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4:17-21/ 믿음과 기다림/ 조용기 목사 2014-09-24 12:08:01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과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그 자체가 응답이 아니고 실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이란 헬라어로는 ‘휘포스타시스’인데 이는 ‘밑에’라는 ‘휘포’와 받침대로 받친다는‘히스테미’라는 두 단어로써 이루어진 복합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응답을 얹어놓는 밑받침 대라는 것입니다. 화병의 꽃이 응답이라면 믿음은 그 화병의 꽃을 얹어놓을 받침대를 만들어 놓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믿음 자체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밑받침대가 예비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그 위에 얹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믿었는데 왜 안 이루어집니까?” 그런 고민을 제게 합니다. 믿었다는 것은 응답을 얹어놓을 받침대가 준비 되었다는 것이지 믿음 그 자체로 말미암아 응답이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응답이 올 수 있도록 받침대를 준비해 놓고 만반의 예비를 해놓았다는 것입니다. 받침대가 준비되었으면 이제 응답을 얹어 주시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오면 응답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본론> 1. 믿음이란 말씀 위에 서는 것 믿음은 합리적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자꾸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은 큰 낭패에 부딪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예수님이 죽은 지 3일 만에 무덤 문을 헤치고 일어났다는 것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한 창조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좁은 이성이나 과학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조건 말씀을 통해서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마음에 느낌에 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의 느낌은 항상 변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평안할 때도 있고, 불안할 때도 있고, 가슴이 떨릴 때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분대로 여러분 사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분이 오늘 기차가 떠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기차가 제시간에 안 떠납니까? 기분이 나빠도 기차는 떠나는 것입니다. 해외여행을 하는데 내가 오늘 기분이 탐탁치 않으니 비행기가 안 떠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비행기는 떠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분이란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이지 그 기분 때문에 환경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마음에 느낌에 서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서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믿음은 헤엄 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불합리한 고로 나는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 역시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합리적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서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감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감각을 극복하는 것이지 감각에 따라서 믿음이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시고 나사로의 무덤가에 갔을 때 이미 오라버니는 무덤에 들어 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죽은 지 나흘이고 코로 냄새를 맡아 보아도 썩은 냄새가 납니다. 감각에 의지하면 오라버니가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각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주님은 믿음이란 감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것을 번연히 보고도 살아날 것을 믿으라. 썩은 냄새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살아나실 것을 믿으라. 그래서 감각을 극복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지 감각을 따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고후 5: 7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환경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좌지우지하면 믿음이 아니지요.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때 환경으로 물위로 걸어갈 처지가 못 됩니다. 캄캄한 밤바다 그것도 폭풍우가 불어 풍랑이 요란스럽게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그가 걸어갔습니다. 그는 환경을 바라보면 결코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에 서는 것이 믿음이지 환경을 바라보고 좌지우지 하면은 결코 믿음에 설수가 없습니다. 롬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에만 서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 이외에 어떠한 이성도 감정도 감각도 환경도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말씀 하나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말씀이 나의 어두움에 등이 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도 말씀이 나에 가는 등불이 되고 말씀이 나의 의지할 반석이 됩니다. 어떻게 지각이 흔들리고 진동해도 말씀의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말씀에 의지하고 아무리 감각적으로 두려움이 휩싸여 와도 말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앞을 봐도 말씀, 뒤로 봐도 말씀, 옆을 봐도 말씀, 위로 봐도 말씀, 밑을 봐도 말씀 말씀에 완전히 포위되어 말씀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에 전적으로 목숨을 걸고 내어 맡기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없는 감각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분이 좋다고 해서 이제는 “믿습니다.”고 그랬다가 기분이 싹 가라앉으면 “안 믿습니다.”하면 그 믿음은 형편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어떠한 이성도 어떠한 감정도 감각도 어떠한 환경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말씀을 안고 죽더라도 죽겠다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버리면 내가 버림당할지라도 나는 말씀을 끌어안고 살겠다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아는 것과 믿음을 선택할 때 아는 것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롬 4:19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으니 머리가 다 빠졌지요. 눈이 침침하지요. 허리도 굽지요. 아침에 일어날 때도 벌떡 일어나지 않고 꾸물꾸물하고 일어납니다. 앉을 때도 천천히 앉고 일어서는 것도 지팡이를 의지해서 일어서고 그렇게 날쎄게 뛰고 달리던 그가 이제는 천천히 걸어서 갑니다. 무거운 것을 이제는 들고 옮길 수 없습니다. 자기가 늙은 것을 몸에서 깨달았습니다. 완전히 늙은 할아버지인 것을 자기는 알아요. 모르는 것 아닙니다. 바보 아니니까. 그 아내도 곱디고운 얼굴에 주름투성이입니다. 그리고 몸에도 뼈에 가죽만 남아 있습니다. 이미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아흔 살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처다 봐도 로맨틱한 마음이 하나도 안 생깁니다. 포옹하고 싶은 생각도 안 생겨요. 곁에 가면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납니다. 압니다. 