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폐쇄, 결국 '돈 문제' / 기모노가 '성행위를 위한 옷'이라는 한 선교사의 무지
2018-08-03 02:37:20





















▲ 손양원 목사 기념관 ©뉴스파워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폐쇄, 부끄럽다”

여수 애양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폐쇄 결정까지...결국 '돈 문제'

희생과 섬김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순교자 ‘20세기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애양원을 찾는 크리스천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한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애양원 내에 소재한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기념관을 운영해온 애양원교회(담임목사 정종원) 측과 유족 측의 갈등으로 지난 3월 폐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교계는 안타깝다는 반응보다는 부끄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은 1993년 개관했다. 애양원교회가 예장통합 여수노회의 협조와 총회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허락하여 당시 이광일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재정을 모금했다.

처음 기념관 착공과 완공 후 남은 부채 등은 애양원교회가 감당했다. 건축비 전체의 4분의1 정도를 교회가 담당한 것이다.

애양원교회 회의록에 의하면 기념관 운영 및 건축 잔금 해결을 위하여 연 5,000만원을 책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관 운영은 쉽지 않았다. 한 때는 기념관 운영권을 제3자에게 양도할 논의까지 했던 것으로 확인 됐다.

그런 고비를 넘기면서 애양원교회는 기념관을 착실하게 운영해왔다. 기념관 마당에는 손양원 목사 조형물 등이 설치가 됐고, 카페도 열었다.



▲ 손양원목사기념관 앞마당에 설치된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 조형물 © 뉴스파워

그런데 손양원 목사의 유족인 막내아들인 손동길 목사가 3년 전 여수에서 내려오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동길 목사는 애양원교회 측에 아버지의 유품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교회 측은 줄 이유가 없다며 거절을 했다. 교회 측은 월 100만원씩을 유족을 돕는 차원에서 드릴 테니 기념관 운영에 관여하지 말 것을 제안했으나손 목사는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 목사는 대신 기념관 입구에 헌금함을 설치하고 자신이 기념관 안내를 맡겠다고 했다. 기념관에는 기념관 운영을 위해 비치해 놓았던 헌금함과 손 목사 개인이 설치한 비치함이 놓였다. 그리고 손 목사는 기념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애양원교회는 헌금함을 통한 수입이 거의 없어지면서 기념관 운영이 어려워졌다. 지난 한 해만 2천만 원의 적자가 발생했다. 애양원교회는 손 목사에게 월 200만원을 드릴 테니까 기념관 운영을 교회에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손 목사는 월 190만원과 함께 기념관 안내를 본인이 계속하되, 헌금함은 없애되 관람객들이 개인적으로 주는 돈은 다 받겠다고 했다. 결국 타협에 실패했다.

교회는 작년 연말 이후로 적자폭이 너무 커져서 올 3월부터 도저히 기념관 운영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기념관을 폐쇄했다. 하지만 교회는 기념관 관련 직원들은 계속 상주하게 했으나 분기에 2~3000만원의 적자가 발생하면서 결국 직원들도 지난 6월부로 모두 사직처리를 했다.

그렇다면 손동길 목사가 기념관에 임의로 관여하기 전까지는 어땠을까. 그 이전에는 방문객들이 기념관 입구에 놓여진 헌금함에 자유롭게 헌금을 하고 갔으며, 그 재정은 기념관 운영비로 사용되었다. 또한 선교회 이름으로 선교 후원도 했다.



▲ 손양원 목사 3부자 묘지 입구. 주변이 공원이 된 후 묘소 관리가 어려워 문을 만드는 대신 가족이 직접 안내한다는 안내판이 있다. ©뉴스파워

기념관을 폐쇄한 이후에도 손동길 목사는 기념관 앞에 헌금함을 설치해 놓고 있다. 또한 손양원 목사와 동신, 동인 등 삼부자 묘지로 가는 길에 펜스를 설치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대신 묘지를 가고 싶은 사람들은 손 목사에게 연락을 해야 들어갈 수 있게 했다.

교회 측은 “손양원 목사님 유족 전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막내 아들인 손동길 목사와 막내 딸 손동연 권사가 기념관 운영에 관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처음에는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한편에 정양순 사모 기념관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부부지만 손 목사님의 순교정신과는 다르다고 판단해서 거절했다."며 "그리고 손 목사님이 사셨던 집터가 있는데, 지금은 사택으로 사용해 온 곳인데 그곳을 ‘정양순 사모 기념관’으로 해달라고도 했다. 유족들의 요구가 교회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고 밝혔다.

