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향연>편에 나타난 동성애/ 동성애자의 양심고백’ 전문
2015-11-13 17:49:59

오늘날처럼 기독교 윤리가 절박하게 필요한 시대는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일찌가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이며, 사람들이 절대적 가치보다는 상대적 가치를 중시하는 다원주의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 기준을 인정하는 기독교 윤리와 상대적 가치 기준만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사회와의 갈등은 일찍이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고 주장하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상대주의와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서 좋음의 이데아를 제시하는 플라톤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윤리가 대답해야 하는 문제 중 하나인 동성애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DSM) 목록에서 삭제하였으며, 1993년 미국 국립암연구소가 X염색체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유전자를 발견하였다. 또한 1994년에 스웨덴이 유럽 최초로 동성부부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였으며, 1996년 미국 대법원은 동성애자 차별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또한 2000년 7월 미국 버몬트주의 한 교회에서 미국 최초의 동성부부가 탄생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1999년 10월 동성 커플 사이의 결합을 공인하는 시민연대협약(PACS)을 통과시켰다. 이성 또는 동성 커플이 동거계약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3년 이상 지속적인 결합을 유지한 사실을 인정받으면, 사회보장, 납세, 유산상속, 재산증여 등에서 보통 부부와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협약이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동성 커플에게 자녀 입양권을 허용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 임하는 미국 공화당의 정강 정책 초안을 살펴보면, 동성애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시민법 등에 강경하게 반대한 1996년 정강 정책에 비해 많이 후퇴하여,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정도에 그쳤다. 또한 유럽에서는 어린이용 이야기책에 이혼한 아버지가 동성애자와 함께 산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야기가 있기도 한다. 또한 1948년 미국을 대상으로 한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37%의 남자가 동성애 경험을 했으며 4%의 남자가 평생 동성애 관계만 유지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동성애 문제가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심각해보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 중 하나인 것 같다. 미국의 경우 70년대 소위 성(性)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미국 장로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성애를 자처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안수를 받을 수 있는지가 특히 문제였다.

미국 장로교회는 동성애 연구 위원회(Task Force to Study Homosexuality)를 설치하여 1978년 총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위원 다수가 동성애자 안수에 찬성을 했으나 총회는 그와 반대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 장로교회의 공식 입장이 제기되었지만, 이 문제는 계속 논의중에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논의가 잘 보여주듯이, 동성애 문제가 사회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문제가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 차원으로 확대될 때이다. 최근 논의의 중심도 동성애 자체가 옳은 것이냐에 있기 보다 동성애자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우해야 할 것인가에 있다. 동성애자가 서로 결혼해서 한 단위의 가족을 이룰 수 있으며 자녀를 양육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등의 문제가 한 가지 예이다.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교회 공동체가 동성애자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해야 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동성애를 적극 주장하거나 동성애 금지를 반대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미는 한 가지 주장은 인류의 역사를 볼 때 동성애가 항상 금지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그러한 예로 제시된다. 고대의 일부 그리스 사회가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적 관계로 여겼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인 <항연>(Symposion)편에서 그러한 관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향연>편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 사회의 동성애 풍습과 이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대의 동성애 풍습이 젊은 세대의 교육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선 밝히고자 한다.

또한 플라톤이 당대 그리스 사회의 잘못된 교육을 비판하면서 아울러 당대의 동성애 풍습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흔히 소크라테스(Sokrates)를 대표적인 동성애자로 꼽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이 글은 고린도전서 6장 9-10절과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강하게 정죄한 동성애가 고전 그리스 사회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성행했으며, 그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II

동성애(同性愛)는 어떤 사람이 동일한 성(性)을 지닌 사람에게 정신적인 면이나 육체적인 면에서 성적으로 끌리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homosexuality'라는 말에서 'homo'는 "동일한"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지,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가 아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애(異性愛, heterosexuality)와 반대되게, 남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와 여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모두 뜻한다. 그 중 여성 사이의 동성애자는 레즈비언(lesbian)으로 불리우며, 남성 사이의 동성애는 남색(paiderastia)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남색'은 성인 남자 사이의 성적 관계를 뜻하기 보다, 성인 남자와 젊은 청소년 사이의 성적 관계를 뜻한다. 'Paiderastia'는 '어린이'를 뜻하는 'pais'와 '사랑'을 뜻하는 'eros'의 합성어이다.



이 글에서 주로 살펴볼 텍스트는 에로스(eros), 즉 사랑을 주제로 삼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항연>이다. 이 대화편은 이성에 대한 사랑도 부분적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주로 성인 남자와 젊은 청소년 사이에 이루어지는 남색을 다룬다. 여기서 플라톤이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궁극적 이유는 인간의 신체적 욕구가 어떻게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되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결국 인간의 욕구는 철학(philosophia)을, 즉 학문을 하는 것으로, 즉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우선 여기서 '에로스'(eros)라는 용어가 무슨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밝혀야 한다. '에로스'는 에로스 신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쓰이기도 하며, '사랑' 또는 '욕구'(desire)라는 일반 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보통 처음 경우에 'Eros'로, 둘째 경우에 'eros'로 쓴다. 물론 에로스 신외에도 아프로디테 여신이 사랑을 대표하는 그리스 신이기는 하지만, <항연>편의 논의 대상은 에로스 신이다. 이는 여기서 남색이 주로 논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로스'는 '성적(性的) 욕구'라는 좁은 의미뿐 아니라 모든 욕구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특히 둘째 의미는 소크라테스가 보고해주는 디오티마(Diotima)의 연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한 경우 성적 욕구는 보다 넓은 의미의 욕구나 동기가 특정 방식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보통 '우정'(philia)이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 사이에 이루어지는 애정을 가리키지만, 이 개념은 '에로스'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항연>편에 나타난 '에로스'는 매우 폭넓게 쓰이는 용어이다. 파이드로스(Phaidros)의 연설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설에 이르기까지 '에로스' 개념이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서 에로스 신이 여성을 사랑하는 신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향연>편에서는 동성애를 대표하는 신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향연'의 그리스어는 'symposion'이다. 'symposion'은 '함께(sym) 마신다(posion)'는 뜻이다. 즉 '술자리'를 뜻하는 단어이다. 향연에서 주인과 손님은 모두 남자인데, 향연은 집에서 남자들이 거주하는 곳 중에서 가장 큰 방인 안드론(andr n)에서 이루어진다. 기원전 7-6세기의 고대 그리스에서 향연은 당시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던 귀족들이 서로 단합을 꾀하던 자리였다.

