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설교를 준비하십시오
2015-12-16 09:36:26

(Surviving the Sermon Preparation Process)
유진 L. 로우리 / 미국 성바울신학교 은퇴교수

강단에 올라 실제로 설교를 하는 것(preaching a sermon)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정작 어려운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설교 한 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동굴 속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기다리며, 그 음성을 찾아 온 사방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는 찾으면 찾을수록 건지는 것이 더 적은 그런 경험을 할 뿐이다.

수년 동안 나는 성경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목회경험을 통해, 기도하는 중에, 영화를 보다가, 저널의 글을 읽는 중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어디서 설교거리를 찾을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물론 요즈음이야 성구집(lectionary)을 보면 설교거리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서(where) 설교거리를 찾을까가 아니라 무엇을(what) 설교할까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토끼 고기 수프 요리법의 제일 마지막에 덧붙여 적어 놓은 “먼저 토끼를 잡을 것”이라는 말이 우리 설교자들에게 적절한 충고가 되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면에서 이것은 그다지 만족할 만한 충고가 못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설교라는 토끼(homiletical rabbit)를 잡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의도적으로(intentionally) 그리고 무의식적으로(inadvertently) 설교라는 토끼가 당신을 잡도록 허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어떻게 의식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설교라는 토끼가 당신을 잡게 허락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설교준비에 대해 당신에게 물어오던 때를 잘 기억할 것이다. “설교 준비 잘 되세요?”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저 그렇지요. 뭐 별 뾰족한 게 안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이 또 똑같은 질문을 해 왔을 때 당신은 마치 다른 세계에 다녀온 사람처럼 흥분해서 이렇게 말한다.

“예, 굉장히 중요한 게 생각이 났어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뭔가 중요한 것이 당신을 사로잡은 것이다(something has you). 그러나 질문을 해 온 사람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자세하게 듣고 싶어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게 뭔데요?”

그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그가 빨리 가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해주었어야 할 솔직한 대답이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어요(something is working)”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이 불확실한 확실성(uncertain certainty; “뭔가 떠오르는 것 같아요”)을 자극하고, 고무하고, 더 개발할 것인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또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 자기도취적인 인식론적 경험(euphoric epistemological experience)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경험이 빛 바랜 진부함(pale platitude)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이 다음에 설교를 준비할 때도 그러한 경험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대부분의 설교자가 이미 성구집(lectionary)을 통해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모양으로든 완성된 타인의 설교 본문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이런 질문들을 생각해 볼 것이다. 설교 준비는 분명 설교 본문에 대한 ‘효과적인 친숙함을 쌓는’(gaining effective familiarity) 데서 시작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설교가 그 형식을 잘 갖춘다 해도 그 기능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이 ‘효과적인 친숙함’(effective familiarity)은 설교 본문과 설교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식과 신비를, 인지하는 것과 주지되는 것(of grasping and being grasped), 이끌어 가는 것과 이끌림 받는 것(managing and being led)을 한 데 묶어 놓은 표현이다.

이 친숙함은 우리들 대부분이 언제 생겨나는 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글에서는 차라리 부정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편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많은 덫들
설교를 준비할 때 많은 덫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설교라는 토끼들을 감추어 놓은 이 덫들은 우리가 효과적인 설교의 신호탄이 되는 “아하!”하는 경험들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몇 가지 덫들은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피해야 할 덫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또한 설교 준비 과정을 통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들 역시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설교 준비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문에 귀 기울이는 것’(hearing)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묻지도 않은 질문들에 대해 미리 대답을 주는 전문가들을 보고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보기에 많은(특별히 성구집을 이용하여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너무 빨리 본문을 한 번 읽고 손쉬운 주석서들로 넘어가는 것 같다.

주석서들의 도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주석서들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의 설교는 작위적인 주제 설교로 흐를 수 있다. 주해적인 차원에서의 도움은 성경 본문을 설교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아직 그런 도움을 받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듣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귀를 열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성공적인 설교’를 하겠다는 우리의 열심은 좋은 것이고 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오는 주일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럼에도 설교 준비 과정의 맨 첫 단계에서는 뜻밖에 찾아오는 신선한 충격을 위해 우리의 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본문에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강요했던 적이 참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제 설사 다른 사람의 의도라고 할지라도 본문에 강요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대신 본문을 소리내어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번역본들과 현대적 용어로 쉽게 풀어쓴 성경을 활용하라. 가능하다면 원어 성경을 읽기를 권한다. 그러나 주해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문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본문에서 뭔가가 뛰쳐나와 우리 얼굴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이 시점에서는 단어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당장은 본문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을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차후에 할 일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시점에서는 우리를 아직 운전석에 앉지 못하게 하는 그런 행동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현재 관심은 본문 앞에 우리 자신을 앉혀 놓고 본문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씀이 우리를 만나주도록 그저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진 운전석에 앉지 못하도록, 그리고 우리가 말씀에서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can look for trouble).

