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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교수의 목회서신 -3
2003-02-27 10:54:39   read : 35433


밑 빠진 독도 채울 수 있다 (딤전 1:13-14)

조병수 교수


밑 빠진 독은 채울 수가 없는가? 사실상 이런 질문은 하나 마나한 것이다.
밑 빠진 독에 한 바가지 물을 부으면 한 바가지 물이 쏟아져나가고, 두 양동
이 물을 부으면 두 양동이 물이 쏟아져버린다는 사실쯤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일에 누군가가 밑 빠진 항
아리를 채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물지게를 지고 물통을 나른다면 그를 보고
하품을 금치 못할 것이다. 밑 빠진 독은 채울 수가 없다. 그것은 아무 짝에
도 쓸모 없이 괜히 자리만 차지하는 거추장스런 폐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모습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13). 사도 바울은 회심 전에 유익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고,
있으나 마나한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은 엄청나
게 손해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열거한 세 단어 훼방자, 핍박자, 폭행자는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조금
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을 한 가지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게 상당한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고전 15:8-9; 빌 3:6). 회심 전에 그
는 하나님의 교회 편에서 보면 플러스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제로를 넘어서
마이너스가 된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마이너스의 인간이 된 까닭
은 무지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고" (13). 비록 그가 여기에서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
이 구속을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으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
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셨다는 것, 교회는 예수 그리스
도의 구속 실현으로 말미암아 건설된 공동체라는 것, 이런 등등이었음을 의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도 바울의 무지는 불신에서 기인
한 것이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13).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불신은 무지의 바탕이었다. 그의 무지는 단순히 지적
능력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도 바울 만큼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얼마나 있겠는가. 이것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지난 이천
년 동안 각 시대마다 천재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글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
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연구한 것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무지한 자가 되고 말았다. 불신이 무
지를 잉태하고, 무지가 해악을 출산한다. 불신 때문에 무지하고, 무지 때문
에 해악이 되었던 사도 바울은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긍휼을 베푸셨
다.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13). 이 긍휼은 전적으로 밖에서 온 것이
다. 사도 바울은 단지 수동적인 입장에 서 있었을 뿐이다. 불신과 무지와 해
악으로 말미암아 밑 빠진 독 같은 폐물이 되어버린 그가 무슨 능동적인 일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직 깨뜨려 내버려지는 것만이 유일한 운명인 이런 쓰
레기 같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했다. "우리 주의 은혜가"
(14).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사 42:3)
은혜가 임한 것이다. 게다가 그 은혜는 신뢰와 사랑으로 장식되어 있었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14). 주님의 신뢰와 사
랑과 은혜가 바울의 불신과 무지와 해악을 이겼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불신
을 믿음으로, 바울의 무지를 은혜로, 바울의 증오를 사랑으로 이기셨다.

신뢰와 사랑으로 무장한 주님의 은혜는 밑 빠진 독 같은 사도 바울을 잠기게
하고도 모든 시간과 공간에 넘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넘치도록 풍성하였도
다" (14). 우리 밖에서 오는 은혜의 규모는 세상의 모든 바다를 합한 것보다
도 크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바다에서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로 채워졌
다.

그렇다. 밑 빠진 독도 넘치도록 가득 채울 수가 있다. 바다 속에 던져진다면!


일언 (一言)

(딤전 1:15)


온 인생을 걸고 살만한 한 마디의 말과 한 토막의 글이 없다는 것은 얼마
나 불행한 일인가. 말은 육성에서 기계음으로 발전하고 글은 지면에서 화면으
로 발전하여, 일회적이고 단거리적인 소리 대신에 반영구적이며 원거리적인
소리가 횡행하고 보관과 편집이 불편한 책 대신에 보관도 편집도 편리한 전자
문서가 유행함으로써 그렇게 많은 말과 그렇게 많은 글이 우리를 상하전후좌
우로 두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온 인생을 걸고 살만한 말과 글이 별로 없다.

