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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우리끼리만 믿는다?』
2003-09-10 03:40:01   read : 41972






△ 선대에 물어보면 너무나 답이 명확하게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선대를 극복해야할 대상으로만 잘못 알고 있다. 사진은 할미꽃. 경주에서 찍었다. jeon jeong heeⓒ


그들은 선교사가 아니다,비즈니스맨이다?

이 지구상에 우리나라 선교사님들이 나가 있지 않은 국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화기 때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것이 불과 1세기가 좀 넘었을 뿐인데 이제 그 땅에 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음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기뻐하신다」(사무엘상 15:22∼23)고 하셨는데 우리 믿음의 선대가 그러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성장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제가 「한국선교사의 시대」라는 기획취재를 하면서 파송선교사의 면면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의 선교사님들은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셨고 그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에베소서 5:25∼27)는 말씀 하나로 오지에서의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선교사 1세대들은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그들의 헌신을 통해 받은 것만큼 베풀고자 고난의 길을 택했다고 봅니다. 제가 인도에서 만난 한 선교사님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었어도 선뜻 고국으로 돌아오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후 평생을 그곳에서 선교사로 사셨으니 몸의 고향이 바뀌신 듯 합니다. 육신은 영혼의 허망한 처소라고 본다면 인도의 가난한 영혼들을 놔두고 돌아오시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보화된 지구촌 현실에서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자임을 밝히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슬람권과 사회주의권 국가에 나가 계시는 분들이십니다. 그 분들은 자신의 선교 활동이 드러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해당 국가에서 신분이 탄로날 경우 곧바로 쫓겨나거나 박해를 받기 때문이지요.

이런 분들은 부득이 기업인이나 교육자 그것도 아니면 학생 등의 신분으로 자신을 가리고 선교를 합니다. 베트남의 선교사님들의 선교 현장을 취재했을 때 우리는 마치 비밀결사처럼 이동을 하곤 했습니다. 봉고차량으로 가정교회 정문 앞까지 밀착해 차를 댄 다음 발소리를 죽여 스며 둔 후 집회를 갖습니다. 이른바 가정교회이지요.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의 신분은 서로의 안전을 위해 철저히 확인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이러한 박해 속에 예수를 믿으니 성도들의 기도는 뜨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900년 초만 해도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바로 이같은 방식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한국상고사의 대가 최태영(102세·전 서울법대 교수) 선생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온 천주교는 엄청난 순교자를 내면서 이 땅에 들어왔다. 그건 전적으로 천주교의 문젯거리이다. 종교적 입장에서 정정당당히 죽을 셈치고 선교하든지 아니면 외교적으로 개방을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서양인이 상제 복색을 하고 상립을 쓰고 한국 가정 안방에 숨어 들어옴으로써 한국인을 그렇게 많이 죽게 한 것은 의문거리 처사였다.

개신교의 앨런과 언더우드,아펜젤러는 상하이와 일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들어왔다. 새로운 문물을 갈구하던 개화당의 갑신정변이 나던 때 바로 이들이 유입된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 '서양인만이 믿는다'는 약조를 하고 들어왔다. 앨런은 실상 목사인데 의사로 왔고,헐버트는 처음엔 교육자로 왔다. 선교사들은 '우린 교육만 한다. 기독교는 우리끼리만 믿는다'고 했다.」


어쨌든 당대를 체험한 노학자의 기록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료,교육 등을 통해 포교를 했던 게 기독교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열교(裂敎·기독교)의 노하우는 천주교의 순교를 교훈 삼았음에 분명합니다.

저는 당시 기독교의 이같은 선교 정책이 현명하다고 믿습니다.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숭배 대상을 깨뜨리려는 외부의 간섭을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반발을 가져오는 방식의 선교는 불신과 증오만 낳을 뿐입니다.

최근 한신대 신학연구소가 기독교의 선교 방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지하철 안이나 노상에서 외치는 전도에 대해 개신교 신자를 포함한 응답자의 70% 이상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의는 백번 이해하나 그 전도 대상에게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만 주었다고 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슬람,사회주의 국가에서 비지니스맨처럼 활동하는 선교 방식을 택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형식이나 자구 하나에 매달려 양들을 쫓아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미 100년 전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본보기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린도전서 11:1)고 하였습니다.