아내가 늙은 것을 번연히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지식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정말 아브라함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에 서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심과 믿음 중에서 의심을 포기하고 단호하게 믿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롬 4:20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에게도 의심이 생겼습니다. 의심이 왔다 갔다 했어요. 그가 여든 다섯 살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밤중에 불러내어 하늘에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너희 자손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들어와서 그만 하갈을 첩으로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중동에 저런 비참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의심이 안돌아 온 것은 아닙니다. 그는 믿었으나 의심이 그의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의심을 오랫동안 머멀러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이 손님으로 들어오면 얼마동안 안방에 있다가 곧 쫒아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었다고 해서 의심이 전혀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들락날락 밀물같이 들어왔다가 썰물같이 쫓겨나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하고 같이 살자고 그냥 함께 들어앉으면 안 됩니다. 의심이 들어오면 “아이고, 나와 함께 살자. 이제는 참 좋은 친구가 되자.” 이러면 안 되지요.의심이 들어오면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너 아무래도 웃기는 놈이구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물리치고 믿음을 선택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심이 들었어도 오랫동안 의심하고 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의심을 쫓아내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어 버린 것처럼 의심을 쫓아내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로 믿음에 섰습니다. 의심과 믿음가운데 그는 믿음을 선택한 것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롬 4:17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여러분 산 사람은 살릴 수 있는 것은 의학적으로 할 수 있지만 죽어서 이미 피가 썩은 사람은 살려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벌써 4분 이상 숨을 안 쉬면 뇌세포가 죽어서 살아나도 식물인간이 되는데 죽은 인간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은 수없이 죽은 사람을 살리셨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신다 . 지금 눈에는 안보여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하나님은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가능이 가능이 된다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환경을 바라보고 불가능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재물로 받치라고 할 때 그의 종자들보고 말하기를 내가 아이와 같이 산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고 아이와 함께 내려오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히 이삭을 제물로 드리러 올라가면서도 죽여서 태워서 번제를 드리더라도 잿더미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도로 살려줄 것을 믿었습니다. 억척같은 믿음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너희 후손 이삭으로 말미암은 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일구이언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희 후손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라고 하셨으니 이삭을 제물로 드려 놓아도 이삭은 잿더미 속에서 살릴 것을 믿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졌습니까? 죽여서 태워서 제물로 드려도 잿더미 속에서 이삭을 도로 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롬 4:21~22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가 85세에 아들을 얻겠다고 약속을 받은 이후에 기나긴 25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가 없다. 내나이 100살이 되고 아내가 90살이 되어도 자식은 준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서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믿을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 삶의 가장 큰 자산도 믿음 아닙니까? 우리가 장사를 해도 신뢰를 얻어야 장사를 잘할 수 있습니다. 무역을 해도 신뢰를 해야 무역을 할수 있습니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때 처음 우리 한국에 무역이 인삼으로 무역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분이 인삼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남아에 인삼을 수출해서 꽤 재미를 보았는데 그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인삼을 파는데 좋은 인삼은 위에 얹고 밑에는 못된 인삼을 넣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인삼이 잘 팔리니까 인삼을 속여서 수출하고 그 다음에는 클레임이 걸려서 전 물량을 다 물어주는 어려운 일을 당했고 그 이후에 신뢰를 잃으니까 다시는 인삼주문이 안 들어와서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하면은 신뢰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그 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잖아요. 신뢰가 크나큰 자산인 것입니다. 사람도 하물며 신뢰를 배반하면 몹쓸 사람이 되는데 하나님이 신뢰를 배반하면 우주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삼상15:29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이러쿵저러쿵 변합니다만 하나님은 변치 않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할 것 없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 얻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천당갈 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기대와 기다림을 동시에 가졌습니다. 여러분 75세에 갈대아우를 떠날 때 하나님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는 자식 없이 사라와 둘이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시험이 들어와서 조금씩 의심이 들어왔을 때도 있지만 곧장 회개하고 하루 이틀도 아닌 25년의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100살에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분 당장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오래 기다려야 될 것도 있습니다. 모세는 무려 40년을 기다려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 머슴살이 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은 10년의 세월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종살이를 했고 3년 동안 감옥살이한 이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너무 쉽게 낙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래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롬 4:18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기다린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랄수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을 쭉 내밀고 바라면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시130: 5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7절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바라고 기다리는 것 여러분 정말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이 육자회담에 출석해서 미사일이나 원자탄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쭉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까? 