한국 교회의 순교성지로 불리우는 여수 애양원 손양원목사기념관을 둘러싼 갈등은 크리스천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손 목사의 희생과 섬김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내려놓음의 정신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성지의 자격을 잃어버렸다는 차가운 시선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본질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손 목사의 고향인 경남 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39에는 지난 2015년 10월 20일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개관해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경남 창원시는 문화해설사를 파견하고 있다. 애양원교회는 애양원을 찾는 이들에게 함안 기념관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
플라스틱 목사를 조심하자” 김동호 목사 페북 글 공감



높은뜻선교회 대표인 김동호 목사가 일부 한국교회 리더들을 플라스틱에 비유해 꼬집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 썩는 고통을 감내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권위를 내려놓지 못하고 썩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김동호 목사 페이스북 캡처
김 목사는 31일 페이스북에 ‘플라스틱 목사를 조심하자’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리더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과 썩는 종이를 대비하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인간의 획기적인 발명품인 플라스틱은 우리 삶을 편하게 해준 대신 썩지 않아 지구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뭘까.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플라스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라면서 “우리 같은 목사, 원로, 공로, 명예, 은퇴, 세습 목사가 완전 플라스틱이다. 썩질 않는다”라고 적었다.

즉 권위나 명성을 버리지 못하는 목회자가 되지 말고 썩어 없어지는 종이처럼 자연스럽게 권위나 명성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이다.

그는 “플라스틱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하지 말고 그냥 종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하자. 썩어 없어지는 사람이 되자”면서 “40년을 광야에서 충성한 후에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홀로 느보산에 올라 거기서 썩어 죽은 모세 같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하자”고 호소했다. 아울러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고 했다”며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썩음을 의미한다. 썩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당부했다.

그의 글은 페이스북에 오른지 12시간 만에 420여건의 ‘좋아요’를 얻었다. 네티즌들은 “울컥합니다. 감사합니다”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등의 댓글을 달며 호응했다.


=========================================
교회의 기둥’ 집사가 줄고 있다

예장통합 공개한 교세 통계 보니



‘교회의 기둥’ 집사가 줄고 있다 기사의 사진
집사가 줄고 있다. 교회의 기둥이자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서리집사 안수집사가 동시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에 더해 세례를 받은 교인이 그저 등록만 한 교인보다 지난해 처음으로 더 많이 줄어들었다. 한국교회에 던져진 또 하나의 위기 신호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통계위원회는 2017년 말 기준 교세 현황을 30일 공개했다. 전국의 지교회가 지난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보고한 교인 수 등을 노회가 취합해 총회가 집대성한 통계로 다른 교단에 비해 공신력이 높다. 예장통합은 백중세인 예장합동 교단과 함께 한국 장로교를 이끌고 있으며 두 교단 소속 교인은 국내 기독교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예장통합의 서리집사는 2017년 말 59만3184명으로 1년 전인 2016년 말 60만7062명보다 1만3878명 감소했다. 2015년 61만5153명과 견주어서는 2년 새 2만1000여명 줄어든 기록이다. 서리집사는 세례교인으로서 교회 등록 후 1년 이상 교인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경우 받게 되는 직분이다. 제직회 멤버로 교회의 중요 결정을 함께하며 봉사로 헌신하는 성도들이다. 안수집사 역시 7만5805명으로 전년 대비 140명 줄었다. 안수집사는 2016년 말까지 증가세를 유지해 왔는데 이번에 감소로 돌아섰다.

반면 목사 장로 권사의 수는 증가세를 보였다. 권사 직분이 1년 만에 1486명 늘어난 데 대해 총회 관계자는 “남성보다 교회에 더 헌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직분이 정체돼 있던 여성 권사들의 위상이 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장통합 전체 교인 수는 271만4314명으로 2016년 대비 1만6586명 감소했다. 2010년 285만명을 정점으로 완만한 내리막길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올해 감소한 교인 중에 세례교인의 수가 1만6053명이었다는 점이다. 등록만 하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원입교인’보다 세례교인의 이탈이 월등히 높았던 셈이다. 총회 관계자는 “세례교인 이탈이 원입교인 이탈보다 많았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서리집사의 교회 이탈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밝혔다.

집사 수 감소는 교회 내 고령화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예장통합 교회 통계를 연령대별로 재분석해 보면 60대 이상 교인이 전체의 25.4%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50대 16.58%, 40대 17.23%, 30대 13.07%, 20대 10.05%에 비해 훨씬 높다. 60대 이상은 교회 직분에서 은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젊은이들로 잘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늘어나는데 서리집사와 교인이 줄어드는 건 교회를 역삼각형 구조로 만들어 불안정성을 초래한다. 서울 서초구 온무리교회 조용선 목사는 “한국교회가 마을 및 이웃과 함께하는 모습이 적을 때 젊은이들이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고 이탈하게 된다”면서 “이웃 그중에서도 약한 자를 진심으로 섬기고 배려해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옥한흠·이찬수·유기성 제치고 유튜브 조회수 1위한 목사



▲유튜브에서 조회순으로 설교영상을 검색한 결과의 중간 부분 ⓒ유튜브 홈페이지 캡쳐


=========================================
오늘의 스트레스는 바로 내가 키운 것이다

스트레스 다스리기/토드 홉킨스 지음/정성묵 옮김/두란노



근심과 스트레스 없는 삶이 가능할까. 책 소개를 위해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부담감에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마감병’(마감 때까지 일을 미루는 기자들의 병)에 시달릴수록 스트레스는 커졌다. 마감을 하루 앞두고서야 책을 다 읽었다. 읽고 보니 오늘의 스트레스는 내가 키운 것이었다.