나를 사로잡을 말과 내가 사로잡힐 글이 없다. 하지만 우리와 두 개의 천년
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리스어로 오직 여덟 개의 단어로 이루어
진 말에 완벽하게 나포되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
상에 오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함으로써 한 마디 말과 한 토막의
글에 인생을 걸고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잡아매고 있는 이 말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이 말은 믿을만한 말이다. "이 말이 미쁘도다". 이것은 누구나 신뢰할
만한 말이다. 이 말 앞에는 가슴을 열어놓아도 되고, 인생을 맡겨도 괜찮다.

이 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고 솔직하게 드러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말은 조금치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말이며, 가장 안전한 말이며,
복된 말이다. 이 말 앞에서 인간은 순진한 아이가 되고 순수한 백지 (白紙)
가 된다. 둘째로 이 말은 전포괄적인 말이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하도다".


이것은 누구나 수용할만한 말이다. 이 말은 주께서 나누어주신 떡과 물고기처
럼 모든 사람이 나누어가져도 부족하지 않은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받
든지 간에 양과 질에 아무런 손실이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모든 공간의 총합
보다도 광활한 것이며, 모든 시간의 총합보다도 장구한 것이다.

이 말은 모든 무게를 더한 것보다도 무거운 것이며, 모든 보화를 모은 것보다
도 고귀한 것이다. 이 말로 말미암아 사람은 당당한 장수 (將帥)가 되고 찬란
한 광채가 된다.

극치의 신뢰를 허락하며 최대의 수용을 제공하는 말과 글은 그렇게 길어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여덟 개의 단어의 집합만으로도 가장 크게 믿을만한 말
과 가장 크게 받을만한 글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 예수
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세 전부터 영광을 지니시고
모든 천사들을 다스리시며 이후에 역사에 등장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위
한 완벽한 원형을 소유하여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단절된 후에
극심한 부패 속에서 상하고 썩어져 흉측한 모습을 보이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
다가 마침내는 심판과 저주를 받아 파괴되고 멸망당할 세상과 인간을 향하여
낮아지심으로써 육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은 모양이 되시며 사람들 사이에 사
시는 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수직적 하강을 시도하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방문을 위한 것도 아니며 순방을 위한
것도 아니다. 여행이나 관광을 위한 것은 더 더욱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의 오심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의 마음은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자들의 가슴
에 나누어진다. 예수의 발길은 무덤보다도 더 무서운 죽음에 앉은 백성을 찾
는다. 예수의 눈길은 한 가닥의 실낱같은 빛조차도 스며들지 않는 어둠을 뚫
는다. 예수의 손길은 죄악 묻은 더러운 손이 부끄러워 깊이 감추고 있는 사람
에게 닿는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그
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유일한 목적이
다. 이것이 사나 죽으나 예수의 유일한 위로이다!

모든 공간을 합해 보라. 모든 시간을 더해 보라. 이 말보다 광활할 수 있겠
으며, 이 말보다 장구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모든 무게를 더한 것보다도 무
거운 것이며, 이 글은 모든 보화를 모은 것보다도 고귀한 것이다.



죄인의 명함(딤전 1:15)

나는 아직 한번도 내 이름 석자를 박은 명함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
다. 별로 소개할 내용이 없는 명함을 가진다는 것이 괜스레 멋쩍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명함을 요구할 때면 뭐라 변명할 수 없어 대
충 쓴웃음으로 때우고 만다. 게다가 나에게 상대방이 자기의 명함을 건네주기
라도 하면 미안함은 더욱 가중된다. 명함을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런 사
람이기에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구나 하는 것이다. 만일에... 정말로 만일에
누군가가 당신의 손에 쥐어준 명함을 펴보니 그의 이름과 함께 사기, 파손,
절도, 폭행, 살인미수 이와 같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전과 10범의 사실이 빨
간색 글씨로 그 작은 공간을 뒤덮고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
겠는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내밀고 있는 것은 빨간색 글씨에 굵은 밑줄까지 근
것 같은 명함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딤전
1:13). 불가피하게 자신의 불량한 과거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라서 완곡하
게 한 단어로 슬쩍 얼버무리고 지나가기만 했어도 우리는 그를 솔직하고 진실
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구태여 여러 말을 보태고 보태 자신의 부
끄러운 옛 삶을 바닥까지 들춰낸다면 그것은 이미 솔직함이고 뭐고 다 떠나
서 미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말이 끝났으리라 싶었더니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마디 최악의 단어를 덧붙인다면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
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명함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
니라" (딤전 1:15)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스스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
다. 이것은 빨간색 글씨 아래 굵은 밑줄을 긋고 그 주위에 초록색 형광 펜을
휘두른 격이 아닌가.