본문에서 질문을 만들라

본문에서 적절해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는가? 무슨 이상한 것이 있는가? 이와 같은 ‘관념적 의구심’(ideological suspicion)을 우리가 언제나 편안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 의구심의 대상이 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밝혀낸다(probing uncertainty)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의구심’은 이 단계에서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다. 본문 내의 문제나 혹은 본문 주변이나 본문에 대한 문제는 종종 우리가 그 본문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기회를 제공한다.

성구집에 대한 웍샵을 진행하면서 나는 종종 참석자들에게 소그룹으로 모여 본문에서 뭔가 이상한(weird) 것이 있는지 찾아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고, 일상적이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진리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단절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유익하다.

종종 ‘문제’는 우리가 본문 이전에 나오는 두 장이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을 읽어보기 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앞에 두고 있는 본문은 진공상태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 본문이 성경의 그 위치에 있는 것은 누군가의 의식적인 전략의 결과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문제를 찾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마주 대하게 될 때 우리는 훌륭한 탐정처럼 이 문제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밝힌 다음에는 단어 연구나 주석서들에 제시된 성경 각 권에 대한 개론이나 병행 본문이나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은 본문들과의 비교 등과 같은 주해를 위한 수단과 자원들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생명과 활력을 지닌 증거들을 추적하고 밝혀내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해답(answer)을 찾기 위해 본문을 탐구하는 것과 질문(question)을 찾기 위해 본문을 탐구하는 것 사이에는 천지차이가 있음을 명심하라. 전자가 우리를 명령자의 자리에 둔다면, 후자는 비록 우리로 유사한 주해적 작업을 하게 하기는 하지만 우리를 설명자(explainer)가 아니라 탐구자(investigator)의 자리에 둔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절친한 관계를 가진 소수 안에 두고 본문을 청중들에 대한 이야기로 제시하게 하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본문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설교 준비 과정에 있어 가장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본문의 핵심에 대한 질문은 본문에서 가장 먼저 설명되어야 할 문제나 이슈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제기된다. 성경 본문은 때로 특정한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직설적 선언을 담고 있다.

이는 설교자가 핵심을 발견하기 위하여 혹은 원래의 청중의 보였을 만한 그런 반응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번 주일날 이 설교를 듣게 될 청중들의 반응을 창의적으로 상상해 보기 위하여 본문의 앞뒤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설교를 준비하는 초기 단계에 이 핵심, 혹은 문제, 이슈들에 대해 집중하게 되면 본문은 이와 같은 것들을 나란히 펼쳐놓은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시 말해 본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이슈와 해답 양자 모두를 접하게 될 수 있다. 이 때 보통 이슈는 다소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만 그 해답은 암시적일 수 있다.

“아하”하는 탄성을 지르기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이슈와 해답 모두를 한꺼번에 발견하는 (종종 직관적인 차원에서) 그런 통찰의 순간이다. 이슈와 해답 사이의 연관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불확실한 확실성(uncertain certainty)에 이르는 열쇠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설교자를 흥분시키고 설교자에게 아직 뭐라고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이 된다.

주제문구를 피하라

반면 본문에 대한 질문이 “이 본문의 메시지가 무엇인가?”하는 식의 해답을 찾는 언어(resolutional language)로 제기될 때는 이와 같은 이슈와 해답의 연관성이 가져오는 그런 흥분을 맛보기가 어렵다.

본문에 대한 질문이 “이 본문의 핵심은 무엇인가?”하는 핵심에 관한 언어(focus language)로 제기될 때는 그와 같은 분명한 질문이 암시적인 대답과 연관되거나 명백한 대답이 암시적인 질문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럴 때 우리가 “뭔가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I think I have something)”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본문에 대해 질문하느냐에 따라 설교자가 본문을 앞서 갈 것인가 아니면 본문을 따라갈 것인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주제문구(theme sentence)를 만들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설교 준비를 할 때 피해야 할 덫과도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가 주제문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중요한 목적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주제문구의 일차적인 목적이 설교의 목적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사실 지난 수년 동안 나는 내려앉을 곳을 찾아 하나님의 피조물들 위를 배회하는 수많은 설교들을(그 중에는 내 설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들어 왔다. 종종 설교자의 필사적인 마음(desperation)은 (청중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장황한 마무리 기도를 해야지 해소가 된다.

