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6:6-8/ 신앙 생활의 진수/ 한경직 목사 2014-08-23 21:59:19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六․八) 미가 六장 六절과 八절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갈까?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여기에 하나님께 나가는 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번제(燔祭)를 잘 드리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또 동물 가운데 있는 많은 기름을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은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드려야 죄를 속량 받는 줄 오해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에 선지자 미가의 말씀이 있습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동양의 성현도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란 말을 하였습니다. 물(物)에 본(本)과 말(末)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도 본과 말이 있습니다. 근간(根幹)과 지엽(枝葉)이 있습니다. 핵심(核心)과 외곽(外廓)이 있습니다. 진수(眞髓)와 外型(외형)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여기에 있는 구절을 통하여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종교의 의식보다도 그 의식을 행하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사야 一장 十三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可憎)히 여기는 바요 월삭(月朔)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저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니라.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이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어떤 의식보다도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분이올시다. 둘째로 예물을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 자체보다도 예물을 드리는 이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것입니다. 산상 보훈에서 우리 주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주님께서 연보 궤에 앉아서 여러 사람이 연보 드리는 것을 보시다가 두 엽전을 드리는 과부의 정성을 보시고 이 과부가 실상은 제일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활을 보십니다. 셋째로 기독교는 이러한 윤리적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윤리가 없는 종교도 있습니다. 모든 우상숭배 종교가 그러합니다. 일본의 신도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신사 참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윤리적 신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에게 옳은 윤리 생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 생활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공의를 행하며』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요구하십니다. 시편 一0三편 六절에는『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제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 도다』했습니다. 스바냐 三장 五절에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 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의를 두 가지 종류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분배의 공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각 사람에게 그 공적과 기능과 노력에 의지해서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것이 공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보상의 공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형벌을 줄 때에 꼭 공평하게 하는 것이 공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十三장 七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바칠 이에게 마땅히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넓은 의미에게서 보면 공의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는 모든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가정에는 부모와 자식간에서 우선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간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장유(壯幼)관계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친구 사이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는 장사하는 이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상거래에 있어서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상품에 합당한 가격을 받는 것이 공의입니다. 지나치게 받으면 불의한 일입니다. 또 상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합당한 가격을 지불치 않으려는 것은 불의입니다. 노사(勞使)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가 필요합니다. 자본주는 노동자에게 적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산업이 발달되고 생산이 증진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요사이 신문지상에 보면 우리 사회의 현실은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되어 간다고 합니다. 공의의 임금을 자본주가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업사회에 공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남의 일을 할 때 그 임금만큼의 일을 충성되게 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이 공의를 특별히 기억해야 합니다. 공무원, 경관들, 판검사들은 기억하십시다. 법 아래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여당과 야당이 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법 아래에서 국회의원과 평민이 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같이 받아야 사회가 명랑해집니다. 이래야 사회가 평화로와 집니다. 부정 부패란 말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결국은 공의가 돈에 의지해서 흩어진다는 말이 아닙니까? 특별히 법을 잡은 사람들은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에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다가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으로는 누구나 의를 행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목마를 때에 물을 구하는 것처럼, 시장할 때에 먹을 것을 구하는 것처럼 간절히 공의를 행하기를 원합니까? 그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 사회와 그런 민족과 그런 나라가 복을 받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익보다도 의를 먼저 구합니까? 내 권익보다도 의를 먼저 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첫째로 공의입니다. 둘째로 인자를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의를 초월해서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어서 사는 인간이 까닭입니다. 시편 一0三편 八절에『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특별히 자비(慈悲)를 많이 말합니다. 유교에서도 인(仁)이라는 자비의 사상을 말합니다. 특별히 맹자 같은 이는『불인인지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자비를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비에 대한 사상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것이 사상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훈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해서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십자가상에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자비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四장 三十二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했습니다. 인자에는 두 가지 면이 늘 있습니다. 첫째로 인자한 사람은 남의 죄를 용서합니다. 언제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죄를 지을 때에도 그 죄를 용서해 주는 이가 인자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불우한 이를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도 불쌍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으니 내가 불행한 이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에서 항상 사는 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인생 행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험한 길과 같아서 길가에 쓰러진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아도 많고 과부도 많고 걸인도 많고 무의무탁한 자도 많고 병자들도 많고 돈 없는 실직자도 많고 생의 패배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행로를 걸어 갈 때에 이들을 어떻게 보면서 걸어갑니까? 인자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런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힘있는 대로 돕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올시다. 셋째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상은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올시다. 그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이상의 두 가지 생활의 기초가 되는 까닭입니다. 야고보 三장 六절에서 야고보 장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五十七장 十五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여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어떤 이가 한 번은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와서『신앙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대답하는 말이,『겸손(謙遜)이올시다.』다시 묻기를 『둘째 걸음은 무엇 일까요?』다시 대답하기를『그것도 겸손이올시다.』다시 묻습니다. 『셋째 걸음은 무엇일까요?』다시 대답합니다.『셋째 걸음도 겸손입니다.』왜 이렇게 큰 종교개혁자가 겸손을 강조했는지 아십니까? 사실 겸손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람의 견지에서 보면 선한 사람도 많고 또 성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아래서 심판을 받을 때에는 누구나 죄인이올시다. 자기의 의로써 구원을 얻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언하였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겸손히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와 신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겸손한 이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혹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도둑질도 안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또 연보도 열심히 합니다. 돈도 많이 냅니다. 좌우간 저 아무 장로나 아무 집사보다는 내가 더 잘 믿지요.』 하는 분 안 계십니까? 여러분, 옛날에도 이렇게 믿는 이가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그렇게 믿었지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심령과는 동행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옛날의 세리처럼,『나를 불쌍히 여기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주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나는 일분 일초라도 옳은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겸손한 심령과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어떤 이는 지식이 좀 있다고 지식의 교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이 좀 있다고 돈의 교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세력이 좀 있다고 교만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식도 잠깐이요, 돈도 잠깐이요, 세무십년영(勢蕪十年榮)이라고 세력도 잠깐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사람만이 세세토록 있는 것입니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서 내 생활을 반성해 보세요? 그리고 내 죄를 겸손히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 교만도 고백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이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이 길만이 참 영생의 길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잘 믿기 위하여 애쓰는 이들도 있는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좀 잘 믿을 수 있을까 해서 산 기도를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회마다 따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전도사 혹은 어떤 권사를 따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방언이나 입신을 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사모하는 이들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사람아 주께서 선하심이 무엇을 네게 보이셨나니』했습니다. 어떻게 잘 믿을 수 있나 하는 방법을 주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잘 믿는 길은 사람이 창안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니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진수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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