귀족 자제들은 술 따르는 자와 배석자로서 참여했으며, 성인 참석자로부터 윤리적 교훈을 받으면서 동시에 동성애적 관심도 받았다. 성인 남자는 자신의 술잔을 사용해서 취하도록 술을 마실 수 있었던데 반해, 귀족 자제들은 보통 술을 마실 수 없었으며, 같이 술을 마시도록 허용되는 경우에도 공동 술잔을 사용해서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실 수 있었다.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종류의 일을 화제로 삼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귀족 자제들은 성인 남자의 사회에 입문하게 되었다.

플라톤의 <항연>편이 쓰여진 기원전 5세기 말엽 그리스의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였지만, 향연은 여전히 귀족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성인 남자만 향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어린 청소년의 참석은 금지되었다. 수종을 드는 역할은 남녀 종들이 떠맡았으며, 식사 의식과 음주 의식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음주 의식(ritual)이 더 강화되었다.

식탁이 다 정리되면, 종이 손님의 손을 씻기며 때로 꽃으로 손님의 몸을 장식해주며 향유까지 뿌려준다. 향연의 참석자는 제일 먼저 순수한 포도주를 맛보고 나서 다이몬(daimon) 신을 기리는 찬송을 부른다. 이어서 포도주를 그릇에 담아 물과 섞는데, 보통 물과 포도주의 비율은 5:2이다.

그런 다음 음주 의식을 주관하는 자(symposiarchos)를 선출하는데, 그는 다른 사람과 의논하여 물을 포도주에 섞는 비율, 섞을 때 쓰는 그릇의 수, 마실 때 사용해야 할 잔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는 보통 만취를 유도하는데, 참여자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도록 명한다.

플라톤의 향연은 위와 같은 당대의 항연과 많은 부분에서 같지만 다른 점도 있다. 파이드로스를 도와 플라톤 향연의 음주 의식을 이끄는 의사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는 만취를 유도하는 당대 관행과는 달리 술을 조금만 먹자고 제안하며, 음주를 도울 여자들마저 향연장에서 내보낸다(Symp. 176a-e). 이는 이 향연에서 이루어지는 논의가 동성애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디오티마도 언급하는 알케스티스(Alkestis)의 경우를 제외한다면(Symp. 108d), <향연>편에서 주로 논의하고 찬양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남성 사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통 술만 마시고 대화는 금지되어 있는 관습과는 달리,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에 관한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Symp. 176e-177e).

그런데 고대 그리스 사회에 동성애가 일부 허용되기는 하지만, 사회 자체는 이성애 중심의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남성 사이의 동성애 관계는 그리스 문화의 전형이 아니라, 상층 귀족 계급의 교육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예외적 문화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항연>편에 나타난 여러 개의 연설은 사랑과 교육의 관계를 특히 부각시킨다. 성인 남성이 청소년을 인도하여 탁월한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적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연설이 이러한 관계를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으로 제시하는데,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향연>편에서 남성과 여성의 사랑이나 여성과 여성의 사랑이 논의대상에서 거의 배제되는 이유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여성이 교육대상이 되지 못했던데 있다. <향연>편의 주제는 비록 사랑이지만, 이 주제를 다루는 관점은 교육적 관점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곧 성인 남자가 될 청소년이 모방하고 배워야 할 모델은 성인 남자였으며, 그 결과 둘 사이에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플라톤의 <항연>편의 배경을 이루는 사건은 아가톤(Agathon)이 기원전 416년 레나이안(Lenaian) 축제의 비극 경연대회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지 이틀 후에 이루어진 향연이다. 그 향연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향연>편에 나오는 내용이 모두 역사적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플라톤은 일부 역사적인 사실을 엮어 일종의 철학적 작품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III

<항연>편에서 향연 참석자들은 사랑을 찬양하는 연설을 하나씩 하기로 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연설들을 통해 사랑에 대한 당대의 견해들을 소개하며, 아울러 그러한 견해들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일방적인 비판이 아니다. 그들의 연설에는 소크라테스의 견해와 일치하는 내용이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 그래서 그들의 연설을 들는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사랑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우선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남색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색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데, 사랑하는 자는 성년 남성이며, 사랑받는 자는 젊은 청소년이다.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를 거쳐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에서 끝나는 연설은 모두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1. 파이드로스의 연설: 동성애의 유익

제일 먼저 아가톤의 향연을 주관하는 자인 파이드로스(Phaidros)가 짧게 연설한다. 우선 그는 신들을 많이 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로스 신을 찬양한 경우가 한 번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가장 나이가 많은 신이며(그래서 부모가 없는 신이며), 인간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신이다. 이러한 유익은 특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사랑의 대상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라는 덕목을 불러일으킨다(Symp. 179b).