재깍재깍 일이 이루어지면 좋은데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세상일은 기다린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다리는 자가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조급해서 그만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니까 천사가 데리고 안내를 하는데 어떤 방에 들어가니까 굉장히 포장한 소포가 많이 있더랍니다. “왠 소포가 이렇게 많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서 우리 천사들이 응답의 소포를 들고 가니까 이미 이사를 가버리고 없더라.” 낙심을 해서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포를 도로 가져와서 지금 창고에 쌓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이미 믿음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배달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믿을 것인가? 아브라함의 조상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가 어떻게 믿을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응답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는데 왜 응답 안 옵니까?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내가 믿었는데 왜 병이 안 나아요? 내가 십일조도 드리고 성수주일하고 믿었는데 왜 당장 복이 안와요? 내가 믿음으로 가족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왜 구원을 안줘요. 그런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는 집의 기초와 같습니다. 기초가 완성되어야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기초를 완성해 놓은 것입니다. 집은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는 그 찬송에도… 내가 곡조 틀렸지만… 입은 내가 열어 놓고 있어야 채우는 것은 하나님이 채우는 것입니다. 입이 응답이 아닙니다. 입은 내가 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채우는 것은 하나님이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을 열었는데 왜 안 채워집니까? 원망하지 마십시오. 채우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자체가 응답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위에 굳게 서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을 자꾸 밀어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자꾸만 마음에 느낌이나 육체적인 감각이나 환경을 통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병든 사람이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도 병이 안 낫습니다. 늘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와서 ‘내 병은 안 나았다. 하나님은 응답 안 해주신다. 나는 이 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니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기록하였으되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말씀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꽉 들어차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없으면 안돼요.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잠13:13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생각이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 놓으면 안 됩니다. 어떠한 일에도 부정적인 생각이 오면 하나님 말씀으로 그를 밀어 내어서 대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영적인 전쟁 아닙니까? 전쟁이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쳐들어오면 막아야 되고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의 검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내야 돼요. 사람들은 많은 시간동안 부정적인 생각이 쳐들어오면 그것을 내버려 놓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서 슬픔과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도록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안돼요. 그러면 점점 파괴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왔다 하면 곧장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서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침노하는 것은 전쟁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을 자꾸 입으로 시인하고 말씀으로 싸우고 말씀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인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끌어안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기대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과 함께 하면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이루어진 모습을 우리는 늘 바라보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꿈꾸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의 형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 마음속에 꿈을 꿔보고 이해합니다. 나무, 그러면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을 생각합니까? 소나무, 밤나무, 가시나무 온갖 나무를 생각하고 ‘아~ 나무’, 바위 그러면 ‘아~ 돌멩이’ 생각을 하고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시냇물 하면 내가 시골에서 자랄 때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안 그러면 한강물을 생각하고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늘 그러면 ‘아~ 별들이 있는 저 하늘’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상상을 통해서 이해를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은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언제나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말을 쓰려고 죽을 애를 씁니다. 내가 설교할 때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상상을 하거든요. 상상을 해야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해야지 상상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하면 성도들은 이해를 못하고 저 무슨 말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을 상상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든 모르든 무슨 말을 들으면 곧장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입니다. 옷이라고 하면은 ‘옛날 한국 옷이냐, 현대 옷이냐.’ 확실히 모르지요. 옷을 한복을 입었다 하면은 한복을 상상하고 양복을 입었다 하면은 양복을 상상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하면은 미니스커트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상상으로써 자기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과 더러움에 씻어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병 고침을 받아서 활발하게 된 모습을 꿈꾸고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 내가 복을 받아서 연보도 많이 하고 이웃에 구제도 많이 하고 풍족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천사들의 손에 받들여 천당에 올라가는 것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상상해서 자기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믿음에 굳세게 서는 삶을 살려면 언제나 긍정적인 꿈을 꾸고 상상하고 생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설뿐 아니라 말씀이 이루어진 모습을 우리 마음속에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애굽에서 올라왔을 때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동, 서, 남, 북을 바라보니까 “네 눈에 보이지? 