책의 저자는 ‘청소부 밥’으로 유명한 스토리텔러 토드 홉킨스다. 이번에도 역시 재미난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법을 소개했다. 저자는 스트레스를 키우고 줄이고의 선택권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위한 10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이 중 하나라도 지켰다면 스트레스는 크게 줄었을 것이다. ‘일을 미루지 말고 미리 하기’ 두 번째 원칙이 비수처럼 꽂혔다.

저자는 우리가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 따른 우리의 반응을 통제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부정적 감정을 좋은 감정으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일이 아닌 자기계발로 여겼다면 어땠을까. 밤잠을 설치는 일이 줄었을 것이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줄었을 것이다.

마음속 후회를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저자는 실수를 곱씹지 말고 실수에서 배우라고 말한다. 배울 건 배우고 옛 실수는 털어버리고 전진하라고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진전을 축하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완벽에만 감사하면 어떤 일에도 감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또한 스트레스라고 말이다.

저자는 스트레스 없는 삶의 필수 조건으로 좋은 관계를 꼽는다. 그리고 이 관계를 가꾸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관계에는 ‘위층’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도 포함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직진 인생들에게 매일 아침 멈춰 하나님과 단 둘이 대화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오히려 생산성과 효율이 높아져 더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기만의 선언문을 만들어 격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라고 말한다. 이 글이 선언문이 될 수도 있겠다.


==============================================================================
기모노가 '성행위를 위한 옷'이라는 한 선교사의 무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 일본을 향한 한국인의 오해와 편견
홍이표 (newsnjoy@newsnjoy.or.kr)

아내와 딸이 기모노 입은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다워 감탄을 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한국인,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모노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편견이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11년 전, 내가 속한 교단의 선교사 파송 교육에 서울 강남의 한 대형 교회 소속 선교 담당자가 강사로 왔다. 일본에서 3~4년 선교사로 있었다는 그녀는, 일본에 대한 자신의 이런저런 견해를 늘어놓더니 불쑥 기모노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기모노가 어떤 옷인지 아세요? 아무 곳에서나 바로 펼쳐서 그 위에서 섹스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옷이 바로 기모노예요! 허리 뒤에 담요 같은 것 매단 것 보셨지요?"

순간 아연해진 나는 함께 수강 중이던 일본인 아내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어서 강사는 "일본의 여중생들 중에는 섹스를 안 해 본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말했다. 요지는 그러한 음란의 영에 사로잡힌 나라 일본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한 아내는 일순간 성적으로 문란할 수 있는 여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주변 동료들도 아내를 의식했는지 무안해했다. 아내는 불쾌감을 안 드러내려 애쓰는 표정이었다. 청중 가운데 있을지 모를 당사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수많은 교계 강사들 모습에서 심각한 무례함을 느낀 일이 적지 않다.



필자 부부의 일본 선교사 파송 예배 모습. 기모노와 한복 두루마기. 사진 제공 홍이표

'기모노'에 대한 왜곡된 정보는 인터넷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 '일본에 대해 알면 좋은 상식'과 같은 제목으로 여전히 자주 등장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쟁 직후 남자들이 많이 죽어 인구를 늘이기 위해 아무 곳에서 아무 여자나 붙잡고 마음대로 성행위를 해서 임신시킬 수 있도록 명령했는데, 그때 이불 담요처럼 즉석에서 깔 수 있게 고안한 옷이 바로 기모노라는 것이다.

특히 '오비'帯라 부르는 넓은 허리띠의 뒤쪽에 풍덩한 사각형 매듭이 고정된 것을 보고, 마치 성행위를 위해 마련된 이부자리인 것처럼 상상하고 그대로 믿어 버린다. 심지어 기모노를 입을 때는 팬티를 입지 않도록 하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주장도 인터넷상에서 수없이 떠돌고 있다. 그 설명을 일본인에게 하면 모두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놀라워한다.

