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원의 의미 2001-12-10 15:46:20 엡2:1-10 성경본문보기 지난 9월11일에 있었던 뉴욕 무역센터 빌딩의 공격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영화 같은 테러 사건이었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영화 같은 구출사건은 1976년 7월, 아프리카 우간다의 공항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76년 6월27일, 그리스 아테네 공항을 떠난 Air France 비행기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서 하이재킹(hijacking)을 당해 공중 납치되었던 것입니다. 비행기 안에는 102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곧 인질로 잡히게 됩니다. 이 비행기는 당시에 이디 아민이 통치하고 있던 우간다의 수도 공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당시 라빈 수상이 이끌고 있던 이스라엘에서는 즉각적으로 긴급 내각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 비밀스럽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며칠 후, 당시 30세의 요나탄 네탄야후 대령이 이끄는 특별 작전 요원들이 6대의 비행기에 분승하고 이스라엘을 떠나갑니다. 네 대의 카고 비행기, 두 대의 707 보행 제트 비행기들이 동원되었습니다. 한 대에 주로 전투 요원들이 탔고 나머지 비행기들은 부상자들의 치료 및 후송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은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해서 저공비행을 해서 우간다의 수도 공항에 안착합니다. 그리고 불과 15분~20분 내에 모든 작전은 끝났습니다. 인질들을 구출하고, 이들은 유유히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엔테베 작전입니다. 물론 세 명의 인질이 희생되고 작전 요원 한 사람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이 작전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공적인 구출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 이후에, 네탄야후 대령에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마음속에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이때 네탄야후 대령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나의 동족 인질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 이 생각밖에 저는 아무 다른 생각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엔테베 작전과 비교될 수 없는, 이 작전을 넘어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의 드라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작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우리가 만약 그 예수님 앞에 가서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얼마나 아프셨나요? 얼마나 두려우셨나요? 그때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 주님은 아마도 네탄야후 대령과 거의 비슷한 대답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는 사람들이 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과 내가 그들을 구원해야 하겠다는 생각, 이 생각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설명하는 대목마다 반드시 이런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들의 구출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그 대답을 바울 사도의 유명한 에베소서 2장의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부활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의 부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2장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사건, 구원은 부활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는 구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오해가 있다면, 구원을 단순히 개선이나 개혁의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교회 나가고 예수 믿더니 사람이 좀 나아졌어!" 하는 수준, 보다 나은 인간(Better person)이 되는 수준에서 구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구원을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원은 단순한 개선이 아닙니다. 구원은 새로운 존재의 창조입니다. 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새 인간(New person), 새로운 존재(New being), 새로운 존재에로의 부활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국인이 되려면 반드시 미식축구를 즐겨야 한다" 는 얘기들을 합니다. 저도 미국에서 지내면서 조금씩 미식 축구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와싱톤을 대표하고 있던 와싱톤 레드스킨tm라는 팀은 한창 그 절정에 도달하는 기량으로, 챔피언십을 몇번이나 거머지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미식축구 게임이 주일날 있을 때는 교인들이 한참 헤매고 갈등을 하더라구요. 교회 갈 것이냐? 볼 것이냐? 그래서 아예 주일날 오후에 특별 방을 하나 준비하고, 거기다가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볼려면 교회에 와서 다같이 보아라!"하고 광고했던 재미나는 추억도 갖고 있습니다. 그때 와싱톤 레드스킨스를 이끌던 분이 아주 유명한 코치였습니다. 조 깁스라는 분인데, 현재 명예의 전당 안에 그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유능한 코치였습니다. 아마도 그분의 활동 때문에 그렇게 우수한 팀이 될 수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분은 좋은 크리스챤이었어요.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미국 침례 교회의 집사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이분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분이 코치로 텔레비전에 나오시면 우리는 "조 집사님 나오셨다"고, 영어로 이름이 조 깁스이니까, 조 집사님이 나오셨다고 아주 좋아했어요. 사람들이 하도 좋아해서 그분을 간증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분의 간증 가운데 한 대목을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간증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친구가 집에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대요. 그런데 어느날 밖에 나갔다가 저녁 어둑어둑할 무렵에 들어오다가 보니까, 자기 개가 집 앞에서 하얀 동물을 씹고 있는 거에요. 순간적으로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답니다. 그 집 바로 옆 집에도 애완용 동물로 토끼를 기르는데, 혹시 이웃집 토끼를 씹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어요. 너무 당황해 가지고 얼른 토끼를 빼앗아서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사람이 너무 당황하게 되면, 자기도 예측하지 않는 비이성적 행동이 돌출적으로 나올 수가 있잖아요? 토끼를 가지고 키친에 가서 수도 꼭지를 틀고 막 씻는 거에요. 