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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권세 있는 새 교훈 2002-05-21 14:38:04 read : 26082
성경구절 마가복음 1:21-28
설교날짜 2002/03/03
신학교 재학 시절에 매주 드리는 예배 시간에 전국에서 소위 내로라 하시는 훌
륭하신 목사님들이 강사로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할 것 중의 하나가 생각납니다.
그것은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종종 계셨는데 마음에 다가온
감동과 깨달음, 그리고 느낌은 분명하게 달랐던 것입니다.
물론 전달 과정의 차이일 수 있지만 제가 그 때 기억했던 것은 해박한 신학적
지식과 달변의 말씀을 들을 때는 오히려 가슴이 뜨거움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언
어구사가 어눌하고 해박한 지식적 수준이 뛰어나지 않았어도 설교의 시작부터 마
침까지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지면서 저절로 회개와 감동이 일어났던 설
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오늘의 제 자신이 전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
서 전하는 부흥사경회의 설교를 하는 데에 분명한 기본 틀을 만들게 하는 동기
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동 있는 메시지,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고 결단을 통한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이루는 능력 있는 설교가 되게 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실과 정직입니다. 진정한 지도자의 권위는 거기
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뇌이는 언어구사가 아니라 듣는 이를 감동시키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도자가 권위 있는 지도자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이와 같은 의미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아볼로가 에베소에 이르러 주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심을 다하여 예수에 관하여 전하지만 듣
는 이들이 감동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여
그를 데리고 하나님의 도에 관해 자세히 풀어 이르고 난 후에 아볼로의 전도가
강한 역사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리고 19장으로 넘어가면서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들
이 받은 성경에 관한 지식은 겨우 세례요한의 세례정도였고 바울이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를 하게 되매 온갖 영적 역사가 일어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어떤 가르침에는 영적 역사가 없고 어떤 가르침에는 영적 역사가 일어
난 사건입니다.
가르침의 차이
21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우리가 알거니와 가버나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러 한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이 시작되면서 예수님
의 공생애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르침의 사역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잘 가르치기도 해야 하지만 잘 배워 듣는 것 또한 가르침 못잖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반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근본
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의 '놀라니'의 헬라어는 '엨세플레쏜
토'( )로서 이 말은 '밖으로'의 '에크'( )와 '친다'를 뜻하는 '플레
쏘'( )의 합성어로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청중들이 놀란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교훈( )은 능동적 측면에서는 가르치시는 행위 혹은 방법을 말하
고, 수동적 측면으로는 가르치는 내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목수 출신 시골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내용과 그 방법을 보면서 회중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표현입니다.
저를 은사로 생각하고 따르는 후배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가르친 것도 없지
만 저를 항상 영원한 랍비로 생각하는 젊은 목사입니다.
부목사의 직임을 끝내고 모든 면이 갖추어진 교회 담임목사 천거를 받아 소위
선보는 듯 설교를 하러 가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전화로 조언을 구해왔습니다.
내용인즉 어떻게 설교를 해야 성도들이 감동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25분 정도의 설교를 하는 동안 한 번은 성도들이 말씀에 젖어 울어야 하고,
한 번은 자연발생적으로 파안대소할 수 있어야 하고, 한 번은 구원받은 하나님
의 자녀 됨을 깨달아 감격하여 기쁨으로 충만한 내용과 전달 방법으로 설교를 하
라고 깨우쳤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렇게 설교를 준비했고 선포했고 그 날에 당회는 만장일치로 청
빈 청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다음 주일에 공동의회를 통하여 위임목사로 청빈 청원
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전화를 받고 감사했었습니다.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선포 방법이 어떻게 연출되느냐? 그것은 가
르침의 차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부목사님들께 항상 주문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설교를 잘 하시라
는 것입니다.
부목사님들이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더 잘해서 시끄러운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
도 들어보지만 저는 부목사님들이 저보다 설교를 잘해 주실 때 정말 행복합니다.
내용도 물론 충실해야 하지만 전달과정을 감동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
합니다.
