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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구하지 않는 영광
2002-09-16 14:07:59   read : 33414

요한복음 5:41-44절 // 02/09/16

2주동안 여러분의 기도와 염려가운데 저는 무사히 러시아 선교여행을 마치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먼저 선교여행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배려해 주신 선교위원들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네 차례 중국선교여행과는 달리 또 다른 넓은 세계의 선교현장을 볼 수 있어서 제게는 매우 의미있는 선교여행이었습니다. 2주동안 겪었던 일과 선교현장에 대한 보고는 설교시간이나 교회신문, 그리고 홈페이지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려 합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저희 일행은 북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같은 숙소에서 이틀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로 향하기 전까진 북한 사람들이 러시아에 그렇게 많이 진출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그들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한국의 모 교회에서 세우는 대학교의 기숙사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직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었고, 그들은 그곳에 노동자로 와 있었습니다.

이틀동안 밤 늦도록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 속엔 주체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 선생님이 예수를 믿는 것과 우리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네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그들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한국의 드라마 보는 것을 즐겼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를 즐겨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뉴스를 틀면 그들은 의식적으로 남한의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회피를 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입니다.

헤어질 때 한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 선생님! 제가 정말 예수를 믿을 사람처럼 보입네까?" "물론입니다" 그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분을 주께로 불러 주신줄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도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교육받아왔던 주체사상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예수를 믿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이 굉장히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질문했던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계시다는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제가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발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선교여행중 첫번째 방문지였던 비로비잔은 유대인 자치주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유대인 학교가 있고 유대인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유대의 랍비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회당 안은 온통 다윗 별과 일곱 촛대로 장식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려는 귀환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직도 오시지 않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내하는 분이 우리 일행을 도서관으로 데리고 가서 두꺼운 토라(율법서)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그 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는 듯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토라를 보여주었습니다. 도서관에는 탈무드와 그들이 자랑하는 많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만났던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만났던 유대의 지도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으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주님께서 4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쳤을 때, 칭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오래된 병자를 고치셨으니 참 잘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여태껏 그를 내 버려두었는데 그 병자를 고치시다니 당신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면 대단히 만족하게 여겼을 터인데 그렇게 칭찬하기는커녕 안식일에 병자고친 것을 문제 삼아 꼬투리를 잡았으니 이것이 문제가 되어 지금 자신들과 충돌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자신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칭찬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곧 '나는 너희들처럼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그런 자가 아니다'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를 원했고, 영광을 얻으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당시 유대인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던 사람이 갑자기 시들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때 열정적으로 봉사하던 사람들이 식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한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세히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기 위해 열심을 내었던 경우가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칭찬이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신앙의 동기가 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태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기대와 칭찬이 사라지게 될 때 영락없이 그 얼음판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동안 사람에게 칭찬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여러차례 "교회에서는 서로 칭찬하는 말 만하자"며 여러분들에게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과 배치되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세워주는 의미에서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칭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은데 그렇게 해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에 대해 무게가 실리고 좀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화를 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대우를 해주면 사랑이 많다고 말하고 조금만 무관심하면 사랑이 없다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합니다.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만나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 종을 보내어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을 때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아니 내가 누군데 감히 얼굴도 한번 내 밀지 않고 건방지게 종을 시켜 요단강에 들어가 씻으라 말아라 하느냐?'며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가 누구긴 누굽니까? 엘리사에겐 이방인이며 문둥병을 앓고 있는 환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모습은 보지 않고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화를 내었습니다.

