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표현하자 2002-10-15 14:50:19 read : 43448
2002년 10월 06일 // 누가복음 5: 25-34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가만히 있어도 떠밀려 갈 정도로,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에워쌌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 지도 모르는, 어떤 가련한 여인이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소외당하는 것"과 잊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군중 속의 소외를 느낄 때, 그 외로움과 고독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이 여인은 많은 군중들 속에서, 따돌림을 당해야만 하는, 참으로 가련한 여인이었다.
1. 왜 이 여인은, 절망에 빠진 가련한 여인인가?
(1) 이 여인의 절망은, 열두 해 동안 불치병을 앓았다(25-26).
혈루병은 헬라어로 [뤼시스 하이마( )라고 하는데,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말한다.
이 여인은 부인병으로 고생했는데, 학자들은 성병이나 자궁암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많은 의원들에게 찾아갔지만, 병은 고치지 못하고,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계속 괴롭힘(분사)을 당한, 고질병을 가진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유출 병에 걸리면, 탈무드의 치료법은 적어도 11개나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타조 알을 태워 그 재를 베 조각에 싸서 가지고 다니거나,
흰 암나귀의 똥 속에서 발견된 보리 알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미신적인 치료법이 있다.
이 가련한 여인은, 이런 무모한 치료법을 의심하지 않고, 시험해 봤지만, 효험이 없었다.
'열둘'은 완전수로, 모든 것을 다 해봤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열두 해 동안 고생하면서, 병을 고치려고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오히려 몸은 더 망가졌다.
그래서 "있던 것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졌던 차에…"(26)
실의와 절망, 가난과 고독으로, 이제 누가 보아도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사람이다.
(2)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 없는 병
사람들과 같이 살지 못하고,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병이 2 가지가 있는데, 문둥병과 혈루증이다.
레위기 15장에는, 혈루증이 유출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이 앉은자리에도 앉을 수 없다.
한센병(나병환자)과 유출병자는, 그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없었다.
병들면 사람이 그리운 법인데, 이 여인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성밖으로 쫓겨나 그들끼리 모여 살았다.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회당에 나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접근할 때는, 나는 부정하다는 뜻으로 타메( )를 외쳐야만 했다.
그 당시 이 병은,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되었으므로, 이 여자는 이혼 당했을 수도 있다.
사회에서 쫓겨나고, 교회와 단절되고, 가정에서 버림받은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무도 받아줄 수 없는 여자… 버림받은 여자, 소외된 여자였다.
(3)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여인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여인이 하나님을 찾았다는 구절이 없다. 이 여인의 가장 큰 비극은,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50:15)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이 여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여인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를 만나면 산을 만났다고 한다.
이 여인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큰산을 만났다.
♬♬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1108) ♬♬
역사에 나타났던 사상가 중에, 가장 진실한 사상가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그는 모든 인간을 불안하고, 절망하는 존재로 보고, 역설의 진리를 외쳤다.
그 책은 크게 2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제1부는 "절망하는 것이 죄다"는 명제아래, 인간이 절망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제2부에서는 "절망하지 않는 것이 죄다"라는 명제 아래, 인간은 절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에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절망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고 하였다.
사람은 절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찾으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병 걸린 중환자도, 돈 없는 사람도 아니고, 잊혀진 사람과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2. 절망은 주님을 찾는 지름길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27).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재산을 다 탕진한 다음이었다. 아직도 재산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오늘은 이 병원 내일은 저 병원, 오늘은 이 약국, 내일은 저 약국을 찾아다녔을 텐데…,
이제는 돈이 다 떨어져서, 세상에서 붙잡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돈이 있을 때는, 돈을 의지하느라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돈 떨어지고, 절망에 빠지게 되자, 여인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과,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증거 하는데,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분께 갔던 앉은뱅이도 일어났고, 맹인도 눈을 떴고, 나병환자도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이었다.
그 놀라운 치료자는,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나돌았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셔서, 고통받는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소식을 이 여인은 들었다. 이 소문은 그녀에게 위대하고 기쁜 소식이었다.
더구나 그 이름이,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 예수라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나 이 여인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병은 부정한 병으로, 군중 속에 들어갈 수 없는 병이었다.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접촉되는 사람들이 부정해지기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갈 수 없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에,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만나야 산다는 믿음이 마음 속에, 더욱 커졌다.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산다는 믿음이, 그의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몰래 가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결심한다. 그녀의 행동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다.
세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게되자, 최후에 예수님을 택하는 장면이다.
27절을 보면, 중요한 말씀 두개가 나온다. "소문을 듣고"와 "손을 대니"이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푼 사람들은, 반드시 "듣고"와 "믿고"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이 두 단어가 언제나 강조되어 있다. 들음이 없이는 믿음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내 음성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5:24).
