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8-25/ 신앙의 제 일조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49:17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十一․六) 우리는 사도신경을 외워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의 제 일조 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十一장 二十二절에 주님께서도『하나님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十一장 六절에는『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다만 이론적 근거에 의지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직감적으로 주님을 알게 되는 까닭입니다. 서반아의 유명한 철학자「우나무노(Unamuno)」의 증언과 같이,『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 친구를 믿는 것처럼 믿는다. 나는 그의 사랑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그의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손이 나를 이끌고 인도하고 붙들어 주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마 우리 모든 신자의 공통된 체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우리는 이따금 우리 신앙의 이론적 근거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특별히 현대는, 무신론적, 유물론적 사상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렇고, 우리 국내사정도 역시 그렇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혹은 인본주의를 교묘하게 하여, 혹은 소설로 혹은 영화를 통해서 선전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이론적 견지에서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이론적으로 논쟁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문제는 종교철학이나 조직신학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금 길게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성경에 가르치는 말씀대로 잠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과 같이 읽은 로마서 一장 十九절, 二十장에는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하나님을 알만한 것을「저희 속」곧 인간 속에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二十절에는 한 걸음 더 나가서,『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만드신 만물에」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둘째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그의 존재가 분명히 나타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핑계를 할 수 없다고 여기 분명히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十九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존재를 인간 속에 보여주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간단하게 두 가지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인간의 도덕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八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마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잔데,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책잡기 위하여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을 받으셨으나 곧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만히 머리를 숙여 땅에다 무슨 글씨를 쓰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속히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한참 있다가 주님께서 조용히 머리를 들고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였습니다. 땅에 무슨 글씨를 씁니다. 한참 땅만 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한 사람, 두 사람, 다 달아났고, 그 여자 혼자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아우성치던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슬며시 다 나가게 했습니까? 무엇이 이 사람들을 그 곳에서 쫓아냈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대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쫓아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 우리에게 판단을 내려 줍니다. 양심은 무엇을 하여라, 무엇은 하지 말아라 하고 우리에게 명령도 합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무엇은 잘하였다. 무엇은 잘못하였다고 칭찬도 하고 책망도 합니다. 이 양심의 음성이 어디서 옵니까? 내게서 옵니까? 아니요.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다른 데서 나에게 이 양심을 통해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에게 말하여 줍니다. 이 음성이 누구에게서 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 같은 이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마음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고, 곧 양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양심의 명령은 지상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순수이성에 의해서, 다른 하나님에 대한 논거는 다 확실하지 못하지만 이 논리만은 거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 속에 양심을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양심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이 하나님은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시는 도덕적 주재자시요, 공의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인간 속에 보여주었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종교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 몇 가지 중의 하나는 종교성입니다. 짐승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어떠한 문명, 어떠한 야만 사회일지라도 종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인간은 불치병 적으로 종교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 본성 가운데 하나는 종교성입니다. 말하자면 본능 가운데 하나는 종교적 본능입니다. 그래서 보통 때는 모르지만, 급한 때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는 영원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영원에 대한 관념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속 깊은 곳에는 영적 기가 있습니다. 짐승은 잘 먹고 잘 자면 아주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곳에 의식주가 만족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인간 최고의 기쁨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석가여래가 궁중에서 탈출해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프랜시스가 부자인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나갔습니다. 왜? 아무리 다른 것이 넉넉하지마는 인간 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 참회록 제 一페이지에 있는 말과 같이『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당신 안에서 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안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고백한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깊은 속에는 이 종교적 본능, 혹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게는 여러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으면 본능을 만족시킬 만한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출생 후에 가르치지 않아도 아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젖 빠는 것, 그거 배워줘야 압니까? 젖 빠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줄 압니다. 젖 빠는 본능이 있는 대신에 무엇이 있습니까? 어머니의 적 꼭지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의 젖꼭지가 없으면 아마 젖 빠는 것도 모를 것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고프면 먹을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세상에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얼 보기를 원합니다. 볼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성적 본능도 그렇습니다. 모든 본능은 본능에 맞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심령에 깊은 영적 기갈과 본능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은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곧 하나님입니다. 어찌해서 봄 동산의 풀이 위를 향해서 장성해 갑니까? 위에는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어찌해서 모래돕에는 밀물이 육지를 향해서 올라옵니까? 그 위에는 달이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까닭으로 인간 심령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성품이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심은 하나님께서는 과연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기에 플라톤은 무신론은 질병이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자는 병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병든 사람은 입맛이 없습니다. 눈 못 보는 사람은 태양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은 반드시 종교적 본성이 있고 거기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다음은 二十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만드신 만물에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나타내신다고 하는 끗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더 얘기할 수 없고 두 가지 방법으로 생각해 봅시다. 