파이드로스는 군대 조직과 연관지어 동성애의 유익을 설명한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한 조가 되어 전투에 임하는 경우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앞에서 비겁할 수 없으며, 사랑받는 자가 곤경에 처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군대 조직은 비록 수가 적더라도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다(Symp. 178d-179a). 스파르타(Sparta)와 크레타(Kreta)에서 전투 병력을 양성하는 일이 각 가문의 성인 남자에게 달려 있으며, 따라서 각 가문이 청소년을 일종의 입양 방식으로 받아들여 교육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원래 고대 전투집단의 공동식사를 계승한 것이 향연이라는 점도 이와 연관된다.

그런데 파이드로스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유익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를 공리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 이전 사람들이 에로스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반대된다. 이전에는 축복과 '쓰디쓴' 경험이 섞인 것이 에로스라고 여겼다.

그래서 다음 연설자인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가 항상 좋다는 파이드로스의 생각을 문제삼는다. 좋은 에로스가 있는 반면 나쁜 에로스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에로스를 가장 오래된 신으로 여기는 파이드로스가 향연의 전통적 의미를, 즉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의 연대를 강조한데 반해, 에로스의 혈통을 따지는, 즉 에로스를 상대적으로 젊게 보는 파우사니아스는 전통적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시대에 걸맞게 향연이 청소년에 대해 갖는 교육적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2. 파우사니아스의 연설: 올바른 유형의 사랑으로서의 동성애

우선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에서 고대 그리스 사회가 동성애 관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를 동성애 관계를 완전히 허용하는 국가와 그러한 관계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국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하는 국가로 나눈다. 엘리스(Elis)와 보에오티아(Boeotia)처럼 백성들이 말을 잘 못하는 국가에서는 동성애 관계를 완전히 허용한다. 성년 남성이 젊은 청소년을 설득해서 동성애 관계를 가질 정도로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허용해주지 않는 경우 성년 남성이 청소년으로부터 성적 만족을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Symp. 182a-b).

이와 반대로 이오니아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는 동성애를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서 철저하게 금지한다. 그런데 그러한 지역에서는 동성애뿐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일(철학, philosophia)과 신체 단련을 사랑하는 일도 추한 일로 여긴다. 플라톤의 <국가>(Politeia)편에 나온 교육 프로그램을 고려해 볼 때, 지혜를 사랑하는 일과 신체 단련(gymnastike)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교육을 뜻한다. 이는 파우사니아스가 동성애와 교육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동성애를 허용하는 경우 백성이 훌륭하게 생각하고 서로간에 우정(philia)과 연대(koinonia)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지역의 군주는 이를 체제 불안의 요인으로 여겨서 두려워한다(Symp. 182c).

이는 동성애가 귀족 자제들의 교육과 연결되며, 그래서 참주가 다스리는 형태의 민주정에서는 체제 불안의 요인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잘 보여준다. 파우사니아스는 역사 속에서 그러한 사례를 끄집어 오는데,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의 사랑과 하르모디오스(Harmodios)의 우정이 체제를 전복했던 사건이다(Symp. 182c-d).

아테네의 관습을 살피기 전에, 파우사니아스는 처음의 두 부류의 국가가 모두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 원인을 살핀다. (지혜를 사랑하는데) 게을러서 (청소년을 설득할 정도로 말을 잘 못하는) 국민이 있는 국가가 동성애를 허용하며, 남자답게 (용기를 갖고 군주의 폭정에 맞서지) 못하는 백성이 있는 국가가 동성애를 금지한다. 이러한 언급은 결국 배우는 학생은 능동적이어야 하며 (그래서 남자다워야 하며) 열심히 (즉, 게으르지 않게)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양 극단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하는 아테네가 소개된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동성애에 관한 아테네 법률은 앞서 얘기된 두 부류의 국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더 뛰어나다. 아테네는 동성애 관계에 대해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를 쫓아 다니는 것은 격려받을 일이지만, 아버지는 사랑받는 자 역할을 하는 아들을 그를 사랑하는 자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유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는 사회적으로 수치를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랑받는 자는 그를 사랑하는 자의 추적을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또한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와 동성애 관계에 들어가는데 성공했을 때, 그는 사랑받는 청소년으로부터 성적 만족을 얻는 대신 그를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다. 그의 교육을 받은 청소년이 탁월하지 못한 경우 사랑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성적 만족에 대한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교육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받는 청소년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지식 전수 외의 다른 목적으로, 예를 들어 돈이나 관직 등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애원한다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Symp. 182d-183c). 사랑하는 자와 달리 사랑받는 자는 동성애 관계를 통해 성적 만족을 얻어서도 안된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테네의 동성애 법률 제정의 목적은 성적 만족과 지식 전수라는 상호 교환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있다. 바로 이러한 남색을 하는 자를 바울이 고린도 전서 6장 9-10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라고 정죄하는지 모른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버지가 감독하는 사람을 두어 사랑하는 자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테네 관습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로, 사랑하는 자의 사랑이 교육외의 목적을 위한 천한 사랑인지, 아니면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고귀한 사랑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둘째로,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을 보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보호 장치는 사랑받는 자가 그를 사랑하는 자가 과연 탁월한 능력을 전수할 수 있는 선생인지를 판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한 선생으로 판정되었을 때 지식 전수를 위해 사랑받는 소년이 사랑하는 자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에게 성적 만족을 제공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Symp. 184e-185c). 이에 반해 천한 사랑을 하는 자는 상대방의 탁월한 능력을 증진시키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인이 보기에 비이성적인)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이에 반해 고귀한 사랑을 하는 자는 개발가능한 이성을 지닌 젊은 청소년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파우사니아스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자가 탁월한 영혼을 사랑하면서 성적 만족을 요구하는 이유를 밝힐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지적받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학생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당대 소피스테스가 비판받으며, 그러한 자가 활개를 펼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인 당대 민주정치제도가 비판받는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탁월함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젊은이를 타락시킨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소피스테스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소피스테스는 탁월함을 진리가 아닌 설득술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3. 에뤽시마코스의 연설: 우주적 차원의 동성애

세째 연설자인 에뤽시마코스도 파우사니아스처럼 좋은 부류의 사랑과 나쁜 부류의 사랑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사랑은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된다(Symp. 186a). 그는 두 종류의 사랑에서 보편적 자연 철학을 끌어낸다. 이제 그에게서 사랑은 좁은 의미의 사랑, 즉 인간 사이의 사랑뿐 아니라, 동물의 욕구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다.