경주에 갔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할미꽃을 보면서 갑자기 최태영 선생의 회고록 한 문장이 떠올라 이렇게 두서없이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 목사님들께 ****

주안에서 문안 드립니다.
요즘 세상에 비춰지는
우리 기독교의
얼굴 모습은 참으로 비통하다
못해노염으로
성도들앞에........(?)

먼저 저는 목사님들께서 변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우리교회는 모진 고통 속에서도 눈물로
지금껏 오시지 않으셨읍니까?
근데 어찌 물질과 여자 문제로 먹칠들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교파를 없에고, 단일로 합하여 정말로
성도들을 찿아, 복음을 전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보다도 낳다고 보십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2천만 기독교의 얼굴 모습들이란 말씀입니까?
금년 남은 기간이라도 참회의 모습을 성도들 앞에 바로 보이시고, 바로 인도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 성도들에게 비치는 모습....
부흥성회나 집회 등으로 인한 (사료비)는 받지 맙시다.
받으실수 있는 것은 숙식(이것도 가볍게 그곳 목회자님의 생활과 함께)정도로 하시고, 사례비는 받지 맙시다.
정 사례비르 드리고 싶다면, 그 교회를 찿아 문안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나 성도들이 보기에도 가장 좋을듯 싶습니다.
복음 전도로 가시므로 오히려 그 곳 교회를 도와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제발, 교회와 말씀, 그리고 성도들만 생각 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송 합니다. (제 심정을 해아려 주시면 감사 하겠읍니다.)

그리고, 현체제의 교회 제도를 고치시여, 큰교회 큰성도의 교회보담 200명 내지는 500명선의 교회로 하였으면 합니다.
이유는 교회 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 따르는 잡음이 교회 성도드ㅜㄹ로 부터 나오고 있읍니다.
교통 문제와 주차 문제,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 목사님과 성도의 교제, 한해에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 되는데 이분들이 설 자리 가 침략 당하고 있읍니다.
이로 인한 폐해는 당화ㅣ 목사님은 성도들의 보기에 보이지 않는 권위 주의로 흐르는 모습....
또한 이분들을 마냥 모 교회에 전도사로 또는 부목사로 몇 분씩이나 고용을 해야 하는 지요....?

저는 교회나 목사님 그리고 성도들의 하나 가 되는 그 길은 적게 가족적인 분위 기로(200 ㅡ 500명 이내)하여, 참된 예배와 은혜로 함께 하시그를 원합니다.
교회를 새우는데도 각자 임의 새울 것이 아니라,
이단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지역 노회 가 협력 하여 총회의 제가를 얻거나, 총회에서 파송(목화자, 반주, 성가대원, 주일학교 교사,등을 구성 하여)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보고 싶읍니다.
교파를 타파 하고 하나로 새워 주실 것도 원 합니다. 죄송 합니다.

<국민일보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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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받은 헌금(?)
송태근 | 강남교회 담임목사

목회 현장에서 늘 설교와 씨름하는 목회자의 한사람으로서 빠지기 쉬운 설교의 함정을 겪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 다양한 동기와 접근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청중의 형편 속에서, 그들을 향한 초점을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물과 고난 속에서 그들이 부딪치는 절망을 보면서 성육화된 설교의 접근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듯이 우리 목회자들의 설교도 더욱 성육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그러한 실제적인 삶의 문제는 뒤로한 채, 개 교회에 대한 헌신을 말하고 무리한 비전만을 외친다면 과연 그 설교가 청중들의 삶에 구체적인 적용으로 다가 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마가복음 12장 41~44절의 말씀을 통해 한 예를 살펴보자. 이 말씀은 한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헌신으로 잘 알려진 본문이다.
본문의 요지는 부자도 많은 헌금을 했고 또 가난한 과부도 자신이 갖고 있는 두 닢을 다 드렸다.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요, 표현대로라면 구차한 중에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이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봐라! 하물며 부자들과 다른 성도들은 도대체 뭐하는 거냐”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부자들이 전부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차원에서 이 본문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가난한 과부는 구차한 중에 예물을 다 드렸다. 본문에서 ‘구차하다’라는 말은 헬라말로 ‘절대 결핍’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과부는 자신이 드린 헌금이 전 재산인데 이것을 다 드렸기 때문에 이제 당장 끼니가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뜻한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예증을 하실 때 “그거 봐라 절대 결핍 상태에 있었고 이 헌금을 드린 다음에는 끼니도 먹을 게 없는 이런 구차한 여자이지만 그리고 절대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되는 과부이지만 다 드렸지 않느냐 그러니까 우리도 드려야 된다”라는 것에 메시지의 초점이 있을까?