인과의 범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범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범칙대로 안 되면 과학은 성립하지 못합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우주가 생긴 결과라면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원인이 꼭 있습니다. 제일원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특별히 보고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에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는데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이 인과법칙의 견지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우리가 아는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이 우주는 본래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 하는 생각, 범신론자들의 주장대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에 있어서 이런 주장은 오늘 과학시대에 와서는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고, 어느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 하는 것이 거의 단정되었습니다. 요사이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이 태양계나, 이 우주 전체가 몇 해 전부터 시작되었겠나 측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자세한 얘기는 다할 수 없으나, 우라늄이라는 원소에서 그 방사선을 측정하여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빌리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三十三억 五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 우주 전체의 연령은 약 一00억 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 위에 있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이 생물이 지구 위해 영원히 나타났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서 영원부터 살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인간은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一장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생물도 영원부터 있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영원부터 있었던 것 아닙니다. 히브리 三장 四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집마다 반드시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곧 하나님이시라.』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는 이가 있습니다. 즉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으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니냐 하고 반대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소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 절대의 신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일 것입니다. 수학을 공부하신 이는 수학에 무한대라는 관념이 있을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이콜이 되어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제로입니다. 그 제로로 제하면 무궁 대, 무한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을 영으로 제하나, 천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다 무궁 대 무한대입니다. 그런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 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이런 우주를 지으신 분은 무한 절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목적론적 면에서 보는 방법입니다. 이 우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살펴보면, 얼른 보았을 때는 복잡하고 되는대로 된 것같이 보이지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조직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 별들이 그냥 널려져 있는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문학의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에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도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 계가 여러 개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소위 성운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 우주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크지만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거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화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물질을 분자로 분석합니다. 분자는 또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양자를 중심해서 돌고 있는 전자가 있는 적은 우주라고 합니다. 큰 데서 적은 데까지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또 이 우주의 현상을 보면 모든 데에 고안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고안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꽃이 있지만,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여러분이 처음으로 그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저만큼 만들 수 있겠는가?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를 살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거기에도 꼭 고안이 있습니다. 그것만은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 수 있게 한 것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으로 놀랍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 갔다 하지요. 물론 벌들과 나비가 왜 왔다 갔다 합니까?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지요.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저 줍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묻혀와 결실을 맺게 되지요. 그것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동물이 쓸데없다고 내버리는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게는 아주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이 동화작용에 의해서 탄소만 가지고 쓸데없다고 내버리는 산소는 윌 동물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서로 협동해서 살도록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의 고안이 있습니다. 그 동안 오래 비가 안 오다가 어제 그제 이틀 동안 비가 흡족히 와서 우리가 다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 비오는 것을 조용히 생각하면 거기에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는 물이 많아요. 태양열을 받아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 가서 찬바람을 만나 다시 물이 됩니다. 이 물이 비가 됩니다. 비가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여러 가지 먼지를 다 잡아 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 온 후에는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비가 이 땅을 아주 깨끗하게 씻습니다. 비가 오래 오지 않으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 꼭대기의 먼지는 누가 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그것까지도 말끔히 씻어 줍니다. 다 씻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방에 떨어져서는 풀을 자라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고 나무가 열매를 맺게 하고 모든 과실을 익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땅을 깨끗이 씻어서 강물이 되고 시내가 되어서는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은 어떻습니까? 짭니다. 그것 왜 짜지요? 짜야 소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 하나 가지고 어떻게 깨끗이 소재하고 식물이 자랄 수 있게 하고, 다시 깨끗한 물이 올라가게 하여 순환하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러분, 모든 것이 이렇게 되는 것, 그냥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몇 해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까, 제네바 호수 옆에 꽃으로 시계를 만든 것이 있어요. 글자를 다 꽃으로 만들고, 아마 기계를 그 속에 묻었겠지요. 큰바늘이 빙빙 돕니다. 꽃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고서는『야! 이 제네바는 이상하구나 꽃시계도 다 저절로 생기는구나!』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고안이 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로 정신병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우주에 대한 이론 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 하는 불가지론과 그 다음 하나는 이것이 다 그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돌과 나무와 유리와 벽돌과 이런 것을 되는대로 섞어서 던졌더니 영락교회가 되었다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시편 十九편 一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인간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시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통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속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생활하는 자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화를 내리시되 三, 四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우리 동양에도『순천 자는 흥하고 역 천 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이 신앙을 전파해서 우리의 민족을 구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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