물론 우리는 설교의 주제나 목표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결과를 얻느냐 하는 것이다. 종종 주제문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제문구가 많은 문제점들 역시 안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먼저, 주제문구는 설교를 명제화시키는(propositionalize) 경향에 빠진다. 종종 설교의 목적은 정보를 제공하고, 이슈를 분명하게 하고, 적용하고, 부연 설명을 하는 그런 교육적인 목표로 제한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청중들에게 말씀을 잘) 이해하게 만들었다(gotten it across)”라는 아주 그럴 듯한 말로 우리 설교의 성공을 자축한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를 준비할 때 한 주제에 매달릴수록 설교가 하나의 정보 보고로 전락해 버리기 쉽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제문구는 종종 마음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장 간단한 이유로는 이러한 주제문구는 다음 주일에 있을 일을 해답(resolution)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슈와 해답을 나란히 보게 하는 힘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주제문구를 이용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주제문구를 만드는 순간 연역적으로 사고를 한다. 질문을 통해 탐구한다는 의미는 약화되고, 핵심은 정보 제시용 메시지의 ‘신중한’ 표현 정도로 제한되고 만다.

물론 주제문구가 언제나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여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약간 이상하게 보이는 사고도 마다하지 않거나 해답을 보면서도 동시에 마음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반면 많은 이들의 경우 해답이 주는 편안함으로 인해 그들은 한 이슈를 계속 파고들지 못하게 되고 만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 주제문구를 만들라고 제안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일을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설교문안을 만드는 작업 사이에 둔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설교준비의 전 과정을 성경 연구에서 주제문구를 만들고, 이 주제문구에서 설교문을 만드는 과정으로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분리 작업이라고 본다. 많은 경우 주제문구를 만들라고 제안하는 그 시점은 사실은 아직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주해 작업에 몰두해야 할 그런 때인 것이다.

주제문구를 만들어야 함에도 그 주제문구를 설교준비의 마지막 단계까지 완성하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더욱이 일단 주제문구가 만들어지고 나면 설교자는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자기가 핸들을 잡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설교준비 과정 내내 최대한 스스로를 열어 놓아야 한다.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대다수의 설교자들의 경우 주제문구는 그들에게 그러한 열린 마음을 고무시켜준 것 같지는 않다.

주제문구보다 핵심문구를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성과 이제까지 언급한 제 문제들을 고려할 때 나는 주제문구보다는 핵심문구(focus sentence)를 만들라고 제안하고 싶다. 나는 일단 본문의 이슈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설교를 통해 물을 수 있는 보다 진전된 질문들도 떠오르게 된다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일단 이슈를 분명하게 밝혀내면 설교의 목적은 핵심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고 권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문제를 설교 메시지를 찾는 것으로 생각하면 너무 제한적이게 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설교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이지, 그 주제나 메시지 혹은 요점이 무엇이냐가 아니다. 그리고 핵심이나 이슈를 더욱 분명히 할수록 목적을 규정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마찬가지로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 한편으로 이슈를 잘 정리하고 다른 한편으로 설교의 목적을 잘 진술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사이의 갭을 메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를 파악할 수 있는 더 좋은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설교의 근본적인 전환점(fundamental turn)을 발견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이슈를 해답(resolution)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종종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은 핵심에서 전환이라는 목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핵심에서 목적으로의 전환으로 흘러간다.

이는 거의 설교문을 완성하는 단계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일단 이슈를 명명하고 난 후에는 우리는 성경적 신학적 연구를 통해 설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불쑥’(from out of the blue)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 두세 번째 단계가 그 순서가 어떻게 이루어지든 간에 핵심은 항상 맨 처음에 온다.

이제 설교를 준비하는 단계에 대한 나의 제안이 다른 이들의 제안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알 것이다. 나는 설교를 통해 어떤 해답을 제시할까보다는 설교를 통해 어떤 질문을 제기할까 하는 점에 초점을 두고 정확성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우리는 ‘설교라는 토끼’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우리가 의도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떻게 이 토끼가 우리를 잡게 할 것인지를 질문하며 설교 준비 과정에 대한 이 글을 시작했다. 유비를 달리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 우리 자신이 운전석에 앉지 못하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슈는 권위나 통제와 연관된다. “열린 자세를 유지하라”는 충고가 혹 “즉흥적이 되라”(spontaneous now)는 충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설교 준비 과정 내내 우리가 열린 자세를 유지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들 중에는 이러한 열린 자세를 고무시키는 것이 있는 반면 우리로 통제에 이르도록 하는 그런 행동들도 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본문에 귀 기울일 때 우리가 열린 자세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주제 문구가 아니라 핵심 문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 준비 과정을 잘 해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과정을 통해 살아 남았느냐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설교라는 토끼가 그 과정을 통해 살아남았느냐 하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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