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5:21-27/ 정의를 하수같이 / 한경직 목사
2014-08-25 18:44:03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아모스 5장 24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장마 때에 물이 강을 넘쳐흐르는 것처럼 정의가 사회에 넘치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외쳤습니다.

바로 이틀 전에 우리는 3?1절을 맞았습니다. 지금부터 66년 전 그날에는 우리 온 민족의 정의의 부르짖음이 삼천리 강산에 하수같이 넘쳐흘렀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국을 병탐한 것은 불의요, 악이요, 큰 죄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제국주의는 결국 원자탄의 세례를 받고 망하였으며, 우리 민족은 1945년에 해방을 받았습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정의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이남에는 대한민국이 설립되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한 외침은 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하는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서는 계속하여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북까지 정의가 넘치기 위하여서는 계속적인 부르짖음과 온갖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국내에서는 또한 지난 2월 12일,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기에 우리는 정의가 하수처럼 넘쳐흐르게 하라는 예언자 아모스의 부르짖음을 다시 한 번 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모든 예언자들 가운데 특별히 ‘정의의 예언자’로 나타났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민족이 두 나라로, 남편은 유다 나라, 북편은 이스라엘 나라로 갈려 있을 때에 사셨던 분입니다. 때는 주전 8세기였습니다. 그는 본래 남쪽 나라인 유다, 드고아라는 촌에서 양을 기르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한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북 이스라엘 나라로 가게 되었고, 당시 북쪽 나라의 정치와 사회의 중심지이었던 벧엘이라는 곳에서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북편 나라에 보내신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당시 그 나라의 사정은 실로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읽을 때 자세히 들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아모스 2장 6절에서 8절의 말씀입니다. 당시 그 사회가 얼마나 부패하였으며 부정과 불의와 악이 얼마나 판을 쳤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들어보세요.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아모스 4장 1절과 2절입니다. 주의해서 들으세요. 여기에서 ‘암소’란 말은 당시 ‘부유층 여자들’을 의미합니다.

한 번만 더 들어보세요.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옛날 재판은 성문에서 했습니다. 아모스 5장 11절과 12절의 말씀입니다.

당시 부유한 계급과 권력 있는 층과 관리들이 일반 백성을,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 부패한 모습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떠나면 결국은 나라가 망합니다. 머지않아 그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온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또한 정의의 하나님이란 것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시편 97편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시편 103편 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지으신 모든 자녀들을 공평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입니다.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공의의 하나님이신 까닭으로 죄를 범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똑같이 벌하십니다. 한 국가도 벌하시고 또 한 개인도 벌하십니다. 당시 불의로 가득하던 북방나라 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나라를 통하여 큰 벌을 받고 결국 망하여 버렸습니다. 그 후로 약 100년 후에 남방 나라 유다도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바벨론을 통하여 큰 형벌을 받고 또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다니엘 2장을 읽어 보면 당시 바벨론의 유명한 왕 느부갓네살이 꿈 가운데 본 큰 우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우상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큰데 그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넙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한 작은 돌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발에 부딪히니 그만 쓰러져 산산조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 돌은 하나님의 정의의 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큰 우상들, 혹은 강대국들이 아무리 크게 보이나 그 발의 일부는 진흙입니다. 진흙은 맥이 없어요. 하나님의 정의의 돌이 부딪힐 때에는 그만 쓰러지고 맙니다. 지금은 소련이 굉장히 큰 우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에 부딪힐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역사적으로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개인은 이러한 역사적 심판 외에 또한 영원한 심판이 따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육신과 영혼이 합하여 세상에 살며 죄도 꼭 같이 짓습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남아 있습니다. 그 영혼까지 벌 받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은 영원한 심판이라고 합니다. 오직 정의의 생활만이 이 심판을 피하게 해줄 것입니다.



‘정의 사회의 구현’은 우리나라가 내세운 중요한 표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정의의 사회를 이룩하려면 먼저 입법을 할 때에 정의에 의지해서 법을 세워야 합니다. 금번 새로 국회의원들이 뽑혔지만, 국회라고 해서 함부로 아무 법률이나 마음대로 제정할 수는 없습니다. 공정한 법률만을 제정해야 될 것입니다. 편파적이거나 비민주적이거나 독재하기에 편리한 법률을 제정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을 중심으로 하지 아니하고 위정자 중심의 입법을 할 수는 없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상 과거에는 국회에서 이러한 일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으로부터 국민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입법의 특권을 받았은즉 언제나 옳게 살펴서, 대다수 국민의 최대의 이익과 의사를 무시하는 입법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국민의 권리를 무시하여 무슨 입법을 하지 마십시다.