그것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명함을 내준 대상이 아들처럼 사랑하여 (딤전
1:2) 사역을 맡긴 (딤전 1:3) 나이 어린 제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 (딤전
4:12) 우리는 저절로 아연해지고 만다. 아비가 아들에게 영광스럽던 과거를
과시하고, 선생이 제자에게 찬란하던 지난날을 드러내며, 선배가 후배에게 용
맹스럽던 옛일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아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과거
를 감추려는 것이 아비이며, 제자에게는 부끄러운 지난날을 숨기려는 것이 선
생이며, 후배에게는 비겁하던 옛일을 덮어두려는 것이 선배이다. 그런데 어찌
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초라하다 못해 비참한
과거를 디모데에게, 아니 만방에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털어놓
는 것인가.

성경은 우리 앞에 온갖 죄인들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보석이 빛나고 백과
가 맺히는 태초의 낙원을 맡기신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린 아담, 죽음의 홍수
후에 생명처럼 얻은 포도로 담근 술에 취해 자식들 면전에서 벌거벗는 실수
를 저지른 노아,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두 번씩이나 똑같은 짓을 하며 아내까
지 공녀로 팔아 넘긴 거짓말의 대명사 아브라함, 형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 뻔뻔스럽게 팥죽과 양털로 마음을 칠하고 피부를 도배한 사기꾼
야곱, 얼마나 심한 욕정에 사로잡혔으면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도장과 허리띠
와 지팡이까지 약조물로 주며 쾌락을 즐겼던 유다, 남의 아리따운 아내를 빼
앗고 그 충성스런 남편까지 전쟁터에 몰아넣어 죽이는 무서운 간계를 꾸민 다
윗,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던 호언장담도 일순간에 내던진
베드로... 이것이 모든 시간을 차지하고 모든 공간을 넘나드는 종교가 자신
의 경전으로 자랑하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명함이
다. 왜 기독교는 구역질나는 인물들을 만방에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
에게 털어놓는 것인가.

그것은 사도 바울이나 성경의 인물들이나 세상의 누구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오직 한 가지
의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었던 것
을 숨기지도 않지만,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된 것을 감추지도 않는다.
우습게도 그들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이 드니 이제 나도 명함을 하나 만들어
볼까.



시작의 연속 (딤전 1:16)