이제 좋은 부류의 사랑과 나쁜 부류의 사랑은 질서있고 조화로운 욕구와 그렇지 못한 욕구로 확대 해석된다. 이러한 두 가지 욕구는 에로스라는 한 가지 원리 속에서 조화된다(Symp. 186a-b). 에로스에 두 가지 본성이 있어도 결국 우주를 하나로 묶는 힘이 에로스이다. 이는 연설자의 이름이 '전쟁(machos)을 막는다(eryko)'는 에뤽시마코스라는데서도 드러난다. 두 부류의 에로스를 조화시킴으로써 전쟁을 막고 우주의 질서(kosmos)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그는 생물을 우주의 모델로 삼아, 생물의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론에서 서로 반대되는 힘들 밑에 로고스라는 질서가 깔려 있듯이, 에뤽시마코스에 따르면 에로스의 서로 반대되는 본성 너머에는 결국 보이지 않는 실재인 조화가 있다. 물론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반대의 조화'라는 원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사용한 예인 활과 현을 도입한다. 낮은 현과 높은 현은 서로 반대되지만 결국 조화되어 화음을 낸다.

그는 두 가지 에로스를 두 종류의 음악에 비교하며(Symp. 187a-c), 그래서 에로스 간의 조화는 음악의 화음에 해당된다. 이러한 화음은 일치(homologia)를 나타낸다. 이어서 그는 그의 조화 원리를 체육(gymnastike)와 농경에 적용시킨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보기에 조화 원리는 이미 서로 반대되는 것 사이의 충돌 속에 들어 있지만, 에뤽시마코스는 조화 원리가 반대되는 것들 너머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조화가 오기 전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싸우기 때문이다.

에뤽시마코스의 설명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그는 영혼을 물체화하며, 에로스 안에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후자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경우 서로 반대되는 것이 조화되는 건강은 이성 사이의 사랑을 나타내며, 따라서 남성 사이의 동성애는 질병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로젠(Rosen)은 이러한 점을 에뤽시마코스 설명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했지만, 우리는 아가톤의 향연을 이끄는 파이드로스를 도우면서 논의(logos)를 위해 과음하지 말자고 한 에뤽시마코스가 이를 통해 신체적 차원에서의 동성애를 반대하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예견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4.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타고난 동성애 성향

넷째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나온다. 에뤽시마코스는 그의 에로스 찬양을 끝내면서,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빠뜨렸을지도 모르는 것을 '채우는' 과제를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넘긴다(Symp. 188d-e). 소크라테스는 지혜가 물체적 의미에서 누군가에 '채워질' 수 있다는 아가톤의 생각에 반대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러한 입장을 에뤽시마코스로부터 물려받는다. 에뤽시마코스의 이중적 에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에서 아폴론이 쪼갠 이중적 원(圓)인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간은 서로 합쳐지려고 노력하나 헛수고로 끝난다.

에로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설명되지 않았다. 그것을 설명하는 일은 바로 아리스토파네스의 몫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들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성적 욕구의 기원을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지금 인간의 2배이다. 팔이 네 개이며 얼굴이 두 개이며 각기 반대 방향을 향해서 보고 있다.

매우 강력한 존재여서 신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였다. 또한 원래 인간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자웅동체라는 세 가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인간이 매우 강력해서 신의 능력을 위협했기 때문에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쪼개게 했다(Symp. 190b). 그런데도 인간이 신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다시 더 쪼개겠다는 경고도 받는다. 원래 인간을 쪼갤수록 인간의 힘은 약화되고 반대로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칠 인간의 수가 많아지므로 쪼개는 일은 신에게 유익을 준다(Symp. 190c-191a). 원래 인간을 쪼개는 일을 제우스로부터 위임받은 신은 바로 아폴론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짝을 찾아 서로 등을 맞대고 붙어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결국 굶어죽는 일이 발생한다. 이는 제우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칠 인간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연민을 느낀 제우스는 아폴론으로 하여금 인간의 머리들을 서로를 보도록 돌려 놓아서 어떻게 자신들이 쪼개어졌으며

그래서 더 질서있게 된 것을 알도록 한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자만과 야망으로 가득찼던 원래 인간에게서 나온 질서와는 정반대이다. 이제 새로운 인간은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데, 아폴론은 이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인간에게 배꼽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인간에게 성기를 달아주어 서로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Symp. 191a-d). 또한 이를 통해 자식이 나오기 때문에 이는 제우스에게도 유리한 방안이었다.