또는, 정의의 행정을 해야 합니다. 법에 의지하여 국민을 다스리는 공무원은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청렴하고, 뇌물을 멀리 하며, 사사로운 감정이나 지방색이나 편파적인 것에 이끌리지 않고, 언제나 공평한 행정을 펴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썩은 사상의 존재인 관존민비 사상은 물론 일소해 버려야 하고, 공무원은 문자 그대로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사심이 없이 모든 행정을 펴나가야 될 것입니다.

균형 있는 행정으로 모든 지방이 같은 혜택을 입으며, 기업주나 근로자나 어떤 사회계층이나 같은 혜택을 줄 수 있는 공정한 행정을 펴나가야 될 것입니다. 국회의원과 평민, 공무원과 국민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행정을 펴나가는 옳은 공무원의 자세가 아쉽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정의 사회가 구현되려면 물론 정의의 사법 행정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법 아래에서 만민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특히 인권이 존중되고, 고문 없는 심문 방법을 개발하여야 합니다. 사실 문화국가로서의 사법행정이 아쉽습니다. 보통 공판을 너무 끈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공정한 재판, 인권이 유린되지 아니하는 사법행정을 온 국민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정의에 입각한 노사문제의 해결입니다. 물론 치열한 국제 경쟁시대에 있어서 외부에서는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 줄 생각되나, 최종에는 정의에 입각한 노사관계만이 경제적으로 최대의 결과를 가져오며, 또 국가적 차원에서도 최대의 혜택을 가져온다는 엄숙한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사실 저임금 문제는 인권문제에 속합니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한다고 하여도 부의 공정한 분배가 없이 사회 안정과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안정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의는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국민화합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정부나 국민 모두가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또 정의는 사회 안정과 질서의 기반 위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이름 아래 안정을 해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삼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 사회란 가장 불행한 이들, 그 사회 안에서 신체장애자 등, 그러한 계층을 먼저 돌아보고 돕는 사회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정부나 국민이 다 같이 이 방면에 먼저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우리가 전도만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사회 안에 가장 불우한 이들을 먼저 손을 펴서 도와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고아사업, 모자사업, 경로사업, 온갖 사랑의 실천 사업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의 사회를 이룩하는 데 꼭 필요한 황금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가 혹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소위 정의 사회를 이루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마태복음 7장 12절이 정의 사회를 이룩하는 데 황금률입니다. 제가 읽을 때 들어보세요. “그러므로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온 삶의 황금률인 동시에 특별히 정의 사회의 황금률입니다.

정의 사회란 입으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데모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선전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이나 청년이나 학생이나 누구든지 이 황금률대로만 하면 자연히 정의의 사회는 이루어집니다.

가령 공무원과 국민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세요. 공무원마다 내가 국민이면 어떠한 대접을 받기를 원할까 생각해서 그대로 국민을 대접해 주고, 또 내가 국민이면 내가 만일 공무원이면 어떠한 대접을 받기를 원할까 하는 그 생각을 해보면서 공무원을 대접해 주고, 기업주이면 내가 만일 근로자라면 기업주에게 어떠한 대접을 받기를 원할까 생각해서 그대로 근로자들을 대접해 주고, 마찬가지로 근로자들은 내가 만일 기업주라면 어떠한 대접받기를 원할까 생각해서 그대로 하게 되면 그 기업은 자연히 잘 되고, 정의가 하수같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난민 구조문제도 이 황금률에 의지해서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그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회생활의 면이 그러합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교역자와 장로들의 관계, 장로들과 교인들과의 관계, 이러한 모든 면에서도 주님이 주신 이 황금률만 실행한다면 교회 안에서도 자연히 정의와 화평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정의가 하수같이 넘치는 우리 사회, 우리 관청,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가정, 우리 국가, 아니 우리 교회, 온 세계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정의를 하수같이 넘쳐 흐르게 하라는 옛날 아모스를 통해서 주신 교훈을 이때에 사는 저희들이 다시 한번 들었습니다. 우리 정부나 국민이 다 같이 우리는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은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먼저 남을 대접하라 하는 이 교훈대로 우리가 살아나가는 동안에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 온 사회에 정의가 넘쳐흐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먼 데 가서 힘쓸 것이 아니라 우선 내 주변에서 내 가정에서 내가 다른 이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이 교훈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고 우선 나로부터 이런 생활이 시작되므로 온 사회에 퍼질 수 있는 축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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