설사 도요토미 시대의 성 문화가 개방적이고 여성 억압적이었다 할지라도, 조선의 가부장성이 보인 성적 분방함도 그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도요토미 때부터 축첩 공인이나 유곽 제도가 생겨났지만, 그것은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고, 유곽 제도를 만든 것도 실은 남녀의 문란한 생활을 정부가 관리하려는 차원에서 발생한 조치였다. (데루오카 야스타카, 정형 옮김, <일본인의 사랑과 성>, 소화, 2001.)

그런데 한국에서는 '동물의 왕국'과 같은 야만적 일본상像이 당연하다는 듯 일상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그러한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표출된 대표적 소재가 바로 '기모노'이며, 특히 그 시선은 '오비'(허리띠)에 집중돼 있다.

기모노의 뿌리는 우리 옷

'기모노'着物는 말 그대로 '걸치다'는 의미의 '키루'着る라는 동사와 물건이라는 뜻의 '모노'物가 합쳐진 말이다. 즉 '옷'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전통 옷인 '한복'의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면 '와후쿠'和服라는 말도 있다. '의식주'衣食住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가장 기본적인 삶의 보호 수단이다. 그중에도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옷'이다. 그러므로 '옷' 그 자체인 '기모노'도 추운 바람과 뜨거운 햇빛, 병충해 등으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풍속사 연구의 1인자로서 교토여자대학 교수였던 에마 츠토무江馬務(1884~1979)는, <일본 복식사日本服飾史>(1929)에서 일본의 기모노 역사를 총 6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1기는 왜민족倭民族 고유의 풍속기, 제2기는 한반도와의 빈번한 교류에 의한 고유 풍속이 한풍화韓風化되어 소박함에서 화려미가 더해진 시기, 제3기는 당나라와의 교류로 그들 문화에 매료되어 맹목적으로 그들을 모방하던 시기,

제4기는 다시 일본의 국풍國風이 부흥한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 제5기는 전국시대 이후 남만인南蠻人(중국 남부)과 동남아인과의 교류로 다시 외국 풍이 들어온 시기, 제6기는 에도시대 이후 서민들의 유행과 서양 문화의 유입 시기로 보았다. 그는 "왜민족倭民族은 언제나 외국 풍속을 유입시켜 되도록 그것을 국풍화國風化해 왔으므로, 대부분이 외국의 요소들이 쌓여 동화되어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는 한반도로부터의 영향도 있음을 솔직하게 말한다. 심지어 이 점이야말로 일본 옷, 즉 기모노의 자랑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나라 복식(기모노, 하카마, 유카타 등)의 오늘날에 이르는 발달에는 수많은 압박壓迫을 받은 체험을 거쳐 성립되었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 일본 복식의 광채光彩가 있고 근거가 있다. (중략) 오늘날 기모노キモノ라는 말은 세계에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서반아西班牙(스페인) 황제는 일본 부인의 의복을 찬미하였고, (중략) 인도의 타고르 옹도 와후쿠和服를 입이 닳도록 상찬賞讚하였다." (江馬務、「日本服飾史」、長坂金雄編、『日本風俗史講座』 第六巻、東京: 雄山閣出版、1929年、pp.166-167.)

동양 복식사 연구의 대가인 스기모토 마사토시杉本正年도, "일본의 복장을 논할 경우, 동시대의 일본 주변 민족의 복장, 즉,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또 연해주 등의 동아시아 문화권의 문제를 무시하고는 그 정확성을 기할 수 없다"(杉本正年, <동양 복장사 논고>, 26~27쪽)고 고백했다. 실제로 <니혼쇼키日本書紀> 제3권에 "백제에서 옷을 꿰매는 공녀 마케스眞毛津가 건너가서 일본의 의봉의 시조가 되었다"(應神十四年春二月 百濟王 貢縫衣工女 曰眞毛津 是今來目 衣縫之始祖也)는 말을 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힘을 빌어 오吳의 옷 꿰매는 공녀 네 사람이 일본에 건너갔다"[應神十七年春二月戊午朔 (중략) 令求縫工女 爰阿知使主等 渡高麗國欲達于吳 (중략) 由得通吳 吳王 於是與工女兄媛·弟媛·吳織·穴織·四婦女]는 표현도 나온다.

여기서 유래하여 일본 기모노를 '고후쿠'吳服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또한 <부상약기扶桑略記> 제3권에는 "법흥사法興寺: 飛鳥寺를 짓고 그 찰주초刹柱礎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던 날 백여인百餘人이 모였는데 모두 백제 옷百濟服을 입고 기뻐하였다"(建法興寺 立刹柱日 嶋大臣弁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以佛舍利籠置刹柱礎中)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옛 일본인들이 한국의 복식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고분 시대의 여자 의복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식이나 신라 토우의 여성 복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杉本正年, 문광희 옮김, "동양 복장사 논고", 경춘사, 1995. ; 北村哲郞, 이자연 옮김, "일본 복식사", 경춘사, 2000. 참조)

이런 사실들을 보면 우리가 쉽게 폄훼하는 기모노 안에는 우리 옷의 영향도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 혼례복 안에 원나라 지배 당시의 몽골 복식(족두리, 연지 곤지 등)이 깊이 스며들어 있듯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옷이란 것은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 완성된 것들이다. 기모노를 모욕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가 모욕당하는 셈이다. 일본에서 수많은 문화가 유입되어 기모노가 완성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자랑하듯, 우리 한복 안에도 그러한 문화적 다양성이 녹아 있음을 직시할 때 그 아름다움에 풍성함이 더해질 수 있다.

