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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공동상속
2002-06-07 19:16:36   read : 27469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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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창세기 28: 10 ~15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를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8:12 ~ 17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 17: 11 ~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였다.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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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열 명이 예수가 지나가는 길에 멀리 서서 예수에게 간청합니다. "제발 저희를 고쳐 주십시오." 우리가 읽은 표준새번역 성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은 "우리를 좀 고쳐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병이 들었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이 병을 고쳐 주십시오."
예수의 처방은 좀 엉뚱합니다. 고쳐 주지도 안은 채,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제사장한테 가는 동안 문둥병이 다 낫고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게 병 고친 이야기의 한 단면입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질병 때문에 보통 정상인처럼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픈 거 좀 낫게 해주십시오. 병상에서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는 당연히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더러운 몸 때문에 나병환자는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같은 상에 앉지도 못하고,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일탈된 사람들입니다. 질병 때문입니다. 사실 일단 소외되고 나면, 병이 나았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소속했던 공동체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나병과 같은 병에 걸리게 되면, 이중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병 때문에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고통 당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병 때문에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셨다는 말은 두 가지를 함께 해결해 주신 것을 뜻합니다. 병도 나을 뿐 아니라, 소외되었던 공동체에 다시 속해서 그 공동체의 아주 정상적인 일원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사장들한테 가서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으라고 했습니다. 아마 질병에서 나은 사람은 첫 번째 병 나은 것도 고맙고, 두 번째 새롭게 인간 공동체의 한 식구로 소속된 기쁨도 클 겁니다. 이것이 질병을 고치는 치유의 두 가지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서 말씀에 보면, 고침을 받은 열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만 예수께 돌아와서 발 앞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을 내가 깨끗케 했는데, 아홉 사람은 어디 갔느냐. 왜 그대만 혼자 오느냐." 예수의 이 말씀은 고침 받은 사람은 병이 나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외된 공동체로 복귀되기 때문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옳다는 뜻입니다. 왜 병이 낫고 공동체로 복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찬양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육신의 병이 나았으면, 고통이 멈췄으면, 영적인 갈증이 해소되었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에 감사한다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는 반드시 찬양을 수반합니다.
"왜 나머지 사람들은 없느냐?" 아홉 명은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만 찬양했습니다. 예수께서 감사하고 찬양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의지하면 육도 영도 다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그걸 확실히 믿습니다. 믿음이 우리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아무 믿음이라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구원받고 죄 사함을 받은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좋은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믿음은 구원의 은혜가 됩니다. 찬양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찬양하십시다.
찬양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릴 수 있습니다. 찬송을 통해 드리는 찬양이 있습니다. 기도로 드리는 찬양도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드리는 찬양도 있습니다. 선교하고 봉사함으로써 드리는 찬양도 있습니다. 찬양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먼저 감사하며 찬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그 사람의 믿음을 구원의 도구로 써 주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겁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로마서를 통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시는데, 그 나라의 상속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 하나님으로부터 그 나라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지만, 혼자 상속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소외되었다가 다시 받아들여지는 곳, 하나님의 공동체, 성부 성자와 성령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상속권이 있지만, 우리한테는 어떻게 공동상속이 가능하게 됩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출생에 따른 상속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입양된 자의 자격으로 상속권을 부여받습니다."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 증거는 바로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에는 사명도 부여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상속권을 확장시켜야 할 그런 사명입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니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함께 받는 사람은 그 삶이 변해야 합니다. 이제는 육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고, 영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세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복입니다. 오늘 세상 가운데서 육을 따라가는 삶이 무엇인지 설명을 안 드려도 다 아실 것입니다.
유대교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 이런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돈 많은 유대인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 가운데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저축도 했습니다. 근검절약도 했습니다. 필수품도 사지 않으면서 돈만을 모았습니다. 30년 간 모았더니,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질문명의 풍요와 세계화가 온 지구를 풍미하니, 이제부터는 여유 있게 세계화와 물질의 풍요를 맛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는 혼자 가위로 머리를 깎았는데, 이제는 고급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습니다. 손톱도 손톱관리소에 가서 깎고, 그 다음에 안마도 받고, 모든 편의를 다 누립니다. 옷도 과거에는 간편복을 입었는데, 이제 파리의 유명한 양복점에 가서 양복을 한 벌 맞추었습니다. 그 양복을 입고 휴가를 갑니다. 그가 택한 곳은 프랑스 남쪽의 유명한 리스라는 해변가 휴양지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멋지고 훌륭한 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그날 바로 시내에 가서 아름다운 이태리 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딱 달라붙는 프랑스 바지도 하나 사 입었습니다. 그 위에다 스코틀랜드 식으로 된 혼방 웃옷을 사 입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영국식 산책로로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나갑니다. 우리가 흔히 한 번 쯤은 하고 싶었던 일들입니다.
산책길을 막 나서는 순간 앞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에 부딪혔습니다. 이 사람은 그 요란한 옷들을 입은 채 길 위에 누워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구경꾼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염려합니다. 이 사람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하늘을 보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야웨 하나님, 왜 하나님은 저를 오늘 이처럼 죽이십니까?" 사람들의 요란한 탄성 속에 구름이 갈라지더니,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시몬아, 솔직히 말해서, 오늘 네가 입은 그 모양을 보고, 너인 줄 몰랐다."
