수 처음 믿고 십자가의 예수를 발견하고 내 죄 사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던 감격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내가 잘 믿었느니, 내가 열심히 믿어서 이만한 직분을 맡았느니 하는 쓸데없는 생각 다 잊어버리고 처음 믿을 때로 돌아가고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다시 생각하고 거기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적 관계에서는 구원의 길이 없고 소극적 방법으로는 해결이 없고 부정적 방법으로는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믿어 볼 것도 없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창조적인 역사로 시작되어야 됩니다. 이제 내 생각은 다 버리고 그저 어리석을 정도로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시는 대로, 성령이 지시해 주시는 대로,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려고 몸부림 칠 것 없습니다. 아주 사랑해 버리면 됩니다. 핍박하는 자를 피해보려고 하고, 미워하는 자를 같이 미워할 것 없습니다. 대결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더 이상 비방하지 말고 이제는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비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복을 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도둑질하던 자가 있느냐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 그랬습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은 구제하고, 교만하던 사람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겸손해지고, 내가 무엇을 하고 남을 도왔다고 생각하던 것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나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 화평과 진실을 찾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될 때에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는 자유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도 어려운 나 자신을 이기게 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 세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내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우주에는 어떤 신비로운 의지가 있다
'눈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이 우주에는 어떤 신비로운 의지가 있다" 고 합니다. 자연법칙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신비로운 강한 의지가 있는데 그 의지로부터 받은 유전인자가 우리 몸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의지에 가까이 가며 살면 건강할 수 있고, 이에서 멀어지든가 역행하면 그 몸에서부터 악한 호르몬이 나와서 그를 병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 신비로운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의지가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그리로 향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같은 길로 갈 때 육체도 정신도 건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현실 여기에 몰두하지 말고 생각을 돌려서 내 마음속에 깊이 있는 사랑을 재점검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헨리 나누엔(Henri Nouwen) 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명문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 박약자 수용소인 <데이 브레이크(Day Break)>학원의 직원으로 자청해 가서 봉사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정신박약자들에게 용변 보는 법을 가르치고, 식사와 세수를 돕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후 책도 20여 권을 집필했으며, 그 책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누구나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 길을 포기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요지는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몸소 행했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만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니 예수는 안보이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알고 있다는 지적 교만함 때문에 도리어 눈이 가리워 보다 큰 진리를 거역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눈이 실명하지 않도록 밝은 태양 앞에 시선(視線)을 내립시다.
오늘 본문 24절에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자기 노력으로 해 보려고 애쓰다가 더 비참해 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사람이고, 더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 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옛 생활에 노예가 된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이 없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能)으로도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그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성령은 곧 진리의 영이요, 사랑의 영입니다. 그때에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관계, 새로운 자신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든,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을 하는 사람이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든, 성경 안에 나타나는 신앙의 위인이든, 역사의 무대에서 위대한 삶을 살았고 참된 가치를 남긴 사람이든, 평범할지라도 주님을 따라가며 성실하게 주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갔던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일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본 회퍼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은 이런 인간, 내일은 저런 인간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의 대상인 약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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