조병수 교수/합신 신약신학


시작은 연속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이든지 시작으로만 끝나는 것은 최소한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그것은 단회적인 발생으로서 그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시간에 아무런 연속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은 메마른 땅에 떨
어지는 한 두 방울 비와 같은 것이라 기억되기도 어렵고 또 기억해야 할 이유
도 없다. 시작은 미래적인 연속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만일에 어떤 일이
시작되어 아주 먼 미래까지 힘있게 계속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가치를 가진
다. 그런 시작은 한참이나 흘러도 물살이 약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물을 펑
펑 쏟아내는 샘물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
을 것이다. 시작은 종말론적인 연속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무엇인가가
시작된 이후로 주님의 날까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되는 사건이 있다면
그런 것을 가리켜 생수의 강 물 같은 것이라고 부르며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의 시간 저편에서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긍휼을 입은 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역사에서 하나의 사
건에 불과하다. 그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에 주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사람
은 한 두 명이 아니다. 하지만 주님의 긍휼이 사도 바울에게 임한 사건은 지
나가는 구름에서 어쩌다가 한 두 방울 떨어져 메마른 땅의 가장 작은 부분도
적시지 못하고 만 빗방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이 긍휼을 입은 것
은 이렇게 무의미한 단회적인 사건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특히 "예
수 그리스도께서 첫째인 나에게 (NASB: in me as the foremost; Luther: an
mir als erstem) 전적인 인내를 보이셨다"는 사도 바울 자신의 말을 정확하
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다. 문맥으로 볼 때 "첫째"라는 말은 바로 앞 절에
나온 "죄인 중에 첫째" (개역성경에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에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죄인들 가운데 가장 극악한 사도
바울에게도 주님께서 전적인 인내를 보이셨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을
그냥 바로 이 구절에서만 해석하면 장래에 주님을 믿을 사람들에 대하여 첫
째 사람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주님의 긍휼을
입은 사건은 무의미한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긍휼히 여기신 이유는 "장차 주님을 믿을 사람들의 본
본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긍휼이 사도 바울에게 임한 사건은
미래적인 연속성을 넘어 틀림없이 (!) 종말론적인 연속성을 가진다. 그 이전
에도 그와 동시대에도 주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닌 것은 분
명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장차 주님을 믿을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
는 첫째 인물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로서 죄
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인 인내를 보이시는 일에서 자신을 시
작점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시작점으
로 하여 장차 주님을 믿어 영생을 얻을 사람들에게 전적인 인내를 보이신다.
주님의 은혜는 아무리 흘러도 물살이 약해지지 않는 강일 뿐 아니라 흐르면
흐를수록 넓어지고 깊어지고 많아지는 생수의 강이다. 주님의 은혜는 사도 바
울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전진하여 온 땅에
충만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에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주
님의 긍휼을 입은 첫 번째 사람이라면 오늘 우리는 억만 번째 사람일 것이
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시작은 우리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뒤에 또 다른 연속이 있을 것을 믿는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억
만 번째 연속이지만 동시에 우리 뒤에는 우리의 억만 번째 연속이 있을 것이
다.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 이 연속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역사의 저편에서 이 모든 연속은 위대한 사건으로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
다. 주님의 시작은 반드시 연속된다.


이제는 알겠다
(딤전 1:17)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물 속은 끈적거렸다. 허우적거리는 몸에 젖은 옷이 달라붙어 맘대로 손발
을 놀릴 수가 없었다. 가슴에 들어있던 마지막 산소까지 타버리고 몇 번이나
흙탕물을 들이키며 죽음이란 이렇게 오는 것이로구나 느끼는 최후의 의식 앞
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뱃속에 가득하
던 더러운 물을 토해내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
러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더 분명하게 의식이 돌아왔을 때 좌우에 위
엄스러운 의관을 갖춘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고 앞에는 영광의 왕께서 보좌에
앉아있고 그 곁에는 머리가 물에 젖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왕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부드럽게 일러주었다. "그대
를 살려내기 위해 왕자님께서 몸소 깊은 죽음의 물 속으로 뛰어들으셨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위 끊어진 활처럼 튀어 땅에 엎드려 왕께 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가 나를 물 속에서 끌어냈더라도 그 주인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을텐데,
노예가 나를 물 속에서 건져냈더라도 그 주인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을텐
데... 왕자께서 친히 물 속에 뛰어들어 나를 살려내셨다니 어찌 왕께 절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말하던 사도 바울이 갑자기 하나님께
찬송을 쏟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며 죄인 중에 괴
수인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살려내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은혜 앞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토해내고 있
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사망의 깊은 물 속에
서 구원받고 문득 눈을 들어보니 왕이신 하나님께서 앞에 계신 것이 보였던
것이다. 사람의 몸을 가진 왕에게도 구원의 감격을 표현한다면 하물며 어찌
영원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께 구원의 감격을 토로하지 않으랴. 시간적으로는
하나님은 만세의 왕이시며, 질적으로는 썩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형태에 있
어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수효에 있어서 단일하신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몸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며 죄
인 중의 괴수인 사람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가
장 비참한 존재를 상대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낮은 인격이 가장 높은 인격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최대의 마이너스가 최대의 플러스 앞에 서있는 것이
다.