그러나 마가복음 전체를 보면 오늘 이 내용은 과부에 대한 칭찬에 초점이 있는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 부자들이 다 드리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이 본문에 앞서서 40절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이 지적 후에 예수님께서 실례를 든 것이 바로 과부의 헌금 내용이다. 여기에서 ‘저희’는 누구인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상속 문제나 남편을 잃은 과부들에 대한 유산문제들을 법적으로 처리하는 변호사 일까지 담당하고 있었는데 사건을 많이 수주 받아야 물질을 많이 챙기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그러한 가정의 문제를 맡길 종교지도자들을 선정할 때 그 기준을 길게 기도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선임된 종교지도자들은 가능한 과부들의 재산을 삼키는 경우가 매우 흔한 일이었고 돈에 취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실증을 하나 드는데 그것이 과부의 헌금이다.

필자는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분이라고 생각하질 않는다. 신명기(26:12 참조)에 보면 과부는 법률에도 다음과 같이 보호받도록 되어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놀랍게도 십일조를 통해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레위지파 사람들만 아니라 과부와 고아와 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이 여인은 이제 두 닢이 전부다. 그리고 구차한 중에 헌금을 드렸다. ‘구차한’이라는 것은 절대 결핍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을 드리고 나면 당장 오늘 저녁부터 먹을 게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감격을 하셔서 ‘놀랍다 이 믿음 당신들도 좀 본 받아라’라는 식으로 얘기하기 위해서 과연 이 본문을 기록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이 본문의 초점은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도 아니고, 전부를 다 드리지 못한 부자에 대한 경고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부의 이 상황을 다 드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작위적으로 몰아간 종교지도자들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부의 눈물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개 교회 중심의 필요에서 접근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상을 기록한 ‘미두낫’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한 과부가 돈도 없고 드릴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움큼이 전부인데 이것이라도 가져와 하나님 앞에 드리려하자 제사장 하나가 그 과부를 향해 쏘아붙이기를 “이걸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라고 드렸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와 같이 억지로 헌신을 하게 만들고 작위적으로 신앙생활을 강조한 일들이 그 당시에 비일비재했다.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죄들이었다. 그래서 멸시하고 무시하니까 이 과부는 이거 드리고 나면 오늘 저녁부터 굶어야 되는데도‘구차한’ 중에 드린 것이다. 절대 결핍상태에서 말이다.

최근 어느 교회에 있었던 한 미망인과 관련된 감동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 주인공의 남편이 평소 입버릇처럼 무슨 얘기를 했는가 하면 ‘나는 죽으면 내 재산 다 하나님 앞에 바칠 거야’ 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일찍 돌아 가셨다. 아직 미망인은 젊고 아이들은 어린 상태였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자가 먹고 살아야 되는데 남편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걸 다 드리고 나면 자식들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것이다. 그 남편이 남기고 간 재산은 칠천만 원하는 가게 등기 권리증이 전부였다. 그것도 그 가게에 자기가 무슨 영업을 하는 게 아니고 이천오백만 원에 세를 줘서 그 이천오백만 원으로 자기는 윌세방을 얻고 오십만 원씩 월세를 지급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죽은 남편의 말 때문에 몇 날 몇 일을 갈등하다가, 이 미망인이 안 되겠다 싶어 가게 등기 권리증하고 전세 보증금 이천오백만 원, 그리고 나머지 전부를 털어 교회로 가지고 온 것이다.

남편이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담임목사님이 이 헌금을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이 헌금을 받았다. 받으려고 받은 게 아니고 이 성도가 완강해서 받은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이 당회를 열었다. 그 교회는 재정 원칙이 매월 백만 원만 남겨 두고는 전부 지출하는 게 원칙인 교회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 교회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의논을 해서 “이 헌금은 아무개 미망인이 이렇게 남편 죽은 다음에 이런 사연 때문에 이렇게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우리가 이것은 일단 받고 오늘을 넘기지 말고 바로 집행을 합시다.” 그리고 집행 대상자가 바로 그 과부가 되었다. 그 여자에게 이것을 구제금 항목으로 그대로 집행한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하고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 예수님처럼 육화된 관점의 목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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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인격으로 무장한 설교
<정필도 목사>

설교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대학 교수는 같은 원고를 가지고 매년 새로운 학생들에게 가르치므로 여유 있게 강의안을 발전시켜 나갈수 있다. 그러나 목사는 한 교회에서 같은 성도들에게 매번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하므로 설교준비에 대한 부담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다.
설교에는 지식의 밑받침도 있어야 하고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기교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다.

