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20-30/ 예수를 보고자 하노라 / 한경직 목사 2014-08-25 19:34:47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요한복음 12장 21절의 말씀을 다시 봉독합니다.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멀리 헬라 나라에서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경건한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예수의 제자인 빌립에게 와서 예수를 뵙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로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직접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당시 대표적인 문화인들, 곧 헬라 사람들도 모두 예수를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깊은 심령 속에 영적인 기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갈을 멈추어 줄 만한 지도자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에 사는 모든 사람도 모두 참 예수를 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옛날 헬라인들이 예수의 제자 빌립에게 와서 간청한 것처럼, 오늘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와서 예수를 보여 달라고 구합니다. 옛날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보여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힘을 썼습니다. 우선 말로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첫 순교자 스데반을 비롯하여 베드로, 빌립, 여러 사도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때로는 환난과 핍박을 당하나 입으로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제 1세기부터 예수의 제자들은 글을 통하여 예수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책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제자 마태는 마태복음을 썼고, 마가는 마가복음, 누가는 누가복음, 그리고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오늘을 특별히 성서주일로 지키게 되는 것도, 온 성경이 한마디로 우리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까닭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모든 기독교 서적이 그러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재능을 따라 어떤 이들은 음악을 통하여 예수를 보여 줍니다. 찬송가 가사를 지은이들이나 그 곡조를 작곡한 이들도 그 근본 목적은 예수를 보여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헨델의 <메시아> 등 위대한 작품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특별한 재능, 예술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이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성화를 그린 이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 가운데도 특별히 호프만의 예수의 초상화나 다빈치의 성 만찬의 그림이나 스텐벅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등의 성화는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예술인 중에도 이 방면에 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한데 모두 감사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문학, 시, 소설 그리고 영화를 통하여도 예수를 보여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은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일찍이 해방 후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에 피츠버그에 가보니 거기 이스트 리버티(East Liberty) 장로교회란 큰 교회가 있는데, 그때에 저와 같이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스키너(Skinner) 목사라고 하는 분이 그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예배당은 제가 옛날 학생으로 공부할 때에 미국의 큰 재벌이었던 멜론가에서 수백만 불을 들여서 전부 돌로, 또 고딕(Gothic) 스타일로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이었습니다. 저는 친구 목사의 초청을 받아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올라가니 바로 내 앞에 영어로 ‘We would see Jesus.’ ‘우리는 예수를 보고자 하노라.’라고 하는 말씀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읽을 때에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강단에 서는 목사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를 보여줄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킨 까닭입니다. 사실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누구나 참 예수를 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20세기에 사는 인류들, 핵우산 아래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며 불안과 공포 중에 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누구나 그 깊은 심령 속에 구주를 찾습니다. 예수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 예수를 믿는 이들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말로도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고, 글로도 곧 문서와 서적으로도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고, 특별히 재능을 받은 이들, 곧 음악가나 예술가는 그 노래, 그림, 또는 조각을 통하여도 예수를 보여주어야 하며, 혹은 문학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시나 소설 등을 통하여서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사실 이상의 방법들은 그 방면에 특별한 은사를 받은 소수에 제한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 또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길이 무엇일까, 혹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귀의 시대에서 눈의 시대로 변하여 간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전에는 라디오를 귀로 듣는 데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눈으로 TV를 보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글을 읽기보다는 그림이나 영화 보기를 더 즐거워합니다. 현대에 관광의 붐이 일어나는 것도 귀로 듣는 것보다 실지로 눈으로 보기를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또 관광으로 가는 이들은 흔히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이 또한 보기를 즐겨하는 현대인의 심리입니다. 또 옛날 사람들도 사실은 듣는 것보다도 보기를 좋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말이 내려옵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모습을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예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우선 우리 하나하나의 개인 생활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얼굴, 우리의 성품, 우리의 말, 우리의 성결한 생활, 또는 우리의 봉사 자체가 예수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면을 생각할 때에 누구나 송구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기억할 엄숙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찍이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분이 어떤 목사를 향해서 “저 목사는 어떻게 목사로 보이지 아니하고 꼭 경관처럼 보인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처럼 보이지 아니하고 경관처럼 보인다고 하면 그건 좀 곤란할 겁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그분이 제직인데, 또 다른 제직을 향해서 하는 말이 “저 집사는 성품이 그저 당나귀 같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의 성품이 당나귀 같다고 하면 그건 좀 곤란할 것이란 말이오. 