제일 차가운 얼음이라도 제일 뜨거운 불 앞에서는 순식간에 녹아 내릴 수밖
에 없듯이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인간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
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찬송밖에 없다. 찬송은 강제도 아
니며 억지도 아니다. 찬송은 단순히 구원의 감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엄
밀하게 말해서 구원의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엄에 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을 넘어 하나님의 존엄에 관한 인식이 있기까지는 어떤
것도 찬송이 될 수가 없다. 존엄하신 하나님이 구원받은 인간을 상대하고 있
다는 인식이 찬송의 시작이다. 그래서 찬송은 소리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찬송은 소리 이전의 것이다. 찬송은 발성보다도 앞서는 것이며 노래보다도 앞
서는 것이다. 찬송은 모든 방면에서 음악의 차원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찬송은 어떤 방식으
로 표현되든지 간에 이미 찬송이 아니다. 찬송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
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나를 상대하고 있다는 의식에
서 출발하며 진행되며 종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우리를 상대하고 있는
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제는 알겠다. 정말 이제야 알겠다. 사망의 물 속에서 끌려나와 정신을 차
리고 보니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계시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것만
도 찬송해야 할 터인데, 앞으로는 지존하신 하나님이 상대해주시는 가운데 살
게되었으니 얼마나 더 찬송해야 할 것인가.

싸움, 그러나 선한 싸움 (딤전 1:18-19a)

조병수(합신 신약신학)

나는 어릴 때부터 별로 싸워본 적이 없다. 괜히 누가 시비라도 걸면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슬슬 피해버리는 겁쟁이였다. 지금도 누구하고 말싸움이라도
할 모양이면 벌써 간이 콩알만해지고 목소리가 모기소리만큼 줄어들고 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싸움대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적이
있다.

어느 날 또래친구로서 동네에서 정말 싸움대장으로 이름난 중봉이와 시비가
붙어 서로 부둥켜안고 언덕 아래로 구르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 손을 뻗친
것이 정확하게 그 녀석의 콧등에 맞아 코피를 쏟게 만들었다. 그때 주위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나를 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생각만 해
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만히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싸움이었다. 비록 욕질하
고 주먹질하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고비마다 단락마다 숨이 멈추고 간이 떨어
질 정도로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어도 사도 바울의 인생만큼 처절한 싸움이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까지 사도 바울의 인생은
형언할 수 없는 싸움 속에 있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았던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와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섰을 때 다시는 지
나간 세월의 싸움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선한 싸움을 하였다 (딤후 4:7).

이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사도 바울의 인생이 싸움이었듯이 디모데의 인생도 싸움일 수밖
에 없고 그처럼 우리의 인생도 싸움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싸워야 했듯
이 디모데도 싸워야 하며 그렇게 우리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것이 무슨 싸움이냐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불렀다. 이 "선한"이라는 한 마디의
작은 수식어 속에는 엄청난 내용이 함유되어 있다 (디모데전서에만 이 단어
가 자그마치 16번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라).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그것은 세상사람의 추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지시하며, 하나님의 요구와
는 질적으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선한 싸움이란 세상사람은 내심 멀리하지
만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권면하면서 아울러 방법도
제시하였다. 그것은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가진다.

첫째로 선한 싸움은 예언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 언급된 예언이 신
비적인 성령은사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직분적인 성경해설을 가리키는지 분명
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이
다. 선한 싸움은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과 관련된 것
이 아니다. 선한 싸움은 영적인 것이다. 물질이든 육체든 세상이든 무엇이나
하나님을 위한 일에 관련되면 그것은 이미 영적인 일이 된다.