비누로 씻고, 그 다음에 향수를 뿌리고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기다렸다가 조금 어둑해진 다음, 토끼를 가지고 뒷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옆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토끼장을 들여다 보니까 토끼장이 비어 있어요. "아! 틀림없이 이 집 토끼였구나! 휴~" 하고서 토끼를 다시 원 위치시켜 놓았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자는 둥 마는 둥 그날 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일터에 갔다가 궁금해서 조금 일찍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이웃집으로 가서 토끼장 옆을 서성거립니다. 범죄수사학의 원리에 이런 말이 있지요?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 그래서 시침 딱 떼고, 그냥 토끼장 근처로 왔다 갔다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웃집 주인이 마침 나와요. 그래서 "잘 지내시나요?"(Hi, How are you doing?) 하고 인사했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려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3일 전에 자기집 토끼가 죽어서 토끼 공원묘지에 데리고 가기 전에 우선 임시로 뒷뜰에다 잠시 파묻어 놓았는데 어떤 놈이 그 토끼를 파내어 가지고 목욕을 시키고 비누칠을 하고 향수까지 뿌려가지고 거기다가 원 위치시켜 놓았다는 거에요. 조 깁스가 그 얘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그냥 죽어있는 시체에 비누칠하고 향수뿌리는 정도로 구원을 이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살아나요? 시체에 비누칠하고 향수 뿌린다고 시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죠. 오늘 본문에 보시면 에베소서 2장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교회에서 대표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런데 성경은 그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영적인 시체란 말이지요. 여기에서 죽었다는 말은, 성경에서는 항상 단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허물과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허물과 죄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기능적으로 차이가 있는 개념이에요. 허물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잔디밭에 팻말을 써 붙입니다. "들어가지 마시오!" 그런데 들어가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 그것이 허물입니다. 반대로 이 죄라는 개념은 내가 맞추어야 할, 명중해야 할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를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화살을 쏘았는데 목표에서 빗나가요(Missing the mark). 그러니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허물과 죄에요.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법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 법을 깨트렸어요. 하나님 법을 깨트렸으니까 죄인이지요.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영적인 시체가 된 거에요. 영적으로 죽은 거에요. 영적인 시체에게는 해답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시체에게는 생명이 들어와야 돼요.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야 돼요. 그래서 살아나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설명할 때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내 인생 속에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분이 내 마음속에 오시도록 초청하여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을 내 안에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상태,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통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명을 갖기 전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세 가지의 지배를 받고 살았어요.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 가지,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적이기도 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오지 못하는 것이에요. 본문에 의하면 그 세 가지는 세상과 마귀와 육신입니다. 2절에 보시면 "그때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흐름, 이세상의 철학, 이 세상의 잘못된 유행,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 그것들에게 맹목적인 지배를 받으며 살아온 것을 말합니다. 또 보시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를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보시면 이 마귀의 존재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이라고 말합니다. 이 악령의 지배, 마귀의 지배를 일방적으로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보시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부패성, 우리를 죄를 짖게 만드는 부패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복음을 듣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했을 때 세상의 지배, 마귀의 지배, 육체의 지배를 일방적으로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갖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부활합니다. 저는 이 부활 체험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그림 하나가 있다면, 에스겔서 37장에 나타난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에스겔 선지자를 부르셨어요. 그리고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어요.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해요. "하나님 하필이면 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십니까?" "이 마른 뼈들을 보아라" 그것을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정황, 상태를 보여주시려고 하는 거에요. "이 마른 뼈들을 보아라. 불쌍하지?" "녜, 그래요" "그러면 에스겔아 너 그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 "아니 그 뼈들을 향해서 말씀을 전해요?" "그래! 그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 그래서 말씀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요. 뼈들이 붙기 시작합니다. 뼈들이 서로 척척 붙어요. 붙어서 거기에 힘줄도 생기고 살가죽도 생기고 그러면서 사람의 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안에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에스겔아! 이번에는 사람 모양이 된 그뼈들을 향해서 생기를 불어넣어라, 생기야, 그 속에 들어가라! 외쳐 보아라" 그래서 에스겔이 외칩니다. "하나님의 생기여! 