어떤 교역자들의 모임에서, 소그룹 성경공부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던 중에 장소 문제, 시간문제, 인원수문제, 교재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결론은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교역자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렇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인 것이다.
특히 설교는 신앙과 인격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 특히 담임교역자의 설교를 들을 때 그 교역자의 신앙과 인격에 대한 선입관이 있다.

신앙과 인격이 훌륭한 교역자의 설교를 들을 때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무게가 있게 들리고 큰 감화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과 인격에 문제가 있는 교역자의 설교를 들을 때는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자꾸만 그의 인간적인 결점을 생각하게 되므로 비판만 하게 되고 은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교역자에게 필요한 것은 생활로 보여 주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설교를 하면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교역자 자신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설교한다면, 이것은 도둑놈이 아들

에게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과 같으니 은혜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기도에 관한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교역자자신이 평소에 뜨겁게 기도 생활을 하면 기도에 관한 특별한 설교를 하지 않아도 교회 안에는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자연히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에 관한 명 설교를 해도 교역자 자신이 기도하지 아니하면 그 교회는 기도의 불이 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과 동시에 교역자 자신이 그 본문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전하되 특히 본인이 깨달은 교훈을 잘 정리해서 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본인이 살면서 얻은 교훈을 간증하는 내용까지 포함할 수 있다면, 청중은 큰 감동을 받고 즉시 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설교는
① 잘 알아듣고 잘 깨닫게 해주는 설교이다.
② 큰 감화를 받아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해주는 설교이다.
③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악마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충성하는 일꾼으로 만드는 설교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 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한 교회에서 수십년씩 목회를 했어도 교회가 질적 양적 성장이 안되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설교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항상 좋은 설교가 전달되면 교인들의 변화가 빠르고 자연히 교회 성장도 그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무엇보다도 설교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설교를 위해서는 신앙과 인격의 무장이 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필자는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설교 자료의 수집과 정리
필자는 주일 대예배 외에는 강해 설교를 해보려고 힘써 왔었다. 그러나 지나간 몇 년 전부터는 주일 대예배 시간에도 마태복음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강해 설교를 하고 있다. 지금은 요한복음 1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강해 설교를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무슨 설교를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언제나 본문은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그 본문 말씀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전할메시지가 없을 때이다. 그러므로 우선 성경의 어떤 책을 가지고 강해를하려고 하면 우선 좋은 책을 준비해야 한다. 좋은 주석과 강해집이 준비되어 있어서 충분히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필자의 경우는 밥은 못 먹어도 책은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약 일만 권의 책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분별력이 없어서 아무 것이나 사 들였으나 이제는 책을 충분히 살핀 후에야 산다. 그리고 모든 자료를 60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보관하고 설교집은 본문별로 정리하여 아무때든지 참조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특히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도 성경 본문별로 보관해서 언제든지 들어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교역자는 누구보다도 많이 듣고 보고 배워야 한다. 마치 좋은 젖이 넉넉히 나오게 하려면 먼저 영양 있는 음식을 잘 먹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역자들에게 당부하고싶은 말은 충성을 다해서 열심히 뛰라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자가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빨리 큰다. "