이러한 신화는 인간이 서로에 대해 욕구를 갖는 이유를 설명해준다(Symp. 191d). 이 신화는 특히 동성애를 지극히 정상적인 형태의 사랑에 포함시킨다. 원래 인간에서 남성과 남성으로 쪼개진 경우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는 욕구는 남성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여성과 여성으로 쪼개진 경우에는 레스비언이 되며, 남성과 여성으로 쪼개진 경우에는 이성애를 갖게 된다. 모든 사랑은 잃어버린 완전함을 찾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남성간의 사랑을 고귀하고 여기고, 이성간의 사랑을 수준낮은 것으로 여긴 파우사니아스의 견해가 여기에서 거부된다. 또한 파우사니아스의 설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성적 만족에 대한 언급이 없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사랑하는 자는 남성간의 동성애를 통해 성적 만족을 얻고 사랑받는 청소년은 지식 전수 등의 유익을 얻는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인간에서 쪼개진 반쪽 인간들은 모두 부족한 상태이며, 어느 편이 우위에 서 있지 않다. 이는 파우사니아스가 생각하는 성적 불평등 관계가 아리스토파네스에 와서는 상호 호혜적 평등 관계로 바뀌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이는 모두가 부족한 자로서 지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예견하기도 한다. 이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가 성인 남자와 어린 청소년 사이의 일시적인 동성애 관계를 옹호하기보다는, 평생 지속되는 성인 남자 사이의 동성애 관계를 옹호하는데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 신화에 따르면, 특정 성에 대한 선호는 배타적이다. 이는 고전 그리스 시대의 관습과 다른 점이다. 당대의 관습에 따르면, 동성애는 남성이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국면에만 한정되는 애정 형태이고, 이성애가 기본 형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성교는 '공유된 삶'(Symp. 192d-e)을 이루는 핵심 부분이다. '공유된 삶'은 그리스 사회에서 개인 간의 관계의 핵심을 이루는 이상이다. 그러나 희극으로 시작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과거에 잃어버린 완전함을 찾고자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수단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말은 향연을 이끌어가는 에뤽시마코스가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라고 경고한 것에(Symp. 189c) 이미 암시되어 있었다.

이제 아리스토파네스는 아가톤과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자신이 채우지 못한 것을 아리스토파네스가 채우라고 하면서 그의 연설을 맺었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일을 완벽하게 해서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우주 내에서 반대되는 것을 조화시키는 에로스가 무엇인지 밝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에뤽시마코스에게 사랑에 관해 새롭게 이야기할 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아래에서 살펴 보겠지만,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논의 틀을 부정함으로써 이러한 궁지에서 벗어난다.



5. 아가톤의 연설: 아름다운 동성애자

아가톤은 소크라테스가 청중(theatron) 앞에서 안절부절하게 만들고자 한다고 비난한다. 아가톤은 사고할 줄 모르는 대중과 사고할 줄 아는 소수(oligoi emphrones)를 구분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지금 향연에 참석한 사람이 모두 어제 아가톤의 비극 경연대회의 청중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사고할 줄 모르는 대중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아가톤이 지혜로운 자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보자고 제안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이전 연설가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때 향연의 좌장인 파이드로스가 끼어들어 두 사람이 대화(dialegesthai)를 하기 전에 우선 연설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소크라테스에게 그의 방식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아가톤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연설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는 전통적인 논의방식인 연설을 선호하며, 소크라테스가 새롭게 도입한 논의방식인 대화는 피하고자 한다. 그가 전통적 견해를 대변한다는 것은 그가 에로스를 가장 오래된 신으로 간주하는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전통주의자 파이드로스와는 달리 아가톤은 변혁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잘 알려진 이야기를 싣기 보다 잘 모르는 사람이나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비극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아가톤이다. 그에 따르면, 앞서 어느 연설가도 에로스를 제대로 찬양하지 못했다. 모두 에로스가 사람에게 주는 유익에만 관심을 두었지, 그러한 유익을 주는 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찬양은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아가톤은 에로스를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신으로 여김으로써 신이 우리 앞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한다.

이는 에로스를 가장 나이든 신으로 여겼던 파이드로스가 에로스가 어떤 신인지 전혀 밝히지 못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그는 파우사니아스로부터 사랑받는 자로서, 에로스를 사랑하는 자로 여기지 않고 사랑받는 자로 여긴다. 그는 에로스를 부드러운 신으로, 그래서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신으로 묘사하는데(Symp. 195c-196b), 이는 아직 턱수염이 자라지 않은 11세와 17세 사이의 청소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과 에로스를 같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다.

아가톤에 따르면, 에로스 신은 정의롭고(dikaios), 분별력 있고(sophronesyne), 용감하고(andreia) 지혜롭다(sophos). 이제 가장 젊은 신이 완전하게 된다. 이어서 아가톤은 에로스가 주는 유익을 설명한다(Symp. 196c-e). 에로스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주며, 잔잔한 바다이며, 바람을 피하는 은신처이며,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잠이다.



6. 소크라테스의 연설: 아름답지 않은 동성애자

아가톤에 이어서 에로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해야 하는 소크라테스는 안절부절한다(Symp. 198a-199b). 소크라테스는 무엇 때문에 지금 그의 처지가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앞서 연설한 사람들은 그가 처음 에로스 찬양에 합류하겠다고 동의했을 때 생각한 찬양이 무엇인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찬양이란 말을 통해 사랑의 진리의 가장 아름다운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다(aletheia legein).

사랑에 관한 진리가 무엇인지 그가 알기 때문에, 그는 찬양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연설가들은 찬양이란 어떤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것을 꾸미는 일이라고만 여기며, 이러한 것들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에로스를 찬양한다고 여겨지기를(doxei) 원할 뿐이다. 에로스 신이 누구인지를 정말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종류의 찬양에 대해서는 재주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진리를 알고자 할 뿐이라고 하면서 아가톤에게 몇 가지 작은 질문을 해도 되냐고 좌장인 파이드로스에게 묻는다(Symp. 199b-201a). 그리고 이어서 질문(elenchos)을 통해 아가톤의 생각을 반박한다(Symp. 199c-210c). 먼저 몇 가지 물음에 대해 의견일치가 필요하다. 에로스에게는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가? 아버지는 자녀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이지 않는가? 아가톤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제 에로스는 상대적 개념이 된다. 어머니와 형제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에로스는 아버지와 같이 상대적인 개념이 된다. 따라서 에로스는 더 이상 찬양을 받을만큼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우리는 에로스가 사랑하는 대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아직 다루지 않는다.