결코 남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경우가 있고, 그렇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시몬은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 이렇게 세계화를 몸에 끌어안은 저를 인식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묻는데, 하늘에서는 인식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답은 교과서에 없습니다. 답은 우리가 찾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변화를 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속사람의 변화입니다. 세계화라는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흐름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영, 창조주의 영, 그 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코틀랜드 제, 이태리 제, 프랑스 제, 한국 제, 그 어느 옷을 걸쳐 입든지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세계화라는 역사의 흐름의 원동력이 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않고서야 어떻게 세계화를 올바로 즐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풍요한 삶의 즐거움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육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육 속에 담긴 창조주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영을 따라 사는 지혜와 결단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하도 착해서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누구나 다 "제도와 법" 속에 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법과 제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이상을 따라 삽니다. 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법 안에서 살지만 법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지만 세상의 온갖 속박을 넘어서서 살아야 합니다. 육을 입고 살지만, 육이 가진 가치관을 넘어서 영적 가치관에까지 도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비판의 내용은 율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 성령의 능력까지 입은 인간이 율법이라는 올무에 매여 사느냐는 것입니다. 왜 율법이라는 올무를 초월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초월하여 살 수 있지 않느냐는 비판입니다. 율법 아래 살면서,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입니다. 비록 율법이라는 체제 속에 살지만, 율법이 가진 이상을 넘어서는 이상, 율법이 규정할 수 없는 높은 이상, 곧 하늘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은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의 차이는 뭡니까? 복음의 사람이란 율법 없는 데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똑같이 율법 아래 살지만, 율법을 넘어서 살 수 있는 사람, 율법을 초월하는 높은 하늘의 뜻을 바라보는 성령의 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의 옷을 입고 왔습니다. 육이 입을 수 있는 모든 내용과 형식을 다 갖춘 말 그대로 인간이었습니다. 그 예수는 육의 제약과 세상의 법도 아래에서 살았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육 속에 담긴 하늘의 뜻을 보는 사람, 세상의 제도와 체제 속에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고귀한 하늘의 뜻을 품고 실천하는 사람, 그 사람을 오늘 사도 바울은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계십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속에 잉태되지만, 세상 속에 있는 높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병들어서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이 병에 사로잡히면, 나을 수 없습니다. 병의 한계를 넘어서는 치유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을 받는 사람이 고난 속에 묶여 있으면, 고난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여러분은 "고난을 받으나 고난 속에 매몰되어 살지는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고난의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을 맛보고 사십시오.
초대교회 시대에 하나의 교훈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인 한 명을 데려다가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지금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 이건 마치 무덤을 찾는 사람과 같소. 무덤에 가서 거기 묻힌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실컷 욕하고 경멸하고 능욕해보시오. 그리고 뭐라고 하는지 답변을 들어오시오." 그 사람이 무덤으로 갔습니다. 가서 실컷 욕을 했습니다. 능욕을 했습니다. 경멸을 했습니다.
"뭐라고 합디까?"
"아무 말이 없습디다."
두 번째 지시를 했습니다.
"무덤에 가서 최고로 칭찬하고 아부를 해보시오. 그리고 대답을 듣고 오시오."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경멸과 칭찬, 비판과 아부, 그 극단적인 자극에도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너무 험난하여 극과 극이 대결하여 칭찬과 경멸이 난무하거든, 차라리 무덤에 있는 사람처럼 잠잠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입을 다무는 것만이 인생의 법은 아닙니다. 이제 말할 차례가 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마 무덤을 향해서 온갖 경멸과 저주의 말을 다 했을 겁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의 무덤을 보고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면서, 예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편으로 "당신까지 죽으면 우리는 이 좌절에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하고 한탄했을 겁니다. 경멸과 한탄 속에 예수는 말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예수의 십자를, 예수가 묻혀있는 골고다 언덕의 무덤을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신 삼 일 동안의 역사는 인간 편에서 보면, 침묵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삼 일째 되는 날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침묵의 무덤이 부활의 알을 부화시키는 장소인 줄 누가 알았습니까? 고난의 극치인 죽음이라는 현장이 영원한 생명을 산출하는 장소인 줄 누가 알았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스럽고도 깊은 침묵 가운데에서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나라가 잉태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오늘 문둥병 나은 사람이 문둥병이 낫자 예수를 찾아와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절망과 죽음의 무덤 속에 갇혔던 한 인간이 부활을 체험하고 예수 앞에 나와 찬양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찬양과 기도와 찬송은 사실은 부활에 그 이유를 두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찬양할 수 있습니까? 부활이 없는데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부활이 없는데 무덤이 어떻게 우리의 찬송 대상이 됩니까? 찬양할 수 없습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 또 우리가 걸머져야 하는 십자가, 개인의 십자가, 가정의 십자가, 분단된 민족의 십자가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반드시 부활의 새 생명이 움터 나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우리는 그래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도 찬양합니다. 무덤에 묻히신 날도 찬양합니다. 부활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부활의 증인들이여, 생활에 얽매여 살지 말고, 십자가의 고통만을 보지 말고, 그 너머의 초월, 그 너머의 새로운 생명을 보아라.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율법의 이상을 초월하는, 극복하는 새로운 자유의 삶을 왜 경험해 보아라."
찬송은 그럴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꿰뚫고 새로운 소망으로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 나라에 지금 필요한 것은 부활의 새 소망입니다. 믿는 자들이여 일어나 가십시오. 부활을 꿈꾸십시오. 그리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힘쓰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 죽음의 알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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