강해설교의 예
필자가 출애굽기 3장 1-12절의 말씀으로 강해 설교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간단히 그 방법을 서술하려 한다.
먼저 본문 말씀을 여러번 읽는다. 그리고 나서 본문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 본문의 내용은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되 반드시 적당한 일꾼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인물인가? 40년 동안 애굽 왕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다(행7:22). 그뿐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면서 영적으로 준비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 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영력을 키웠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 준비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광야 대학에서 영력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 : 그 다음에는 본문 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창세기 15장 13 ∼1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오십년을 보내다가 그 후에 큰 재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때가 된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이 때를 알고 행하면 성공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때가 안되었을 때는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괼요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실 때 언제나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결코 그 언약을 어기시는 법이 없으신 것이다. 신·구약성경을 보라! 한가지라도 틀린 적이 있는가? 앞으로도 반드시 그 언약의 말씀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떨기나무의 불 : 그 다음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떨기나무의 불이다. 이 불은 타지 않는 불 이였다. 여기에서 이 불이 세상의 불과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알려 주는 표적(sign)인 것이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실 때에도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이 불이 곧성령은 아니다. 다만 성령이 임재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불 자체가 성령인 줄 알고무조건 불 받겠다고 하다가 미혹의 영을 받고폐인이 되는 자가 있다.

거룩한 땅 :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미디안광야가 거룩한 땅인가? 성경에 '거룩'이란 말이 쓰여진 용도를 보면
① 하나님께 쓰여졌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② 그 자체는 거룩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속한 것을 거룩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성전, 성구, 성직, 성일(聖日) ‥‥
③ 하나님이 임하신 곳은 거룩하다고 했다. 땅 자체는 거룩하지 않으나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순간 거룩한 땅이 된 것이다. 성전도 성령이 임하실 때 거룩한 성전이 되는것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을 모심으로 거룩한 몸이 되는 것이다.
④ 하나님께 드려질 때 거룩하다고 했다. 스가랴 14장21절에 보면 제사 드리기 위해서 사용되는 솥을 성물(聖物)이라고 했다. 우리의몸도 하나님을 위해 바칠 때 거룩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롬12:1).

신을 벗는 것 : 그리고 신을 벗으라고 하셨는데 이 뜻을 알려면 룻기 4장을 보아야 한다. 거기에 보면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이 그권한을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넘겨 주면서 신을 벗어 주겠다고 했다. 여기서 '신을 벗는 것'은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양도한다는 의미가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무엇보다도 모든권한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양도해야 한다는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이다.
모든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께 양도할 때 꺼떤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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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풀어주는 삶의 매듭-
<김만풍>


갈등이나 스트레스 혹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간호하고 부양하고 치료하여 회복시키고 성장케 해 주는 일은 교회가 세워진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러나 목회상담이 실천신학 분야의 한 학문으로 정립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서구와 한국교회 목회상담 역사를 간략히 살피고. 목회상담의 기능과 목표와 성경적 기초를 정리해 본 다음에.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상담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국내외 목회상담 역사
미국에서 현대 목회상담의 필요성을 처음 강조하기 시작한 사람은 보이슨 (Anton T. Boisen, 1876-1965)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기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세 차례에 걸쳐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1925년에 그는 미국 메사추세츠주 우스터 주립병원의 원목으로 일하면서 신학생들을 데려다가 3개월씩 환자들을 돌보는 실습을 하게 하였다.

보이슨은 단순히 교실 수업만 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직접 대면하여 실습까지 겸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교육이라고 생각하였다. 자기 자신이 환자로서 입원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환자에게 실제로 필요한 도움을 줄 사람이 얼마나 요청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의과대학생들이 환자들을 직접 대하여 실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속한 방법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이리하여 임상목회 교육운동 (Clinical Pastoral Education Movement)이 한 의료모델 (Medical Model)로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보이슨의 이 일은 1930년에 임상훈련회의 (Council of Clinical Training)탄생시켰고 그의 방법론은 곧 미국의 수 많은 신학교 커리율럼에 포함되었다.

이 분야의 또 다른 개척자들로는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원목 딕스 (Russel L. Dicks)와 원장 캐봇 (Richard C. Cabot)이 있다. 딕스 자신의 입원 수술 경험은 그에게 인간의 필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통과의 싸움. 개인적인 의심. 염려. 두려움. 마취에 대한 공포심. 단조로운 병원 생활의 착잡함. 여러 의사들과 간호원들의 서로 다른 태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였다.

이러한 현대 목회상담의 개척자들 명단에는 또한 와이스 (Carrol A. Wise)와 힐트너 (Swrd Hln.er) 죤슨 (Paul Johnson) 오우츠 (Wye E. Ots) 홀먼 (Charles Hlan) 등이 포함된다.
영국에서는 1935년에 웨더헤드 (Leslie Weatherhead) 심리학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는 일에 두각을 나타내였다. 그는 정신과 의사의 치료와 동시에 목회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런던에 한 진료소를 세워 운영하였다.