믿는 이들이 모여 앉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에, 특별히 그 험구를 잘하는 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험구를 잘하는 이가 말을 하려고 들어서니까 그 옆에 앉았던 이가 하는 말이, “그 쓰레기통 덮개를 열지 말라.”고 그렇게 충고합디다. 여러분, 물론 얼굴의 표정이나 성품은 스스로 관리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라고 하는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숨은 생각은 우리의 얼굴, 우리의 성품, 우리의 언행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뿐더러 자연히 점차로 우리 언행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 자체가 점차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은 가정생활을 통하여서도 이 세상에서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의 가정은 간단히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결, 둘째는 화평, 셋째는 봉사일 것입니다. 현대는 한국을 비롯하여 온 세계가 가정의 위기를 당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경건치 못한 가정이 증가됩니다. 화평치 못한 가정이 점점 많아질 뿐 아니라, 파탄 이혼의 가정의 수가 격증하여집니다. 따라서 사회는 불안하여지고, 불량 소년소녀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각종 범죄는 날로 증가되는 것이 세계적인 한 현상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세계에 있어서 우리 믿는 이들은 우리의 가정을 통하여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을 모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하여도 또한 예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지체는 많습니다. 아무리 지체가 많아도 지체 속에 불화는 없습니다. 이런 면을 생각할 때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이점에서 특별히 실패하였습니다. 분쟁과 분열이 너무나 많았고, 연합 사업에는 어디나 열의가 부족하였습니다. 이점을 생각할 때에 실로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생활은 화평하고 성결하고 협동할 줄 알고 화해와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 100주년을 기하여 특별히 이 죄를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오직 화평한 교회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우리 가정에 모시고, 우리 교회에 모실 때에 자연히 이 믿지 아니하는 세상은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자연히 성장합니다. 봄 동산에 각종 꽃들이 만발해서 향기가 가득할 때에는 벌과 나비는 각처에서 스스로 모여 듭니다. 교회의 화평과 사랑과 성결의 향기가 가득할 때에 교회는 저절로 부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꼭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주기로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 계절이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크리스마스의 뜻을 이런 말로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크리스마스는 말씀, 진리 곧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할 때에 주님은 솔직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의미심장한 말씀이올시다. 물론 하나님 지으신 천지 만물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하나님을 좀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과거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여러 말로 가르쳐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하였습니다. 최후로 그 독생자를 친히 보내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게 하여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얼굴과 성품과 교훈과 십자가와 모든 하신 일로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개인생활, 가정생활, 그리고 교회생활을 통하여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북에서 오신 분은 아마 아시는 분 더러 계실 거예요. 이북 피현이라고 하는 곳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그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신,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계시던 최명준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최 목사님은 별명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흔히 최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듣건대 그 옛날은 이제 촌사람들이 나무를 소에다 싣고 와서 팔지 않았습니까? 또 시가지에 사는 사람은 그 나무를 사서 불을 때고 살았는데, 어떤 촌사람이 나무를 싣고 와서 파는데 누가 “이거 얼마요?” 물어보니까 에누리를 많이 해서 팔 생각으로 아마 한 곱을 부른 모양이오. 그런데 그저 이분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갑시다.” 그래요. 그저 에누리 생각해서 불렀는데, 아무 말 없이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주더란 말이오. 그래서 나무를 다 팔고 가서는 자기 동네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했다 합니다. 아, 난 오늘 횡재했다고. 그저 에누리를 많이 해줄 생각으로 곱을 불렀는데 아무 소리 안하고 돈 다 주더라고. 그러니까 그 듣던 사람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던가? 머리가 하얗지 않던가?” “아 그렇더라.”고 하니 “임자, 큰벌 받겠네. 그 최 예수로구먼, 최 예수. 본래 그 최 예수는 에누리 하는 법이 없는데, 그저 말하는 대로 다 주는 사람인데, 그걸 모르고 자네가 그렇게 곱을 받았으니 그거 하나님께 벌 받지 않겠나?” 그래서 이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돈을 절반 가지고 가서 절반을 도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무엄한 말 같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임을 능히 감당하리만큼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본래 더럽고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이나 하나님께서 저희를 불러서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 다 사하여 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사오니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모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과연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생활, 우리의 교회생활이 참 예수님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만큼 심히 높은 자리, 경건한 자리까지 다 끌어 올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간구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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