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2:9-21/ 그리스도의 성품/ 한경직 목사
2014-08-22 23:20:08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十二․二十)

이 말씀은 이사야 四十二장 一절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보다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잘 표현하는 성구인 줄 생각합니다.
특별히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한다고 하는 말씀은 가장 적절한 표현인 줄 생각합니다. 바로 마태복음 十一장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께서 친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十장 一절에『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溫柔)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생각할 때에는 온유와 관용의 성품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二장 二十三절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할 대에 이런 구절로 표현을 하였습니다.『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했습니다. 다 그리스도의 성품의 온유한 면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올시다.

그리스도는 약한 이가 아닙니다. 그는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이십니다. 이 크리스마스 계절에 특별히 그리스도의 이러한 성품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구절 가운데 묘사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에서 인간을 한 갈래로 봅니다. 생각하면 사실 인간은 한 갈대와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약한 것입니다. 또한 상한 갈대입니다. 인간은 죄로 상한 갈대입니다. 또는 세상의 풍파로, 혹은 슬픔과 고통, 혹은 고독, 혹은 실패로써 상처를 지니고 사는 것이 인간 생활의 현실인 것입니다.

여기 꺼져 가는 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심지라고 하는 말을 요사이 청년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전기가 있기 전 옛날에는 우리 방을 밝히기 위하여 작은 등잔불을 켰습니다. 나이 많은 이들은 다 잘 알 것입니다.

조그마한 컵 같은 것에다가 피마자 기름을 넣고 그 속에는 조그마한 노끈을 넣었습니다. 그 노끈으로 기름이 배어 올라가게 하고 그 끝에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작은 빛이 방안을 비추어 줍니다. 그 등잔 속에 넣는 노끈을 심지라고 합니다.

여기, 꺼져 가는 심지로 묘사된 인간을 상상해 보세요. 인간은 한 심지와 비슷합니다. 그 끝에 불이 켜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의 불, 양심의 불, 영혼의 불이 켜 있습니다. 비록 육체는 보잘것없는 물질이지마는 그 맨 위에는 하늘의 불이 켜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심히 미약합니다.

심히 희미합니다. 어떤 불은 거의 꺼져서 연기만 납니다. 그러나 아주 꺼진 것은 아닙니다. 심히 미약한 불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의 한 모습이올시다.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 이 것이 인간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성품은 인자하셔서 이 상한 갈대를 아주 꺽지 아니하십니다.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갈대를 짓밟습니다. 혹은 꺾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성품은 그렇지 아니 합니다. 옛날에는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서 부는 풍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혹은 갈대를 깎아서 붓을 만들어 글을 썼던 풍속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파상(破傷)된 인격을 고쳐서 하늘의 음악을 발할 수 있는 유용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천국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귀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주님은 아주 끄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성품은 인자하셔서 꺼져 가는 이성, 꺼져 가는 인간의 양심, 죽어 가는 인간의 심령을 다시 살려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는 등대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요한 복음 八장을 읽어보세요.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한 번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어떤 젊은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인데,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저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실 날 같은 생명이 땅에서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을 여러분은 다 기억하십니다.

다른 말씀 안 하시고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조금 계시다가 머리를 드시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를 쳐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한참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슬며시 다 나가고 여자 하나만 남았습니다.『사람들이 다 어디 갔느냐? 너를 정죄(定罪)하는 사람이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돌아가서는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시고 죽어 가는 심령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十七장을 여러분은 읽어 보세여. 거기 보면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여리고성을 지나가시다가 길가에 한 큰 뽕나무 위에 어떤 조그마한 사람이 올라가서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이름을 다 기억하시지요? 그는 삭개오입니다. 여리고성의 세리 장입니다. 부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때에 그는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파는 민족 반역자요, 매국노요, 호색을 많이 한 탐관오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가슴속에도 깊이 잠긴 실 날 같은 양심의 불을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꺼져 가는 불을 다시 일으키기 원하십니다.『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태도를 가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되어진 이야기를 더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셨습니다. 다시 그 불을 일으켜서 양심 있는 관리의 하나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삼았고 귀한 인간으로서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요한 복음 二十一장을 읽어 보셨지요? 거기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예수 님이 나타나신 기록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여섯 다른 제자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낚다가 동틀 때에 보니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서 계셨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말할 것 없고 감사하고 기쁜 가운데서 제자들이 빨리 헤엄쳐 나오고 배를 타고 바닷가로 나옵니다. 그 때에 베드로 역시 나와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대할 면목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일찍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노라고 약속까지 했지마는 사실 대제사장의 뜰 안에서 위기를 당할 때에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한 번만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씩 부인했고 부인만 한 것도 아닙니다. 맹세가지 했습니다. 예수를 대할 면목과 용기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움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심령은 문자 그대로 상한 심령이올시다. 그 신앙은 꺼져 가는 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용기를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얼마나 담대하냐고 물었으면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님의 물음은,『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불은 다 꺼졌지만 그의 가슴에 사랑의 불은 그냥 있었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 같았지만 그 사랑의 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베드로는 곧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상한 갈대 같은 베드로, 꺼져 가는 심지 같은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서 하루에 三천명이나 회개시키는 큰 등불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이올시다. 옛날만 아니고 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어제만 아니고 오늘도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상한 갈대가 되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불이 희미하다고 절망 할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새로운 불을 일으켜 주십니다. 주의 눈은 인자하셔서 항상 최악의 경우에서도 최선을 보십니다.