사랑 또는 욕구는 본질적으로 관계를 전제한다. 사랑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은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며, 따라서 부족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자체는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를 찬양하는 이전의 연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설해야 한다고 밝힌다. 지금껏 찬양은 찬양받을 대상에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참된 찬양의 방법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Symp. 198c-d). 이는 학문적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라도, 진리를 말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진리와 아름다움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때 진리는 에로스가 무엇이며 그 유익은 무엇인가(Symp. 204c)에 대한 것이다.

이제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의 반박이 옳다고 인정하지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Symp. 201c). 이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연설을 하기보다 만티네아(Mantinea)의 여사제인 디오티마에게 배운 것을 전하겠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가톤처럼 먼저 에로스를 정의하고(Symp. 201e-202b), 이어서 에로스의 유익을 말하겠다고 밝힌다. 디오티마 앞에서 그도 아가톤처럼 에로스가 아름답지도 좋지도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면 에로스가 수치스럽고 나쁘냐는 뜻이냐고 소크라테스가 묻자, 그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디오티마가 펄쩍 뛴다.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다.

즉 옳은 의견을 갖는 것이다(to ortha doxajein). 그것은 아는 것(epistasthai)과는 다르다. 대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기(alogon)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모르는 것도 아니다. 우연히(tynchanon) 사물의 존재에 접하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분별력(phronesis)과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 있는 것이며,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있는 것이다.

우선 디오티마는 한 가지 신화를 도입한다. 에로스는 부자의 남신과 가난의 여신이 관계함으로써 태어난 자식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가난하다는 점에서 어머니를 닮았지만, 자신의 부족을 채우고자 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를 닮았다. 이러한 에로스는 알키비아데스(Alkibiades)가 <향연>편 말미에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와 닮아 있다.

부유와 가난 사이의 중간 상태는 사랑하는 자의 상태이다. 그런데 그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며 행복해지고자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 신화의 인간이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는데 반해, 그는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 또한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한다.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할 때 행복(eudaimonia)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Symp. 204e). 이는 '신체와 정신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속에서 출산하는 것'(Symp. 206b)으로 표현된다.

아름다운 상대를 보고 성적 욕구가 생겨 자식을 출산하려는 것이 한 가지 예이다. 이는 자신이 죽지 않으려는 욕구이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가능한 한 영생(永生)에 이르려는 수단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신체에서 자신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자와 정신에서 자신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자를 구분한다(Symp. 208e-209a). 이는 천한 사랑과 고귀한 사랑을 구분한 파우사니아스를 연상시킨다(Symp. 181b-c). 아름다운 것 속에서 영혼이 낳는 자식은 생물학적 자식이 아니라 탁월한 행위와 논의들(logoi)이다(Symp. 208c-209e). 탁월한 논의는 젊은이들의 영혼에 능력을 주는데, 이제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신체보다 아름다운 지혜를 추구하게 된다.



7. 알키비아데스의 연설: 소크라테스의 동성애자 비판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이 회복된 기원전 399년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도시가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재판받고 처형되었다. 아테네 법정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론한 내용이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의 작품 속에 담겨 있다. 코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와 반민주적 정치가인 크리티아스(Kritias)와 교제한 사실이 그의 처형에 많이 기여했다.

특히 당시에 촉망받던 청년 장군 알키비아데스는 조국 아테네를 배신함으로써 아테네가 패전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플라톤의 삼촌이면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리티아스도 정치에 입문해서 30인 참주정치를 이끌었다. 민주정을 회복한 아테네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귀족 자제들을 잘못 교육한 소크라테스의 책임으로 비쳐졌다. 또한 소크라테스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미소년과 사랑에 빠졌다고 하며, 미소년의 아름다움에 반한 동성애자라고 묘사되며, 소크라테스도 미소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고 한다. <향연>편의 주요 등장 인물인 알키비아데스도 소크라테스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주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erastes), 즉 동성애자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향연>편 마지막 장면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아테네인의 입장에 서서 소크라테스를 고소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고소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무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의 아름다운 신체를 사랑한 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을 사랑한 자이며, 젊은이의 영혼이 탁월하도록 교육하고자 한 자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앞서 디오티마는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찾는 사람이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Symp. 205d-e).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체험만을 다룰 뿐이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을 쫓아 소크라테스와 신체적 접촉을 통해 완전해지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와 한 담요 아래에서 밤을 지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Symp. 219c).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시도를 금(지혜)을 동(신체적 쾌락)으로 바꾸려는 시도라고 낮게 평가한다. 이렇게 <향연>편에서 플라톤이 동성애를 이상적 애정 형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파이드로스가 든 예, 즉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경우에서 잘 나타난다.

고귀한 에로스를 지닌 자가 남성 사이의 동성애를 하며, 낮은 수준의 에로스를 지닌 자가 이성애를 한다고 주장하는 파우사니아스의 생각이 정면으로 거부된다. 교육과 관련해서 플라톤은 남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았지만, 소크라테스의 내적 아름다움에 이르는 수단을 잘못 사용했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체적 요구를 거부한데 대해 큰 수치감을 느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실레노스(Silenos)상(象)에 비유한다. 겉은 추하지만 내면에 빛나는 신들을 담고 있는 실레노스상처럼, 그의 말은 수사적 기교가 전혀 없는 너무 평범한 말이지만, 그 말을 듣다 보면 영혼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는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를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이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판결을 내려야 했던 당대 아테네인들의 이중심리를 잘 드러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지식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청소년 교육이 민주주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IV