본문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 대신, "손을 대다"는 표현을 대신 썼다.
손을 댔다는 말은, 믿음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잘 설명해 준다.
3.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믿음은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주님께 자신을 묶는 행위다.
민15:38-40절을 보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다는 뜻으로, 술( )을 달은 옷을 입는다. 여기에 끈들이 달려있다.
손을 냈다( , )에서 왔다. 만졌다는 말이 아니라, '붙들어 맸다, 불을 붙이다'는 말이다.
영어로 Touch가 아니라, fasten, seize한다는 말이다.
이제 빈손이 된 여인은, 자신과 예수님이 하나되도록 예수님의 옷에 붙들어 맺다.
"내가 예수님을 만지는 순간, 나는 나을 수 있다"고 하며, 예수님에게 자신을 묶어 버렸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았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댔기에, 병 나은 게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의 표현일 뿐이다.
사실 예수님 옷에 손을 댄 사람들은, 그 여자만이 아니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고"(3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호기심을 갖고 몰려들었지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자신을 붙들어 매었다. 연합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28)는 여자의 연합된 믿음이, 이적을 낳았다.
믿음이 담긴 행동이었다. 여자의 믿음이 곧 현실로 나타나, 병을 고쳤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34).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주님과 의미 없이 부딪히기 때문에, 아무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리라 믿고,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고, 주님을 붙들 때,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적을 원하신다면, 연합된 믿음을 갖기 바란다.
(2) 신앙고백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셨고, 또한 이 여인은 자기 정체를 나타내기가 부끄러웠다.
부정한 여인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 행동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 틈에 자기 몸을 숨기고, 아주 은밀하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고 물으셨다. 왜 민망하게 주님은 물으셨을까?
수치와 창피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불안과 의심대신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이유는 고백을 원하셨다. 고백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감사와 신앙고백이며, 사람들을 향해서는 간증으로 영광돌림이다.
① 주님은 이 여인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아셨다. "예수께서 이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32).
33절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받기만 하고, 혼자서 그 일을 마음에 품어 두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수 없다. 고백이 없는 믿음은 힘이 없다. 주님의 은혜는 감추어 둘 수 없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부르자, 여인은 두려워 떨며, 와서 주 앞에 엎드려서,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입술로 나올 수밖에 없다. 입을 닫고 있다면, 그것은 비겁한 침묵이다.
고침 받음이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고침을 통하여 올바른 고백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어떤 신앙 체험을 했나요? 그 신앙의 체험은 귀중하고 소중한 체험이다.
그러나 그 귀한 체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내가 드러나는가? 아니면 주님인가?
우리가 주님께 영광돌리는 길은, 내게 일어난 사건을 많은 사람들 앞에 고백할 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역사 하신 일을 사실을, 그대로 말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
주님의 능력이 임해서, 삶이 변화되고 영혼이 치료되는 이적이 있었다면, 잠잠히 있지 말라.
② 신앙고백을 통한 구원
주님은 단순히 여인의 병만 고쳐주지 않으셨다. 여인은 자신이 병 고침을 받은 사건으로 끝났다면, 그녀는 주님을 겉으로만 만나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여인의 믿음은, 이렇게 하면 된다는 신념이었다. 이 신념을 신앙으로 바꿔야만 했다.
신념은 이적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구원에는 이를 수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율법은, 부정한 사람들은 전염될 위험이 있기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출병을 앓고 있는 여자는, 율법과 상식을 깨뜨리고 예수님께 손을 대었다.
사회가 저버리고 교회가 돌보지 않던 환자,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던 여자가, 그 더러운 손으로 거룩한 주님을 붙잡았다. 그래서 주님은 부정하게 되었지만, 그녀를 용납하시고 치료하셨다.
이 일은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온갖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며, 자녀 삼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 있다면, 이 사랑이 나타나고 표현해야 한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예표론적 상징이기도 하다.
죄 값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주 앞에 감히 가까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고쳐주시고, 죄 가운데서 건져 주셨다.
여인이 주님 옷을 붙들었을 때, 고침 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그 믿음을 고백하여, 구원의 기쁨을 얻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로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셨다.
결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변화 받은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합니까? 아무 믿음도 없이 그저 습관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던 호기심 많은 군중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이적은 없다. 문제의 해결은 없다. 이런 사람은 주님이 찾지 않으신다.
아무리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있어도, 주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고 붙드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구주로 고백할 때, 우리의 삶과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난다.
절망과 고독이 치유된다. 옮길 수 없는 산이 옮겨진다. 그래서 은혜와 기쁨을 감사로 고백하게 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34).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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