일곱 귀신이 들였던 막달라 마리아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딸을 보신 것입니다. 그 일곱 귀신을 제해 버리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딸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에 후원을 했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핍박하던 그 악독한 사울의 속에서 장차 이방의 사도 바울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길에 바울을 부른 것입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을 항상 보시고 찾으시는 주님이올시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여리고 거리를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어떤 구석을 눈을 들어 힐끔 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갑니다. 예수님께서 가보니 거기에는 죽은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죽은 개를 보시고 돌아서며 하시는 말씀이 "그 이빨이 진주같이 아름답구나" 라는 말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은 개 가운데서도 진주를 발견하시는 주님이올시다. 주님의 귀는 인자하셔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모든 인간의 아우성을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가까이 왔을 때에 어떤 소경이 뒤에 따라 오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제자들은 시끄러우니 조용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음성을 들으시고 그를 데려다 그의 눈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긴 있으나 담대하지 못해서 감히 병 고쳐 달라는 말은 못하고 조용히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루(血漏)병 걸린 여인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담대한 신앙이 아닙니다. 약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신앙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손은 인자하셔서 인간의 더러운 것도 만져주신 손이올시다. 어떤 문둥병 자들은 와서 어루만져 달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 자를 손으로 어루만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병자도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어루만지어 고쳐 주었습니다. 귀머거리의 귀를 어루만지며 고쳐 주었습니다. 다 예수님의 성품의 한 면이올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상을 보면 고층 건물은 올라가고 고가도로는 건설된다고 하지마는 어떻게 사회상이 거칠어 가는지 모릅니다.

택시 운전사가 사람을 치고는 그대로 달아난다는 이야기, 심지어 어떤 택시 운전자는 사람을 치어 택시에 싣고서는 사람 없는 산골짜기에 내다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 버스 차장이 사람을 밀쳐 떨어뜨려 죽게 한 이야기, 전화 한 통을 받아도 불친절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들립니까.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얼마나 아쉬운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크리스마스 계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먼저 배워야겠습니다. 성품은 물론 선천적 요소가 없지 아니하나 성품 구성의 대부분은 평소의 생각과 습관의 소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격화했는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했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품을 배우려고 할 것이면 언제나 그리스도를 묵상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를 항상 모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제나 언행을 조심해서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속담에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같이 사람을 보아도 업수이 여기는 말이 있고 백안시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찬 눈으로 볼 수 있고 흰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려고 하는 이는 혈기의 죄를 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죄가 여러 가지 많지만 간단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죄요 하나는 혈기의 죄입니다.

육체의 죄라는 말은 술에 취한다든지 음란 방탕 같은 것들입니다. 혈기에 관한 죄란 교만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 같은 죄들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제일 먼저 고치는 것은 육체의 죄입니다.

우선 회개하면 술도 안 마시고 음란한 곳도 안 가고 해서 육체의 죄가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혈기의 죄까지 없애야 합니다. 교만, 시기, 질투, 분노 같은 것을 다 고쳐야 합니다.

누가복음 十五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지요. 두 아들 형제가 있는데 둘째 아들 탕자는 육체에 관한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했습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그 죄를 다 용서하고 너무 기뻐서 송아지를 잡고 이웃을 청해서 잔치를 벌여 그 아들을 영접합니다.

그 때에 밭에 나가서 일하던 큰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육체의 죄는 안 지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니 풍류소리가 들려서 무슨 소리냐고 종에게 물어 보니,『당신의 동생이 멀리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 기뻐서 잔치를 차렸습니다.』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맏아들은,

『나는 안 들어가겠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일만 했는데 염소 새끼 하나 잡아서 놀라고 하지도 않더니 아버지의 가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그 녀석을 맞아 잔치를 벌여! 나는 안 들어갈 테다』하며 노기를 품었습니다.

이 아들은 혈기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으며 동생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으며 그 자리에 왔던 여러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정에 큰 불안을 가져왔습니다.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육체의 죄를 먼저 회개해야지요. 그러나 혈기의 죄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예수님과 같이 상한 갈대를 싸매 주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인생 행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같이 험해서 우리가 가는 길 좌우에 쓰러진 사람이 많습니다. 상한 갈대가 많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건강 적으로 모든 방면으로 이렇게 상해서 쓰러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처럼 그저 지나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곧 예수님처럼 그들을 붙들어 싸매 주는 것을 우리가 꼭 배워야겠습니다.

특별히 성탄 계절에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가 배워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이 성탄절에는 한 사람 돕는 운동을 하자고 하는 말을 다 들은 줄 압니다. 어떻든지 우리가 이 성탄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아서 우리 사회 안에서 아직까지 죄악 가운데 있는, 모든 방면에서 쓰러져 있는 이들을 하나씩이라도 붙들어 주는 일을 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발휘하면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해 질 줄 압니다.






admin

�댁쟾�쇰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