오비는 진짜 그런 옷인가?

그렇다면 기모노에 대한 편견이 오롯이 집중되어 있는 오비帯(허리띠)의 유래와 역사는 어떠할까. 도요토미의 야만적 성행위 명령에서 '담요'처럼 생긴 오비가 탄생했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는데, 사실일까.

오비는 이미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 이후 민간에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겉으로 두르는 것이 아니라 안에 안 보이게 묶었다. 밖에 노출해서 묶기 시작한 것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1573~1603)부터이다. <무로마치단 이야기室町段物語>에는 "아동兒童들에게는 의복에 얇은 끈으로 묶은 뒤 오비를 둘렀다"는 표현이 나온다. '오비'는 옷을 입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하는 의복의 필수적인 한 요소였다.

우리 안에 만연한 오비에 대한 풍문이 근거 없는 낭설인 첫 번째 이유는 시기에 있다. 오비의 폭이 지금처럼 넓어진 것은, 도요토미가 지배하던 아지츠 모모야마 시대가 아니라, 도요토미가 죽은 이후 한참 뒤인 에도江戶시대(1603~1868) 중후기 일이기 때문이다.

에도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와 있던 유학자 강항姜沆(1567~1618) 등의 영향으로 조선 성리학의 널리 전파되어 '인의예지신'을 기초로 한 유교 이념이 강화된 시기이다. 심지어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남녀유별 사상도 확산되었다. 헤이안 시대 때만 해도 불륜 개념 등 남녀 윤리 의식이 강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점차 엄격해졌다. 가마쿠라시대(1192~1333)에는 불륜을 토지 몰수 형벌로 다스렸고, 무로마치 시대(1338~1573)에는 간통한 양자 모두 사형에 처하는 형벌이 공인되기도 했다.

이후 에도시대의 <어사치례유집御仕置例類集>은 하인이 주인의 딸과 정을 통하면 참형에 처해진 판례가 기재돼 있으며, <지방공재록地方公裁錄>이란 판례집에도 무거운 판결 기록이 보이는 등, 중세 봉건시대의 일본이 결코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였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에도시대에는 '중혼 금지규정'도 더욱 엄격해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바로 이런 시기에 폭이 조금 넓어진 오비를 보고 섹스 편의를 위한 담요라고 왜곡하고 있다.

고대에 한반도가 일본의 복식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앞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비'도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까지는 조선의 끈목 기술이 전파되어 사용된 것이었다. 기모노뿐 아니라 '오비'의 뿌리에도 우리의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허리끈이 그리 넓을 필요는 없다. 당연히 칸분寬文 시대(1661~1673) 전까지만 해도 오비의 폭은 7cm 정도밖에 안 됐다. 그리고 속옷 쪽에서 묶어서 밖으로는 내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에도막부 시대에 이르러 유교 사상의 강화로 남녀 성 윤리도 통제가 강화되자, 점차 서민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런 욕구 표현의 갈증이 증폭된다. 그 결과 오비의 폭을 점점 넓혀 화려한 문양을 새기고 돋보이게 하는 패션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7.5cm 정도였던 오비가 1670년대에는 11cm로, 1680년대 들어서면 22cm 정도로, 1690년대에 이르면 지금의 오비 정도에 해당하는 34cm 정도로 폭이 넓어져 갔다.

특히 엔보우延寶(1673~1681) 시대에 일반 서민들도 폭이 넓은 오비를 본격적으로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있다. 유명 가부키歌舞伎 배우, 즉 시라뵤시白拍子인 우에무라 키치야上村吉弥는 꽃놀이를 가다가 한 소녀의 오비 매듭帯結び을 보고 감탄하여, '키치야 매듭'吉弥結び을 고안했다. 무대 위에서 그 매듭을 선보이자, 수많은 여성 대중이 그 화려한 오비에 환호하였고 대유행으로 이어진다. (增田美子, 『日本服飾史』, 吉川弘文館, 2010, p.250-251. ; 增田美子, 『日本服飾史』, 東京堂出版, 2013, p.132. ; 홍나영 외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 한·중·일>, 교문사, 2011, p.386.)