오늘날 목회상담은 세계의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가르치고 있다. 한국내의 신학교들에서도 목회상담을 학과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다.
국내 신학교들은 상담학을 전공한 실천신학자들을 외국에서 초빙하여 특강을 들으면서 목회상담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 교수와 학생들이 목회상담을 전공하기 위해 구미로 유학을 하기도 했다. 그 중에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가 하나 둘 늘고 있다. 현재 목회상담을 전공하고 있는 해외 유학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추세여서 머지 않아 그 영향이 한국교회에 미치게 되리라 기대된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목회상담은 서구의 그것에 비해 학문적으로 정립이 되지 못하였고 또 서론 성도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외국의 양서들이 번역되고 국내의 저작자들이 책을 내면서 일반 교인들에게까지도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목회상담을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들 가운데서는 개인적으로 연구하여 좋은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음을 본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목회상담이 절실히 요청될 것을 감안할 때 하루속히 양질의 목회상담자를 길러낼 필요를 느낀다.

목회상담의 기능
그렇다면 목회상담의 기능은 무엇이겠는가. 클렙쉬와 제이클 (W. A. Clebsch and C. R. Jaekle)은 목회상담의 기능을 치료와 부양. 지도와 화해로 본다. 치료는 상처로 인해 기능이 마비되거나 손상을 입은 사람을 온전케 회복시키거나 현재의 상태에서 앞으로 더 발전해 나아가게 하여 장상적인 기능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부양은 상처를 받은 사람 혹은 위기에 처한 사람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거나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뜻한다.
지도는 위기나 복잡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서 현재와 미래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생각과 행동을 취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을 말한다.
화해는 내담자 자신이나 이웃과의 관계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거나 손상되었을 경우 이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가리킨다.
클라인벨은 여기에 한 가지 기능을 추가하였다 (Howard Clinebell, Basic Types of Pastoral Care and Counselling, Nashville.: Abingdon, 1984, p. 26) 곧 양육이 그것이다. 양육은 내담자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온전한 인격적 성장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상담은 내담자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목회상담을 통해 교인들을 돕는 시기를 놓고 볼 때 예방상담과 개입상담과 후속상담으로 구별할 수 있다.

예방상담 (Prevention)은 교인들이 아직 위기에 처하거나 문제에 부딪히거나 상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가능성이 있는 위기나 문제나 상처들에 대해 미리 인식하고 이해하도록 해서 사전에 방지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예방상담은 교육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개입상담 (Intervention)은 이미 위기나 문제에 봉착해 있는 교인들을 앞서 말한 기능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다.

후속상담 (Postvention)은 이미 지나간 위기나 문제나 상처를 잘 마무리짓고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도록 뒤처리를 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한국교회가 특히 예방상담에 중점을 두고 아울러 개입상담과 후속상담을 균형있게 운영한다면 많은 효과를 거둘 것이다.

목회상담의 목표
여기서는 데이비스 (C. Davis, Baker Encyclopedia of Psychology, 1985, pp. 805, 806)가 제시하고 있는 목회상담의 기본적인 목표들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첫째로. 내담자를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계속 교제하게 한다.
둘째로. 내담자가 자기 자신을 바로 이해하고 처신하도록 도와준다.
셋째로. 가치관과 감정 혹은 내면적인 문제와 위기를 균형있게 파악하고 대처케 한다.
넷째로. 인간관계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도록 도와준다.
다섯째로. 성경의 자원을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시켜서 책임을 질 줄 알게 하고 바람직한 결정과 실행을 하게 하여 전인격적으로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한다.
여섯째로. 진리와 은혜 가운데서 이웃과의 화해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료와 사랑을 베풀고 용서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지는 법을 배우도록 도움을 준다.

목회상담의 목표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내담자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주위로 자기 이웃을 사랑하도록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회상담의 목표는 직접적으로는 현재의 위기나 상처나 문제점 해결에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도록 영적인 성숙을 이루게 하는 도움을 주는 데에 있다.

목회상담의 성경적 기초
목회상담의 모범을 보여주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심성을 가장 정확히 진단하시고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적용하여 내담자의 위기나 문제나 상처를 해결하여 주셨다.