보이는 저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 아브라함이 꿈꾸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상상하게 만들어 주었지요. 85살 되는 아브라함을 밤중에 불러내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려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상상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한없이, 한없이 헤아리고 나니까 하나님이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이제는 눈만 감으면 별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별들을 상상하고 별들을 꿈꾸면서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이 잘되는 것을 상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잘되는 것을 상상한번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강건하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상상하고 꿈꾸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머릿속에 상상하고 꿈꿀 수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상상도 못하고 꿈도 못 꾸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신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서 머리를 못으로 박아서 장대에 높이 달고 “저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고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뱀에 물려서 죽어가면서 머리에 못이 박혀서 매달려 있는 불 뱀을 바라보았었습니다. ‘아, 불 뱀이 이미 심판을 받아 머리에 못이 박혀 장대에 매달렸으니 불 뱀은 패배했다. 우리는 저 불 뱀을 바라보므로 이미 승리했다.’ 그것을 확실히 바라보고 꿈꾸고 승리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모든 독은 해소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예수가 그냥 매달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상상을 동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내 죄 짐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죄 짐을 짊어졌으니 나는 죄 짐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세속과 마귀에 묶였는데 그 짐을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으니 세속과 마귀의 짐이 풀려난 것을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 연약한 것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니 병과 연약의 짐이 풀린 것을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내 저주를 다 짊어지고 가셨으니 내 저주가 벗어진 것을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 승천한 예수님, 예수님 따라 나도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상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된 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그려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믿음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고 꿈꾸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겔12:28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사55:11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했으니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항상 마음속에 꿈꾸고 상상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단호하게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예 믿기로 결단을 내리고 이제는 믿음으로서 살든지 죽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믿고 죽어도 믿는다. 흥해도 믿고, 망해도 믿는다. 성해도 믿고, 패해도 믿는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믿음으로 인생을 종결짓겠다.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썰물처럼 밀물처럼 왔다갔다 이렇게 하면은 하나님은 도와주려고 했다가 안 도와주려고 했다가 도와주려고 했다가 안도와 주려고 했다가 하나님도 우리를 신뢰할 수 없어요.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어떠한 형편이 되어도 믿는다. 욥을 보십시오. 욥이 그 어려운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믿었다. 그의 재산 다 잃어버리고 10명의 자식이 다 비명행사하고 온몸이 병들어 가지고서 고통을 당하고 마지막 의지하던 아내조차 욕하고 떠나가고 친구들조차 전부 네가 죄지어서 그렇다고 그를 손가락질하고 절대절망에 처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찌어다. 마귀가 절대로 욥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는데 마귀에게 시험을 해보라고 했는데 욥은 절대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증명했습니다. 나중에 노년에 하나님은 욥을 배로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단호한 믿음에 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입술로 시인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 6: 2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잠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막11:23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여기에 많이 실수합니다. 생각은 올바르게 긍정적으로 하고 꿈도 꾸고 믿기로 결단했으면서 말은 언제나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여기에 가장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려면 너무나 환경이 부정적이고 사람들이 자꾸 부정적으로 묻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받고 난 다음에도 나가면 기분이 좀 어때요? 자신은 기분이 안 좋거든. 그러나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고 “기분이 아직 별로 좋지 않아요.” “요사이 어떻게 잘 삽니까?” “아, 주님이 나의 축복이 되시니 잘삽니다.” 그렇게 말해야 될 것인데 “경기가 나빠 가지고서 살기가 힘들어요.” “행복합니까?” “아이쿠, 성경에는 ‘행복 하라’ 했는데 사실은 우리 집안의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말로써 자꾸 부인합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질병인 것입니다. 생각은 말씀으로 긍정적으로 하고 꿈도 바라봄의 법칙으로 올바르게 꿈을 꾸고 마음에 믿기로 결심을 하고 난 다음에도 말로써 다 부인해 버리고 말로써 패배자가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내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바 되었다 했으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을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할 때 마지막에 이름을 바꾸어서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 사라! ‘많은 자식의 여주’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 부를 때 이름을 많이 부르지요. 여러분 우리 집에서 우리 집사람이 날보고 용기야 했다가는 벼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여보라고 하지 용기라고 말 안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자기 남편의 이름을 부릅니다. 남편도 아내 이름을 부릅니다. 하루 종일 서로 같이 있자니까 이름을 많이 부르지 않습니다. “식사하십시오. 옷 갈아입으십시오. 이리 오십시오. 저리 가십시오. 손님이 왔습니다.” 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여, 많은 조상의 어미요.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습니다. 자식의 흔적도 그림자도 없는데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늘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생겨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입술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귀를 쫓아내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 내셨습니다. 