둘째로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도구로 삼아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
과의 관계이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가 선한 싸움을 싸운다. 양심은 사람과 관련
된다. 양심은 사람 앞에 서는 것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보
기에 정직한 자가 선한 싸움을 싸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지 않은 자나
사람이 보기에 정직하지 않은 자는 선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양심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믿음과 양심
가운데 어느 한 가지든지 결여되면 선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모든 인생은 싸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선한 싸움이다. 사도
바울처럼 디모데가 선한 싸움을 싸웠듯이, 디모데처럼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
워야 한다. 나는 지금 다시 한번 굳게 결심한다. 어릴 적부터 싸움이라면 지
레 겁을 먹고 도망하던 사람이지만 이 선한 싸움만큼은 용기를 내서 참여하리
라고.


신자의 방정식 (딤전 1:19b)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만사에 법칙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에도 법칙이 있고, 물질적인 세계에서처럼 영적인 세계에도 법칙이 있으며,
세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것에도 법칙이 있다. 법칙이 깨지면 만사
가 깨진다. 신자의 삶에도 엄격한 법칙이 있다. 신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아
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분명한 법칙을 따라서 산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양심을 가져
야 한다고 말했을 때 믿음과 양심은 선한 싸움을 위한 법칙이 된다는 것을 알
려준 것이다. 믿음은 수직적인 성격을 가진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양심은 수평적인 성격을 가진다. 양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직적인 성격의 믿음과 수평적
인 성격의 양심이 잘 어우러질 때 그리스도인은 선한 싸움을 싸울 수가 있
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좋은데 사람에 대한 양심이 좋지 않다거나, 사람
에 대한 양심은 좋은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선
한 싸움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믿음과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싸움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들이다. 마
치 수직선과 수평선이 십자로 만나면서 한 점을 결정하듯이, 믿음과 양심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생이 결정된다. 믿음과 양심은 그리
스도인의 인생 방정식의 두 차원이다. 그래서 믿음과 양심 가운데 어느 하나
라도 제외시키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생은 성립될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수직없는 수평이 되거나 수평없는 수직이 되고
만다. 양심을 무시하고 신앙만을 강조하는 것은 과도한 경건이며, 신앙을 무
시하고 양심만을 강조하는 것은 부족한 경건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너무나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람에 대한 양심을 무시하거나, 사
람에 대한 양심을 유별나게 강조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시들어버린 사
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신자의 법칙을 기형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도한 경건도 문제이며 부족한 경건도 문제가 되지만 이보다 더 심
각한 것은 파괴된 경건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양심이 조화된
신자의 삶을 권면하는 시간에 경건을 파괴해버리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발
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요소인 믿음과 양심을 한꺼번에 망가뜨렸던 것이다.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9b).

한편으로 그들은 양심을 버렸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끄러운 일을 해
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해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들
은 그런 일에 대하여 무감각하였을 뿐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을 정당하고 당연
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사전에는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이
란 단어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우습고 가벼운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하나
님을 믿는 일을 거부하기 위하여 온 몸을 부딪혀 깨어졌던 것이다. 이런 사람
들에게는 신앙인의 법칙이란 것이 아무런 중요성이 없었다. 우리의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이 언젠가 잠시 기독교 신앙에 접근했다가 도리어 양심과 믿음에
서 파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을 버리는 언어를 말하는
것과 믿음에서 파선한 행위를 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조금 맛보았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당한 반작용인 것처럼 생각한다.

믿음과 양심은 신자의 삶을 위한 엄격한 법칙이다. 믿음과 양심의 교차는
신자의 방정식이다. 믿음과 양심의 조화로 결정되는 삶이 우리를 안전하게 항
구로 인도한다. 우리는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려면 신앙의 수직 차원과 양심
의 수평 차원을 행로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폭
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파선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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