가수 이효리나 소녀시대가 입은 새로운 패션이 크게 유행한 뒤, 전에 없던 새로운 의상 문화가 생겨나는 현상과 비슷한 일이다. 한국에 미니스커트를 가장 먼저 알린 인물은 다름 아닌 독실한 크리스천 가수 윤복희 씨다.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엄혹한 그 시절은 에도시대와도 비슷했다. 1967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는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억눌려 있던 많은 여성들은 환호했다. 치마 길이 단속이라는 억압 속에서도 그 당시 여성들은 금기를 깨고 미니스커트를 입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화한 미니스커트처럼, 넓고 화려해진 에도시대의 오비는 속박당하던 여성들의 유일한 자기표현과 욕구 분출의 통로였다.

물론 오비와 그 매듭 방법을 비롯해, 화장법, 머리 모양 등의 유행을, 가부키 배우나 유곽의 유녀遊女들이 선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황진이黃眞伊(1500년대) 같은 예인들이 각 시대마다 한복의 새로운 유행을 이끈 바 있다. (심지어 12년 전 드라마 '황진이'에서 하지원이 입은 한복도 크게 유행하여 한복의 역사를 바꿨다.) 새 유행으로 사치 풍조가 확산될 것을 엄려한 에도막부는 더욱 엄격한 통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 만연한 유행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에도시대에 탄생한 기모노 오비의 탄생 배경이다. 복식사 연구가 스기모토의 말을 들어 보면, 넓어진 오비가 도요토미 시대에 자유 성행위를 돕기 위해 고안된 것이란 풍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기모노의 문화는 에도시대에 이르러 가장 순수한 일본의 문화재로서 완성된다. (중략) 사농공상이라는 절대적 계급제도 속에 억압받는 서민, 특히 상인들의 자기주장과 욕구불만은 복장 속에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함으로써 해소되었다." (杉本正年, <동양 복장사 논고>, 22쪽)

외국인의 눈에 오비는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장식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오비야말로 세계 복식사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일본 예술 문화라고 자랑한다. 작달막한 일본인의 체구를 둘로 나누어 더 예쁘게 보이도록 한 일본 미학의 결과가 바로 '오비'라는 것이다.

복식사 연구자 마스다 요시코增田美子는 "이 시기에 유행한 무대의상과 일반 복식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복식 표현이 창출된다. 대표적인 예 가운데, 마츠모토 코우시로松本幸四郞의 '고라이 야지마'高麗屋縞(고려옥 명주)를 들 수 있다"(增田美子, 『日本服飾史』, p.273.)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풍의 영향은 에도시대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데도 기모노를 타자화하여 바라보기만 할 수 있을까.

○○ 눈에는 ○○만 보인다

오래전 동양 복식사 연구자에게 이러한 풍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근거가 없는 왜곡이 만연해 있어 곤혹스럽다며 한탄했다. 그러한 기모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그대로 우리 옷 '한복'韓服으로 가져오면 오히려 더 무안한 반론에 봉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행위 시의 편의성만 놓고 보면 기모노보다 오히려 한복이 더 간편하고 개방적이라는 그릇된 주장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여성 기모노와 치마저고리를 향한 음흉하고 폭력적인 남성들의 가부장적 시선에 기초한다.

기본적으로 기모노 안에 껴입어야 하는 속은 4~5겹 정도 된다. 궁중이나 귀족 명문가에서는 쥬니 히토메十二単, 즉 12겹단이라고 해서 그걸 다 입으면 옷의 무게만 18kg에 달한다. 일반인들도 한 시간 넘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입어야 할 만큼 입기 힘든 옷이다. 이 말은 곧, 기모노를 벗는 과정도 매우 힘겹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옷이 성행위의 편의성을 위해 고안된 옷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 왜곡된 시선을 그대로 한복에 투사할 때 우리는 매우 불쾌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과거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에 돌아가 우리의 한복을 단순히 "성행위 직전에 탈의할 필요조차 없는 섹스 편의성이 극대화된 옷"이라고 소개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크게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를 연구해 온 필자는 한복에 대한 그런 왜곡된 진술을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일부 한국인들은, 기품 있고 우아한 한복에 비해 기모노는 일본의 문란한 성적 문화와 풍토의 소산이라는 식으로 단정 지어 왔다. 그 왜곡된 시선과 무지, 편견을 한국의 일부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재생산하고 전파한다.

오히려 기모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겹겹으로 된 복장 때문에 (일본 여성들은) 평생 그 자유를 속박당해야만 했다"(杉本正年, <동양 복장사 논고>, 22쪽)는 스기모토의 지적일 것이다. 가부장적 남성 권력이 여성을 억압해 온 과정에서 기모노가 오히려 폐쇄적 복식 문화로 완성돼 왔음을 직시하여, 어떻게 하면 여성을, 그리고 기모노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하게 할 수 있을까에 관심해야 한다.