죄와 허물을 깨우칠 때는 폐부의 소리가 터져야 하고, 불의를 질타할 때는 서
릿발같은 표현력이 있어야 하고, 사랑을 강조할 때는 온 몸에서 예수 사랑이 넘
쳐나야 하고, 회개를 강조할 때는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쏟아
지는 설교를 하기를 가르쳤습니다.
글 읽듯 하기보다는, 이야기하듯 하기보다는 생명과 영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
달하는 메신저로서 설교자는 내용과 함께 표현이 우리 주 예수의 권세 있는 선포
를 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가르침은 내용과 방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전달자의 연출에 의해 감동이 가감될 수 있다는 말이 옳은 해석이
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의 가르침의 차이는 무엇일까?
첫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직 진리였는데 서기관의 가르침은 사변적(思辨的)
이었습니다.(요14:6, 18:37)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생명과 사망, 현재와 영원의 의미를 담은 가
르침이었는데 서기관들이 가르침은 현실적 하찮은 문제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었
습니다.(마23:23, 눅11:42)
셋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논리 정연하면서 체계가 이루어지는데 서기관의 가
르침은 중언부언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마6:7)
넷째는 예수님은 일상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가르쳤지만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 핵심이었지만 서기관들의 가르침에는 사랑
이 빠졌습니다.
여섯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따랐지만 서기관들의 가르침에는 대부
분 스승의 유전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차가지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그런 가르침을 실행하고자 힘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
다.
귀신도 순종하는 가르침
23-26절의 내용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내용입니다.
마침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가 예수님의 가
르침을 듣고 예수님 앞에서 굴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주목할 만한 몇 가지를 깨닫게 합니다.
첫째는 귀신도 회당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귀신이 있음
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귀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별할 수 없었
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라야만 귀신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귀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적 영적 상황과 신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표현입니다.
넷째는 귀신은 사람들 속에 집단적으로 거한다는 점입니다. 24절 말씀을 보
면 "우리가" "우리를"이라는 복수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섯째는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이라는
말과 "우리를"이라는 말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는 굴복한다는 점입니다.(요일
3:8).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제자들도 예수에 관해서는 확실한 이해와 믿음이 없었는데 귀신은 벌써 예수님
의 신분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갈 것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만큼도 예수님
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고 귀신에 얽매여 귀신의 놀림감이 되
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를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귀신도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는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귀신도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귀신은 정말 귀신같이 알
고 다가와서 귀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귀신의 도구가 되어 교회를 파괴하고 무질서하게 하고 사랑보다는 미움
을 조성하고, 화해보다는 분쟁을 조성하고, 용서보다는 정죄를 조성하고, 연합보
다는 분열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귀신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
아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쉽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이리저리 이간질을 업으로
삼고, 더러운 利를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를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귀신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함께 믿음의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더욱 나아가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
27-28절 말씀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의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새 교훈'의 헬라
어 '디다케 카이네'( )는 이제까지의 랍비들의 진부하고 장황한 설명
과는 근본을 달리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상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운'( )것
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겨울을 지난 새 봄의 싱그러움과 같고, 탁한 도시의 공기가 아니
라 깊은 산 속의 청량(淸 )한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에 온 회중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소문은 각처로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도 그렇고, 개인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소문도 그렇습니
다. 더럽고 추한 소문이 아니라 아름답고 성결한 소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아름답고 청량한 소문보다는 더럽고 추
한 소문이 더 많이 들려오는데 곤혼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어디까지 퍼져 나갔습니까?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 고침을 받고,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 소원을 이루고, 백부장도 소문을 듣고 예수
님께 나아와 하인이 병을 고침 받게 되고, 허다한 병든 자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포항 중앙교회의 좋은 소문을 듣고 허다한 백성들이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도 권세 있는 말씀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모이게 됩니다.
관습처럼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찬양대로 교사로 기타 다양하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복음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심령의 감동을 받
고,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며, 헌신의 아름다움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봉사
가 이루어집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훼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적 소욕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기쁨을 추구하
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권세 있는 새 교훈이 있는 곳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예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고, 전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더욱 굳건히 세워지도록 함께 믿음의 행보를 정진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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