오늘날 동성애를 옹호하는 논증 중 하나는 동성애적 성향(orientation)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논증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논증의 원형을 <향연>편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에서 찾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처럼 성교의 목적을 성적 만족에 두지 않고 (탁월한 능력과 지식의) 출산에 둔다면,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기독교의 입장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 26-28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향연>편에 나타난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에서 그들의 근거를 찾곤 하지만, 플라톤은 바로 그 대화편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을 부정하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젊은 청소년들과 남색을 즐긴 동성애자가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한 올바른 교육자였다. 소크라테스를 동성애자로 여긴 당대의 편견은 고대 아테네의 타락한 민주주의 체제의 교육방식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당대 관습에 따라 동성애가 이루어지는 귀족주의자들의 향연과 관련해서 오해한데 뿌리를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설득술 교육이 목적인 당대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이지, 동성애를 옹호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경직 (천안대 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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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씨의 ‘동성애자의 양심고백’ 전문

동성애자들은 말해주지 않는 ‘동성애에 대한 비밀’

안녕하세요? 동성애 주제가 논란이 되는 이 시점에, 저의 동성애 체험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는 초등학생 고학년 때부터 동성애를 느꼈고 대학에 들어와 종로, 이태원에서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가입하였습니다. 29살에 동성애를 극복하기 위해 결심하였고 6년이 지난 지금은 여성과 교제 수준에 이를 정도로 동성애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지금도 종로와 이태원 어디에 게이바가 있는지 족족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쪽 실상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동성애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두 남자가 산에서 일을 하며 동성애를 경험하고 사랑하게 된 내용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일반인들은 감동적이었다고 했으나 정작 동성애자들은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동성애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식성

처음 PC 천리안 통신을 통하여 그쪽에 나갔을 때 만난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뚱뚱한 남자만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형은 뚱뚱한 남자만 만나고 그런 남자가 아니면 아무 감정을 못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종로의 게이바에는 실제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만 출입하는 게이바가 있고 그러한 취향의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일반 사회에서는 그렇게까지 특정한 체형을 숭배하듯 좋아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는데 좀 이상했지만 큰 신경은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동성애자들이 하루에도 수도 없이 생각하고 말하는 소위 ‘식성’이라는 것입니다. 식성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속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성애자들은 식성에 의해 상대방을 구하는데, 위에 예로 든 뚱뚱한 체형, 평범 체형, 근육질 체형, 뚱뚱하지만 근육질의 얼굴과 몸에 털이 많은 베어스타일, 중년남 등등 동성애자들은 각자의 고정적인 식성에 의해 교제 상대를 찾습니다.

물론 이성애자들도 스타일을 말하긴 하지만 이상형에 대한 추구일 뿐 사귀다가 마음에 들면 그냥 내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즉 이성애자들의 스타일은 이성간의 애정 관계 형성에 있어서 절대적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자의 식성은 절대적입니다. 실제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도 배가 많이 나온 스타일, 단순 비만 체형, 혹은 몸에 털이 많고 근육질의 베어스타일 등 추구하는 종류가 세분화되며, 이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체형, 외모 외에는 절대 눈을 주지 않습니다. 반면 평범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들은 절대 뚱뚱한 사람엔 눈길을 주지 않으며 그들이 가는 게이바에도 출입하지 않습니다. 시간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또 키가 작고 아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는 그런 사람만 찾으며, 중년층의 아저씨를 좋아하는 동성애자는 꼰대바(중년 동성애자들이 가는 게이바)를 주로 찾아다닙니다. 이들에게는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젊은 사람은 연애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워낙 식성이 고정적이다보니 게이바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맨 처음 하는 질문이 항상 “식성이 어떻게 되세요?”입니다. 서로 식성이 맞아야 사귈 수 있으니까요. 이성애자들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퇴짜를 놓아도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물밑 작전을 벌여 마음을 얻기도 하지만,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식성이 안 된다’고 하면 바로 포기합니다. 구애를 하는 자신 스스로도 식성이 안 되는 사람이 자신에게 구애를 한다고 마음을 절대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식성을 만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인터넷 카페도 체형별로 분류되어 가입하고, 채팅 시스템도 미리 자신의 체형과 나이, 원하는 식성을 입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성을 만날 확률이 적으므로 힘들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식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드물게 ‘잡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러 스타일 중에서 가장 괜찮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들은 식성에 구애를 안 받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여러 개의 식성을 가지고 있을 뿐 식성을 통하여 상대방을 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처음 예를 들었던 뚱뚱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형은 매우 평범한 체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뚱뚱한 동성애자는 이상하게도 뚱뚱한 동성애자를 좋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몇 년 후 우연히 그 형을 만났을 때 형은 살을 일부러 있는 대로 찌워 뱃살이 비정상적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애인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찌웠다고 합니다.

식성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외모로 인한 ‘성욕’이 식성의 모티브입니다. 사람의 내면이나 그 밖에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들, 교감 등 다 소용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식성을 보면 그의 신체를 탐하고자 하는 욕구가 급상승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성이 통하면 거의 대부분 만난 첫날 성관계를 가집니다. ‘식성 발견→성욕 증대→성관계→애정관계 형성’, 이것이 이들의 사랑 방식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일반 사회에서도, 군대에서도, 일반 사우나에서도 식성을 찾습니다. 이들은 지금도 하루에 수도 없이 식성을 말합니다. 길을 지나는 남자 중 마음에 들면 ‘식성 지나간다’고 말하고, 그 남자의 외모에서 온 몸으로 성적 모티브를 얻는다면 ‘올(all)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올식을 만나면 성적 욕구가 최강으로 증대되므로 정신 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짝사랑은 온 몸으로 그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시에 여러 명을 짝사랑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어린 남자 아이들이 멋진 군인이나 경찰을 보며 동경하는 것은 남성성에 대한 강한 열망입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남성성이 온전히 자라지 못하고 여성성이 채워졌다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여성화되고 그는 무의식 속에 채워지지 못한 남성성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것은 건장하게 잘 자란 다른 남성의 육체를 통해 얻어지며 이것이 식성 중에 동성애자 티가 전혀 나지 않는 100% 남자가 가장 인기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남성성의 훼손을 다른 남자를 통하여 갈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의식 중에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스타일이나 갈구하는 스타일이 바로 ‘식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동성애자를 넘어선 성전환자들이 왜 나오는지도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식성에 대해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믿지 마십시오. 대통령·장관·재판관·국회의원님은 동성애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으셔서 쉽게 판단이 안 서실 것입니다. 알기 원하신다면 저에게 연락하여 주십시오. 대통령·장관·재판관·국회의원님께서 직접 게이바를 저와 함께 둘러 보셔도 좋습니다. 게이바 몇 군데 들러보시면 제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2. 때짜와 마짜

