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1-12/ 예수를 바라보자 / 한경직 목사 2014-08-23 08:34:54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十二․二) 여기 구름같이 둘러싼 예수의 증인들이란 말씀은 히브리서 十一장에 기록된 전 세기를 통하여 믿음의 달음박질을 잘 한 신앙의 용사들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이분들은 이미 세상에 있을 때에 자기 믿음의 경주를 다 마치고 지금은 구름같이 둘러서서 지금 신앙의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모든 과거의 신앙의 용사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무거운 것, 경주에 방해되는 것을, 어떤 이는 체중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몸에 살도 너무 있으면 경주에 방해됩니다. 신령하게 말하면 꼭 죄는 아니지만 우리 신앙 생활에 발해되는 것, 무슨 오락이든지, 무슨 습관, 무슨 먹고 마시는 것이라든지,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마는 우리 신앙 생활에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벗어버리고 또 우리 신앙 생활에 얽매이기 쉬운 것을 온전히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경주장에서 달리고 믿음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히브리 지가가 외친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오늘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람의 감각 가운데 오관이 있지 않습니까? 이 오관 어느 것이 귀중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그 중에도 특히 눈은 귀중한 줄 압니다. 눈을 통해서 외부 세계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에배소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눈을 밝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모든 축복과 기업을 좀더 밝히 볼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또한 주의하여야 할 것은 보는 것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눈이 이와 같이 보배로운 반면에 눈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창세기 三장을 보면 하와가 눈을 들어 선악과를 보니 그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다고 그것을 볼 때에 더 먹을 욕심이 난 모양입니다. 여호수아 七장을 읽어보면 거기 아간 이란 사람이 여호와가 금한 명령을 어기고 여러 가지를 도적질 한 후에 잡혀서 고백하기를 내가 시날 산의 외투 한 벌과 은 이천 세겔과 금 오 천 세겔을 보고 그만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본래부터 이 죄를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옷과 금을 보니 속담에 견물생심으로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멀리 목적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인데,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창세기 十三장 十절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그 요단 들에는 푸른 풀이 무성하고 땅이 기름졌습니다. 그 푸른 풀을 바라보고 욕심이 나서 자기의 양떼를 끌고 자기의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놓인 요단 들로 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창피한 일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그 두 성이 망할 때 부득이 황급하게 피할 수밖에 없었고 또 자기 아내는 돌아보지 말라는 것을 돌아다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기사가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경고를 줍니다. 요컨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천문학자의 몸은 산 중턱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눈은 언제든지 산너머 하늘에 있습니다. 지금도 히말라야 산에 올라가는 청년들이 있지만 산꼭대기를 바라봅니다. 항해사는 넓은 바다 가운데 있지만 푸른 바다를 건너서 멀리 넓은 바다를 지나서 자기가 도착하려고 하는 항구 그 목적지를 멀리 바라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 믿음의 주인이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내 자신이 아직도 그리스도와 같은 자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언제든지 그리스도에게 가서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너희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한 걸음 두 걸음 풍파 많은 고해를, 굴곡이 많고 태산 준령이 많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환경이나 풍랑을 너무 바라보지 말고 언제나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전진을 계속해야겠습니다. 신년 벽두를 당하면 흔히 장래를 전망해 봅니다. 금년 전망이 어떠한가? 온 세상 사람들이 장래를 바라보는 때입니다. 세계 사람의 안계(眼界)에 제일 크게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제일 많이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혹 여러분 생각해본 일이 있습니까? 신문 잡지를 더듬어 보면 아마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하여 정치가, 사업가, 교육가, 농부, 상인을 막론하고 그의 안계에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을 요즘 말로 소위 신무기,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나 이런 것 같습니다. 세계 인류의 안전에는 이런 괴상한 것이 마치 구름이 하늘을 덮듯이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간단없이 계속되는 소위 냉전, 또 우리 한국 사람의 시야에는 이것 외에 가깝게 당면하는 三八선이 있습니다. 이런 것 들 때문에 온 세계 인류는 새해를 당해서도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를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도 자연히 이런 환경에 처해서 이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만 보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은 마치 사도 베드로가 예수 님의 명령을 받아 갈릴리바다 위에서 물위로 걸어 예수 님께로 가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아질 때 그 물결을 보고 겁이 나는 순간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베드로가 앞에 일어나는 물결보다도 그 뒤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아갔던들 물 속에 빠져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풍랑이 높고 환경이 험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바라볼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계신 풍랑도 제거하는 능력의 주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자의 신앙 생활이올시다. 선지자 엘리사가 도단성에 머물러 있을 적에 하루 아침 일어나 보니 온 도단성에 아람 군대가 와서 포위를 하였습니다. 온 도단성은 물 끓듯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종도 말할 것 없이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종의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밝아진 눈으로 다시 도단의 주위를 바라보니 아람군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난데없는 불 말과 병기가 역시 도단성을 둘러싸서 아람군대가 들어올래 야 들어올 수 없도록 둘러쌌다는 것입니다. 그 때 엘리사가 조용히 그 종들에게 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들과 함께 하는 자들보다 많으니라 했습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에 이북에서 비행장을 몇 개 건설했으며 Z기를 三八0대를 들여왔다는 등의 말이 많이 들립니다. 물론 우리가 거기에 대비해서 준비해야 할 줄 압니다. 하지만 너무 그것만 볼 것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들과 함께 하는 자보다 많습니다. 계시록 十一장 十五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로마 정권의 압박을 받으면서 반모섬에 유배되어 어떤 캄캄한 굴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 계시의 일절 입니다. 사도 요한 의 눈에는 단순히 그 때에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세력만 본 것 아닙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와서 말하기를 세상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고 우리 주께서 세세 에 왕 노릇할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풍파가 높습니다. 얼마나 더 높아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파만 볼 것이 아니고, 풍파를 제거할 수 있고 바다도 잔잔케 하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만 유의 주요,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불안과 공포대신 안심과 확신과 담대한 맘을 가지고 오직 주님을 따라 나아갈 것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독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둘째는 푸른 풀밭을 너무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가 금년에도 좀더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말했지만 롯이 푸른 풀밭을 먼저 봤습니다. 