이 사람들 속에 들어갈지어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 모양이 된 그들이 벌떡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거대한 군대가 되어서 골짜기에서 일어서요. 이것이 놀라운 그림이죠?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서 "목사의 보람이 뭘까?"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목회가 쉽지는 않아요. 저도 가끔 그만둘까 하는 유혹을 받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 앞에 계속 나를 던질 수 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런 에스겔의 골짜기 체험 때문에 그래요. 제가 이렇게 강단에 서서 보면, 어떤 때는 여러분이 다 뼈들로 보여요. 다 죽어있는 뼈처럼 보여요. 그런데 한참 설교하다가 보면 살아나요. 눈에 생기가 돌고 갑자기 얼굴이 변하고 그래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계속 죽어 있지만, 어떤 사람은 막 살아나요. 예배가 끝나고 뒤에서 여러분들을 만날 때, 성령의 터치를 받고 그 생명이 소생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변화된 얼굴로 나오시는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 "이거야! 이 세상에 이보다, 생명을 살리는 사역보다도 더 존귀한 사역은 없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저로 하여금 이런 사역 앞에 자신을 던질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에너지,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같은 경험을 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전도할 때 그것은 죽은 사람 살리는 일이에요. 이번 목요일 날부터 우리가 이웃초청 생명의 잔치를 엽니다. 주님 없이, 복음 없이 살던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초청해서 복음을 듣게 해서 결신 시간에 그들이 손을 번쩍 들고 예수 믿겠다고 그들이 일어서는 순간, 그 순간이 부활의 순간이예요. 여러분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어요? 죽은 사람 살아나는 기적, 기적의 부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의 부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입니다. 1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은 부활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창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구원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 속에 들어가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생활은 뭘까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예요.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순종의 아들이 되고, 전에는 세상에서 절망하고 있던 우리가 하나님 보좌를 바라보며 살고, 여기 그런 구원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이 나와요. 2절을 보시면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불순종의 아들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들" 불순종의 아들이 순종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또 3절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그 다음 절에 보시면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불순종의 아들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아름다운 새 생활 속에 들어갑니다. 사실 이 에베소서 2장 10절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 한글 성경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런데 표준 새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의 새로운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일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로운 삶을 살도록 그 새 생활 속에 들어가게 된 새로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라는 말이 희랍어에는 포이에마(Poema) 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포이에마에서 나온 영어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Poem, 시(詩)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다시 바꾸면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시(詩)다. 너희는 하나님의 노래다" 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새로운 작품으로 간주하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에요. "너는 이제부터 나의 시(詩)야! 너는 나의 노래야" 우리는 새로운 작품으로 빚어져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놀라운 생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들 쳐다보시면서 한번 그렇게 말해보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다시 한번 더 진지하게 쳐다보시면서 말해보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시(詩)고 하나님의 노래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도 강조했습니다만, 구원이란 것은 단순히 지옥만 면하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옥 않가요. 천국 백성이 되었어요. 그러나 구원은 거기서 끝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노래 같은 인생, 시 같은 인생, 이런 놀라운 삶이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수녀 시인 이혜인씨가 쓴 『두레박』이라는 책에 보면, 자기 친구가 보낸 글을 읽다가 시인은 자신의 소명이 단순히 시를 쓰는 자가 아니라, 시를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의 친구는 그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수녀님 우리의 작업은 시를 쓰는 것보다는 마지막 삶의 핵심에서 시를 추구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시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나의 시가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익혀두고 더 묵혀서 어느날 인류의 가슴에 불을 당기고 밝히는 하나의 시가 남기를. 땅 속 깊은 곳으로 가서 더 순수하고 투명한 물을 퍼 내십시요. 하나님은 그 아름답고 고독한 작업을 당신에게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를 만드는 아름답고 고독한 작업,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시작입니다. 시를 만드는 인생, 노래를 만드는 인생, 내가 하나님의 시가 되고 하나님의 노래가 되어가는 일, 구원은 거기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그날부터, 우리의 인생은 이 아름답고 착한 시를 쓰는 선한 인생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구원이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시와 같고 노래와 같은 새로운 생활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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