옷이란 기본적으로 몸을 보호하고, 체온을 유지시키며, 인체와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이지, 섹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럴 경우 에덴동산에서처럼 옷은 무용한 것이 된다. 각 나라, 민족이 서로 다른 언어와 습관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모노를 바라보는 우리의 왜곡된 시선은 '일본어는 음란한 언어, 섹스를 위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느 외국인이 한글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결국 '인종차별, 민족 차별'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일본의 기모노를 보고 그러한 상상을 하는 한국인들의 음란한 사고방식이, 기모노는 섹스를 위한 옷이라는 무례한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근본 문제는 오히려 한국인의 마음과 시선에 있다. 일본에서 겨우 3~4년 활동한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전문 지식으로 가장하여,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일본 선교 필요성의 근거로 예의 '기모노론'을 펼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끔찍하다.

언더우드 집안은 오얏나무 아래서…

기모노 왜곡과 더불어 한국의 여러 블로거와 유튜버는 일본인의 '성씨'姓氏에 대해서도 동일한 왜곡을 일삼는다. 내전이 일상이었던 전국시대 당시 아비의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 수없이 태어나게 된 결과, 지금의 일본 성씨가 생겨났다는 낭설이다. 이름 짓기가 곤란해진 나머지 이름 모를 남자와 섹스를 행한 장소를 따서 '성씨'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성씨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기노시타木下: 나무 아래서.
야마모토山本: 산속에서 만난 남자의 씨.
다케다竹田: 대나무 밭에서 작업을 한 아이.
오오타케大竹: 큰 대나무 아래서.
오오타太田: 콩밭에서.
모리시타森下: 숲 아래에서.
모리나카森中: 숲 속에서.

(중략)

"밭 전田 자가 많은 것은 논에서는 그 짓을 할 수 없어 주로 밭에서 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는, 글의 마지막 문장이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일본에서 '전'田은 한국과 달리 '논'田んぼ(탄보)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한자이다. 오히려 '밭'은 '하타케'畑라고 쓰기 때문이다. 한자의 용법이 한국과 전혀 다르다. (우리가 쓰는 '공부'工夫라는 말을 일본에서는 '뱅쿄'勉強라고 쓰며, 일본에서 공부工夫라는 말은 오히려 '궁리, 고민'이란 뜻으로 쓰인다. 한일 간에 다른 의미로 쓰는 한자 용례는 수없이 많다.)

저런 근거 없는 주장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이들의 '상상 조작'의 결과이다. 위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일본인들은 논두렁 물속에서 남녀가 뒹굴며 아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된다. 실로 자의적인 추측과 모욕적인 무례함, 음란함에 기초한 발상이다

장소를 의미하는 일본의 성씨가 많은 이유는, 메이지유신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이름 없던 평민들이 '본적 의무화 제도'로 인해 성명姓名을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는 곳의 지형지물을 보고 성씨를 급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유독 장소를 의미하는 표현들이 눈에 많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성씨'에 대해서까지 모욕을 일삼는 것은, 과거 우리가 일본인에게 당했던 '창씨개명'의 폭력성과 결코 다를 바 없는 만행이 되고 만다.

저런 왜곡된 시선을 영미인들의 이름들에 그대로 적용해 보자. 아래의 성씨들을 모두 성행위 시간 및 장소를 연상하며 읽어 보자는 것이다.

우리의 굴절된 시선을 영미권 이름에도 적용해 보면, 인천 상륙작전을 이끈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검은 언덕'에서 생겨난 인물이 되며, 1908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주도한 미장로회의 리(Lee) 선교사는 '초원'에서 행한 성행위를 통해 태어난 자손이 되며, 한국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조상들은 '나무 밑, 혹은 숲 속'에서 모두 2세들을 만든 셈이 된다. 언더우드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풀어 쓰면, 그대로 '키노시타'木下나, '모리시타'森下가 된다. 일본에서 가장 흔한 두 성씨가 바로 영어로는 '언더우드'(Underwood)가 되는 것이다.

탄고미야즈교회 식탁에 놓인 오비(왼쪽). 사카네 교우가 직접 만든 오비를 보여 주고 있다(오른쪽). 사진 제공 홍이표

2003년에 연세대 캠퍼스 내의 '언더우드家기념관' 건립 준비를 위해, 언더우드 3세인 원일한元一漢 박사를 모시며 반년 동안 사담私談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원 박사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 '원 씨'元氏가 아니라 '이 씨'李氏가 맞아요!"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했다.