따라서 목회상담의 원리는 우선 성경에 찾아야 하고 (특별계시의 원리) 또한 인간의 심성(일반 계시적 원리)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은 목회상담의 영적인 가치관과 윤리적인 지침과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해 주는 진리이다. 일반계시의 영역에서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정신의학 등은 성경이 진리를 내담자의 위기나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론을 제시해 준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창조자시요. 또한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시라면 특별계시를 통해서 주신 성경의 진리와 일반계시를 통해서 주신 학문의 방법으로 찾아낸 진리가 조화를 이루리라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상담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상담자)이 도움을 구하는 사람 (내담자)의 말을 듣고 그에게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해 줌으로써. 신뢰에 바탕을 둔 특별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한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 3:1-15의 주님과 니고데모. 그리고 4:1-42의 주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있다. 지면관계상 상설을 줄인다.

아무튼 성경은 목회상담의 기초를 이룬다. 목회상담에 직결되는 성경의 기본적인 용어 몇가지를 예로 든다면 코이노네오(교제하다, 행2:42; 갈2:9 등), 오이코도메오(덕을 세우다. 성령 안에서 신자 개개인이 교회 전체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 살전5:11; 고전13:4; 롬14:1―21; 15:1, 2; 엡4:2; 등), 파라클레오(위로하다, 안위하다, 고후1:3, 4; 요14:16; 골2:2; 4:8; 등),

누쎄테오(권면하다, 지식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정서와 의지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변화를 가져오도록 타이르고 깨우쳐 바로잡아 주는 것. 엡6:4; 행20:31; 고전4:14 ; 설전5:12, 14; 살후3:15), 파이듀오(양육하다. 교육의 한 방법으로서 성숙한 사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성숙한 태도와 가치관을 통해서 깨우치고 지도하고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

창18:1; 신12:12; 잠3:11; 13:24; 19:18, :1, 3참조. 고전11:32; 고후6:9; 갈4:1; 딤후2:25; 3:16을 보라), 디다스코 (가르치다. 설교와 권면과 대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딤전4:11; 6:2; 골3:16; 등), 오페일로 (담당하다. 의무를 지다. 로마서15:1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 그리고 갈라디아서6:2에서는 서로의 짐을 지는 것, 등) 안테코마이 (붙들어주다. 데살로니가전서5:14에서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는 것을 의미), 등이 있다.

몇 가지 제안들
이러한 것이 목회상담이라고 한다면 한국교회가 목회상담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질문은 던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된다.

먼저 한국의 신학교들에서 목회상담을 가르칠 전문적인 학자 양성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구미처럼 학교와 병원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미 시도하고 있는 병원과 학교가 있음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더욱 활발히 진척되어 정착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목회상담이 학문적인 면과 임상적인 면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지도자 양성에 힘쓸 때 큰 효과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학교에서 배출된 목회상담 지도자들은 각 지역교회에 돌아가서 어떤 형태로 목회상담을 운영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먼저 각 지역교회에서 전교인을 대상으로 1년에 적어도 한 차례 이상 예방상담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공개 프로그램에는 누구나 부담없이 참석할 것이다. 참석해 보면 개인적으로 상담을 요청할 사람도 생길 것이다. 그러한 개인상담은 누가 맡을 것인가. 목회자 혼자서 다 감당할 수는 없으므로 평신도 상담 요원을 육성해야 할 것이다. 정리한다면 한국교회가 예방에 초점을 둔 전교인 대상 공개 그룹 상담과 개인 비공개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고 또한 평신도 상담 요원들을 육성하여 급증하는 수요를 충당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교회마다 아동. 십대. 청년. 신혼부부. 중년. 장년. 노년. 등 생애의 특징있는 부분들을 세분하여 그 시기에 알맞는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정기적으로 운용한다면 바람직한 결과를 얻으리고 생각된다.
교회에는 중증환자로부터 별문제도 아닌 단순한 일로 찾아오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의 목적과 기능과 역량의 한계를 벗어난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속히 전문가에게 의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믿고 의뢰할 전문가들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한국 교회가 풀어 나아가야 할 과제들이다. 아무쪼록 한국교회가 평안하고 건강한 교인들을 바로 키우는 일과 함께 위기와 문제에 부딪힌 교인들을 도와서 해결하게 하고 상처받고 좌절한 교인들을 치료하여 성장케 하는 일도 균형있게 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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