그러면서 푸른 풀밭에 취하여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의 날이 가까워진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조금 잘못하면 우리가 생활해 나아가는 동안에 너무 물질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사업에 부지런하고 착실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사업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여 사업도 재건하고 경제적으로 우리 나라를 재건하는데 공헌하여야 되겠습니다. 물질만 너무 바라보는 것은 사업을 잘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롯처럼 푸른 풀만 바라보다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그만 잊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면 다라는 말이 너무 자주 들립니다. 우리 가난한 한국에 기독신자들에게 이 시험이 많이 오는 줄 압니다. 이렇게 배고플 때 배고프고 가난하니까 어떠한 수단이든지 다해서 그저 살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시험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런 때에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일생토록 가난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친히 말씀하신 대로『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지만 인자는 무리 둘 곳이 없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떠난 후 남긴 유산이란 겉옷 한 벌밖에 없었던 모양인데, 그것을 군인들이 제비뽑아 가졌습니다. 이렇게 예수 님은 가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방면으로 부하셨습니다. 에베소 三장 八절에『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豊盛)』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풍성이란 말, 즉 부요 하다는 말인데 그리스도의 부는 너무 많아서 무진장이어서 측량할 수 없고 무진장의 그리스도의 부를 내가 너희에게도 좀 나누어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무진장의 부를 우리는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은혜와 진리의 부요, 진과 선과 미의 생활의 부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격의 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최고 목표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의 가장 고상한 인격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최고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너무 물질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물질 때문에 이 목표를 그르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물질과 이 목표를 바꾸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지위나 영광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야곱과 요한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가만히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선생님께서 영광으로 오실 때 우리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주시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 그 말씀을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요한과 야곱은 예수 님께서 건설할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해서 세상나라와 비슷하게 생각해서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지금으로 말하면 지위 한 자리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의 지위를 바라보기보다 예수님의 얼굴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지방에 있는 분에게서 편지 한 장을 받았는데 아무게도 어느 자리에 있는데 나만이 시골에 남아 있으니 나도 서울에 가기 원하고 있는데 어떻게든지 이 일에 협력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제 짐작이 꼭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런 출세의 동기가 그 편지 배후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여러분 오해가 없기 위해서 우리 믿는 사람이 정계나 관계에 나가는 것을 절대로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믿는 사람이 정계나 관계에 들어가서 우리의 정치와 우리 관청의 모든 사무를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윤리와 도덕에 의거해서, 그 애국심과 의무감에 의지해서, 우리 나라는 건설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유혹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홀로 기도할 때에 한번은 사단이 와서 예수 님을 높은 산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예수 님 눈앞에 온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하는 말이 네가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네게 주리라 하였습니다. 나에게 절만 하면 그 말 때문에 예수 님께서 이에 대답하시기를 사단아 불러가라 오직 주 너희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만 섬길 것이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위를 얻을 수도 있고 우리가 세상 영광을 누릴 수도 있는 줄 압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단에게 절하게 된다면, 불의와 타협해서 그런 자리에 간다고 하면, 양심을 속여 가면서 그런 자리에 가게 된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이 깊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금년에 대통령 선거와 참의원 선거도 있다해서 우리 민족 가운데 이런 꿈꾸는 사람 많은 줄 압니다. 내가 바라기는 다 믿는 사람들이 당선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 가기 위해서 사단에게 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는 먼저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만 왕의 왕 되시는 예수 님의 얼굴을 물질보다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하나 부하신 예수 님의 얼굴, 오직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중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때 안타까움으로 부르짖는 말 가운데 한마디 네가 이렇게 나보다 먼저 가면 나는 누구를 보고 살겠느냐? 사람이 세상에 살 때 아무리 귀하고 가까운 자라도 삶의 얼굴을 보고 살다가는 낙심할 때 있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무엇을 보고 살다가는 언제든지 절망할 때 있습니다. 왜? 이 세상은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에 무엇을 바라보고 살다가는 언제든지 낙심될 때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에 무엇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신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우리 신자의 생활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에 가든지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살 때만 그런 것 아니고 죽을 때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죽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악한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서 돌 탕에 맞아 죽으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七장 五十五절을 읽으면 그 얼굴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서 계신 것이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줄을 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에도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죽어야 되겠고 죽을 때만 아니고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 전서 十三장 十二절을 읽으면『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 때에 예수 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친히 대면해 볼 것이라 말했습니다. 영생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영원히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해 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마는 언제든지 우리의 눈이 영광의 주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제부터 영생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씻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고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