"이李라는 한자는 나무木 밑에 아이子가 있다고 풀이할 수 있지요. 영어로 표현하면 'under wood'가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 씨는 모두 언더우드(underwood)인 것입니다."[I joke with my Korean friends that the Lees are all Underwoods. The Chinese character (李) for Lee is tree (木) over a child (子) - obviously 'under wood.] (원일한,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연세대출판부, 2002, 9쪽, Korea in War, Revolution and Peace : The Recollections of Horace G. Underwood, Yonsei University Press, 2001., xi.)

필자가 확인한 인터넷상의 한 블로거는, 일본 전국시대에 허용된 강간 및 섹스 창궐 때문에 생겨난 이름(성씨) 중 1위가 바로 '키노시타'木下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나무 밑, 나무 아래"를 영어로 하면 언더우드(Underwood)가 되고, 한국과 중국에 오면 '이 씨'李氏가 된다.

조선왕조 500년 이 씨들, 그리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 아무개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간 한국은 오얏나무 아래에서 섹스를 하며 생긴 후손들이 통치를 해 온 셈이 된다. 박 씨朴氏들도 후박나무 아래의 집안이라 하고, 김 씨金氏들은 돈金으로 성을 사고판 결과로 유래한 자식들이라고 외국에서 우기면 어찌 답할 것인가. 이웃 나라의 전통 복식과 그 이름자까지 모욕하는, 저 근거 없는 망발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필자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수많은 성 추문과 추행, 성폭행과 간음, 성희롱 발언들을 들으며 늘 기모노를 떠올린다. 일본은 음란의 영에 사로잡혔다며 그들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외치기 전에,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가부장적인 언어폭력 및 음란에 대한 일부 목회자와 정·재계 크리스천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음란물의 최대 사용국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생산과 공급은 곧 소비자가 존재하므로 지속된다. 그러면 일본의 성적 타락을 선교의 명분으로 삼으며 회개를 촉구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성적 문란과 타락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랜 전통 가운데 형성된 일본인의 자부심이 '기모노'이다. 또한 한 벌에 최저 500~600만 원에서 비싼 것은 1000만 원 이상 호가하여 가보로 물려주는 옷이 '기모노'이다. 그런 옷을 천박하게 폄훼하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 간다는 것은 버겁고 힘든 일이다.

이곳 일본인들은 한국 개신교 선교사인 필자를, 성적 문란함으로 국제적 망신을 사고 구속됐던 JMS의 교주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기독교복음선교회'基督教福音宣教会와 '섭리'摂理, 한때는 '예수교대한감리회 애천교회'라는 단체 이름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기모노를 모욕하는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나는 JMS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어찌 항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든 오해와 편견은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탄고미야즈교회의 오비帯

작년까지 필자는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의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동해와 닿아 있는 그 지역은 예로부터 조선과 교역이 활발했고, 미야코都(수도)인 교토京都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었다. 교토로부터 미야즈만으로 흘러나오는 유라가와由良川를 역류하여 옛 고려인과 조선인들도 일본의 도읍을 찾았다. 자연히 미야즈는 교토 '니시진오리'西陣織り와 함께, 일본 전통의 의상 기모노 원단과 오비의 명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 교회에 3대째 출석 중인 사카네坂根 부부는, 50년 평생을 미야즈 요사노쵸与謝野町에서 기모노의 허리띠인 오비おび, 帯를 생산해 온 장인 커플이다. 하루는 직접 제작한 오비 한 장을 가져와 현관의 접수 데스크와 친교 테이블을 장식했다. 그 일을 계기로, 교회 창립 125주년을 기념하여 강대상 십자가 주변을 오비로 장식하자고 제안했다. 사카네 부부는 아끼는 작품을 교회에 흔쾌히 기증했고, 아름다운 금색 오비는 십자가와 함께 교회의 자랑이 되었다. 탄고미야즈교회의 십자가와 오비는 그렇게 아름다운 동행을 시작했다.

셔우드 홀 박사의 제자들. 맨 앞줄 한복을 입은 여자 신학생 옆에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이 앉아 있다. 셔우드 홀 박사 부부는 한국 최초의 결핵 병원을 세웠고, 크리스마스실 운동을 창안했다. 서태원, 장낙도 목사 등이 보인다. 사진 제공 홍이표

매년 1월 두 번째 월요일 '성인成人의 날'이 되면 거리는 온통 원색의 기모노를 차려입은 스무 살 앳된 여성들로 가득하다. 2014년 그날(1월 13일), 오사카 이쿠노구의 츠루하시를 찾은 적이 있는데, 치마저고리(한복)를 입은 우리 교포 여학생들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기모노와 한복의 평화로운 조화에 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날 일본기독교단 오사카교구에서 강연회가 있었다. 주제는 '한국에서 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 인종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제언'이었다. 문득 '기모노'를 향해 우리가 '헤이트 스피치'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나 자문해 보았다. 한국에서 기모노는 여전히 참으로 괴롭다.

홍이표 목사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admin

�댁쟾�쇰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