말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이 긍정적이 되었으면 꿈을 가졌으면 믿음을 가졌으면 그것을 말로써 표현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플러스 효과와 마이너스 효과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플러스 효과를 전부 보태 놓으면 나중에 큰 축복이 되어서 눈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마이너스 효과를 자꾸 보태면 산사태처럼 파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플러스 효과가 뭡니까? 감사인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을 할 때마다 플러스 효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없는 것조차 믿음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면 플러스 효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해서 감사하면 건강할 수 있는 플러스 효과가 오고 물질에 대한 감사를 하면 물질로 축복받을 플러스 효과가 오고 평화에 대한 감사를 하면 평화가 올 수 있는 플러스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스 효과란 놀랍습니다. 여러분이 자꾸만 쌓아 놓으면 그것이 축복으로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은 마이너스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것도 감사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만 찾고 있는 것 가지고도 감사하지 아니하고 늘 원망, 불평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마이너스 효과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지만 마이너스 효과가 자꾸 쌓이면 나중에 산사태같이 무너지면 파멸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 항상 플러스 효과인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가 바로 플러스 표 아닙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항상 플러스 효과를 발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힘이 듭니다 . 여러분 우리는 감사와 찬송을 해야 되겠다고 늘 말은 하고 생각은 하면서 실천은 안합니다. 실천은 늘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 옵니다.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께서 하나님 앞에서 수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중에 수표를 바꿀 때 플러스 효과와 마이너스 효과를 가지고서 가감으로 바꾼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와 찬송을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수표에 점점 액수가 하나님이 높게 기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너스 효과가 있는 사람은 점점 마이너스되어 나중에 수표가 효과가 없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심하고 우리 있는 것을 찾아서 감사하고 없는 것이라도 있을 것을 감사하고 찬양을 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면서 마이너스 효과를 쌓아 올렸습니다. 늘 원망, 불평, 탄식을 해서 그것이 나중에 결정적으로 파멸의 사태가 되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광야로 쫓겨나가 40년 동안 방황하며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이너스 효과를 여러분 생애 속에 세워 놓지 마십시오. 언제나 플러스 효과인 감사와 찬송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상 8:56에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고 말씀했으며 골 2: 7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조금만 감사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넘치도록 감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이뤄진 것을 믿고 바라보고 결단하고 믿고 하나님께 플러스 효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면 이제는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이 밑받침이 이루어지시니 하나님이 위에게 응답을 주실 날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날뛰면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농사가 씨앗을 뿌려놓고 오래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믿고 난 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고 난 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집의 기초가 이루어졌으면 그 위에 집을 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줄 것을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민23:19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도했으면 응답을 받았을 텐데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응답이 되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은 남보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1분 더 참는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희극작가인 F. 라블레 역시 “기다릴 수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은 돌아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었으면 절대로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를 끝까지 하십니다. 떨어지면 낙동강, 떨어지면 낙동강 할 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48년간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기다림을 가졌습니다. 이제는 지쳐서 못 기다리겠습니다. 이제는 절망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언제나 오시더라구요. 그러면 내가 언제는 “주님, 좀 일찌감치 오시지 그래요. 이렇게 사람을 애타게 하시다가 응답을 하십니까?” 그래도 주님은 대답하지 않으세요. 언제나 기다리는 것을 연습시켜 주십니다. 아예 마지막 벼락에 가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기다리면 그때 주님께서 언제나 손 내밀어서 붙들어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가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시40: 1에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이 성경에는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야! 참 얼마나 오래 기다렸기에 시편 기자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히10:38에도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감사, 찬송하면서 기다리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된다. 그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안 되지요. 그 믿음으로 즉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오래오래 기다려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송하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감사하며 나아가야 될 것인 것입니다. 믿음대로 이루어지시는 기한과 방법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놓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고 하나님께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몸 찢고, 피 흘려 대속해 주신 그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야훼 하나님이여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감화, 감동을 주셔서 내 아버지 하나님 믿음 그 자체가 응답이 아니라 믿고 나면은 응답을 받을수 있는 기초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은 받침대로 그 위에 응답의 화분을 올려 주실 때까지 오래참고 기다리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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