‘때짜’는 성관계에서 남성 역할을 하는 동성애자이고, 반대로 ‘마짜’는 여성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거의 일반 남성과 다름없는 남성성을 보여야 때짜로 인정하지, 여성성이 다분하면 마짜들은 콧방귀끼며 그런 때짜와 성관계 갖는 것은 상상만 해도 불쾌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마짜들도 자존심 때문에 마짜라고 말하기보다 대부분 ‘올(all)’(때짜와 마짜 둘 다 가능)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의 평소 행동을 살펴보면 ‘올마’(완전한 마짜)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짜의 성역할이 편하고 쾌감이 크므로 때짜보다 마짜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평때박마’라는 말이 있는데, 평소엔 때짜인 척 하다가 박을 타는(성관계의 속어) 순간에는 마짜로 돌변하는 사람의 줄임말입니다. 그런데 마짜끼리는 연인 관계를 거의 맺지 않을뿐더러 지속하기는 더 힘듭니다.

동성애자들은 종종 종로에서 번개 모임을 갖는데 공지를 본 동성애자들이 참여 신청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인원이 모여 인근 호프집에 자리를 잡으면(종로 피맛골 근처에는 대규모의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호프집이 많습니다.), 시작하는 첫 순서는 항상 자신의 식성과 성역할을 밝히는 것인데, 참여자들은 그 순간 가장 적합한 상대를 구하기 위해서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갑니다. 이렇듯 식성과 더불어 때짜와 마짜는 동성애자를 묶는 강한 굴레입니다. 서로 식성이 통해야 성관계를 나누고 애정을 형성할 수 있겠지만 성역할도 맞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인해 힘들어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3. 저의 환경 / 동성애·식성의 원인

저는 어릴 때 누나들 틈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누나들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여장놀이를 했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을 망쳤습니다. 백지 상태의 유년기에 여자 역할 놀이를 했던 저는 제대로 된 남성성이 자라지 못하고, 대신 여성성이 그 자리에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자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많이 고쳤지만 아직도 저도 모르게 여성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저 또한 식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식성에 해당하는 사람을 보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의 성기와 그의 육체를 갈구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랑의 감정인줄 알았습니다. 물론 이성애자 사이에서도 최소한 상대방이 이성으로 보여야 하고 성적 매력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이라면 아무리 남자라도 그건 좀 이상한 것 아닐까요? 더구나 그것이 일부러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동성애를 치료하던 중 어느 날 식성에서 해방된 것을 알았고 어린 시절부터 저를 억눌러온 식성에서 해방된 느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식성이 없어지고 남자가 나와 같은 개체임을 알게 된 시점부터 동성애는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자석이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듯이 남자가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나와 같은 개체 - 그도 남자, 나도 남자 - 임을 새삼 식성을 벗어난 시각에서 보게 되자 더 이상 남자를 통해 나의 훼손된 남성성을 갈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나 본 많은 동성애자들이 저처럼 어릴 때 남성성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랐고, 저처럼 여성성이 채워진 동성애자는 행동도 여성적입니다.

그 외에 성적 관계를 통해 동성애를 배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동성애자 A는 동네 사우나 수면실에서 자는 동안 옆에 누운 남자가 성기를 만지는데 거부하려다 음욕을 풀자는 생각으로 그냥 두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도 그것이 자꾸 생각나 다시 그 사우나를 찾았는데, 다시 그 남자를 만나 수면실에서 은밀히 몸을 허락하였습니다. 자신을 만진 남자는 중년 아저씨였는데 이 일로 A는 식성이 중년으로 고착화되어 동성애자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B형은 정상적이었으며 결혼도 하고 애정관계도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형이 가끔 야동을 보곤 했는데 좀 더 색다른 것을 찾다가 게이 포르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형은 그것을 보며 자위행위를 하였고 점점 동성애적 섹스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성애자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부인과 이혼하고 게이바에서 만난 남동생을 애인으로 둘 만큼 그는 동성애가 주는 자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식성은 귀여운 느낌을 주는 연하의 남자였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해온 대학생 C는 고등학생 때 집에서 부모님이 PC 음란사이트를 막아놓아 볼 수 있는 것이 게이 사이트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한번도 동성애에 대해 생각하지 않던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게이 포르노를 보다가 그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동성애의 자극에 크게 휘둘려 버렸습니다. 그는 동성애자 세계에서 있으면서도 이성애자였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자신을 정상이라고, 원래부터 동성애자였다고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동성애가 정상입니까? 수면실에서 중년에게 동성 체험을 하고 중년만 찾아다니는 동성애자가 과연 정상입니까?

제가 식성을 벗어나고 이성애자들의 사랑의 방식을 깨닫기 시작하였을 때 좀 힘들었습니다. 그동안처럼 식성을 통한 관계가 아니라 진실로 마음을 나누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나아가고 마음을 열고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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