과거에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물론 요즘도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경찰서에 붙잡혀 와서는 하는 말이 '내가 누군데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큰 소리칩니다. 그리고 '청와대에 있는 누가 나의 친척뻘 된다'고 말하면서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달라'며 야단법석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기가 누굽니까? 경찰서에 붙잡혀 온 범법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고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버럭 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런 일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목회자를 향해 더 많은 공격적인 말들이 쏟아집니다. 예를 들어서 한 주 혹은 그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전화가 없거나 심방이 없으면 '우리 목사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모양이야'라고 말하든지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전화 한통 없어', '도대체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면 이럴 수는 없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영광을 구하고자 한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칭찬과 영광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요? 그 이유를 4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유대의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한 근본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또 주를 위해서라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얼마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신학생시절 찬송가 355장을 참 즐겨 불렀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저는 이 가사에 참 많은 은혜를 받고, 도전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고백과 함께 그렇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15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 찬송을 그때의 감정을 가지고 부를 수 있는지 제 스스로도 의문입니다. 과연 그때처럼 뜨거운 마음의 각오가 내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는지 내 스스로도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입술의 고백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사람의 칭찬과 영광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곧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가? 와 연관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3절에 보면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주님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와 직결되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는 예수님은 거절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니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들어서 귀가 솔깃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전부가 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듣고 싶었겠습니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칭찬과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전혀 충족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주의 교회에서 무엇을 듣고자 하십니까? 위롭니까? 물론 위로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칭찬입니까? 물론 칭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소망의 말입니까?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설령 내 귀에 거슬리는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들을 수 있는 자세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 어떤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겸손하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얼마만큼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끄집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 인간의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주 금요기도회때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참석자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듣는 자도 이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앞에 겸손해 질 수 없으며 교만한 태도가 결국 나를 영적으로 더욱 깊은 수렁에 빠트리게 할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생각이나 판단에는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서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는 것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구미에 당기는 말만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선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랬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사람은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내 마음에 합당하고 기분좋은 말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설교시간에 아멘하는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대부분 자기 마음에 드는 대목에 대해서만 '아멘' 합니다. 만약 '내일부터 새벽기도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분이 얼마나 있을까요? 만약 '장애인 학교 설립을 하는데 재정이 부족하니 한 가정에 백만원씩 헌금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아멘'하실 분이 얼마나 있을까요? 물론 이것은 극단적이 예일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내 마음에 용납되는 것만 받아들이고 잘 용납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거부감 때문에 교회에 대해 비판부터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자신들의 귀에 자꾸 거슬리는 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사람은 적어도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설교를 합니다. 자기들이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 부담없이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부담없이 신앙생활 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기관에도 속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나를 편하게 해 줄는지는 몰라도 편한 것이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말씀 앞에 거룩한 부담감을 느껴야 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과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는데 내 믿음이 그것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이 정도의 고민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고민도 없이 신앙생활 한다면 분명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거나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때 사람들은 예례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 듣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짓선지자들은 전혀 반대되는 말을 했습니다. '안전하다'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말이 듣기 좋습니까? 당연히 '평안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담감을 주는 예례미야 선지자의 말보다는 듣기 좋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슨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위로의 말, 평화의 말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나를 향해 주시는 거룩한 부담의 말입니까?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한국의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들어가서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물론 그 넓은 나라에 비해 선교사의 숫자는 너무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도 교회가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한국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이제 10년 남짓되는 선교의 역사속에서도 한국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이 견실하게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교사들이 다 훌륭하게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선교에 있어서 잘못된 접근으로 어려움을 당한 몇몇 교회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교회에 오면 한국에 돈 벌러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교를 위해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서 그들을 어떻게 바르게 세울 것인가? 를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접근을 해서 실제로 한국에 일자리를 알선 받아 열심히 돈을 버는 분들도 있지만 일이 잘 처리되지 않아 원망을 사는 예도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말씀에 대해 나의 의지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대로 받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한국교회는 앞에서 언급했던 그런 문제로 고민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이 안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 하는 습성이 우리 몸에 배여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우리주님은 참으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4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결코 영광을 취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서로 영광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서로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설령 우리가 선한 일을 했다거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했다할지라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영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은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오기 위해 저희들은 하바로브스크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70% 정도는 여성이었고 그 중에 절반정도가 러시아 여성들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여성들이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일행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숨이 막혀 죽을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좁은 대기실에서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담배를 피워댔기 때문입니다. 한시간 기다리는 동안 한 사람이 적어도 3-4개피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집에 왔을 때 저의 아내 첫마디가 "왠 담배 냄새냐?"는 것이었습니다. 제 옷은 이미 담배 냄새로 찌들어 있었습니다. 정말 대기실에 있는 동안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외모가 아름답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면 무엇합니까? 그 속은 담배연기로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칭찬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시커멓게 변해버린 그 속을 청소하고 깨끗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광을 취해도 우리의 본성상 영광은 우리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서로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진정한 영광이 될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영광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받을 영광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이후로도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나의 실체를 정확하게 들여다 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갈 영광을 내가 탈취하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선 저와 여러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리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가족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어떻게 믿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사람들을 통해 받는 영광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돌아본 러시아의 도시 어디를 가도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레닌동상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시절 레닌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레닌의 동상은 거의 흉물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흉물스럽게 변해 버린 동상을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큰 광장에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과거처럼 위용을 드러내는 동상은 아니었습니다.

한순간도 되지 못하는 영광을 위해 레닌은 볼세비키 혁명을 통해 재정러시아를 무너트리고 권좌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한세기가 다 가기도 전에 그 영광은 무너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지만 오늘 우리들의 신앙공동체 속에서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으로부터 받게 될 칭찬과 영광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사람을 영접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앞에 내 삶을 내려놓고 그분의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설령 내 생각과 틀리고 내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칭찬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온전히 사모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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