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박힌 사람 2001-12-11 06:48:22 갈라디아서 2:17-21 ======================================================================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부끄러운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3월에 뉴욕에 있는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었는데 집회를 마치고 나서 하루 시간을 내서 차를 하나 빌려 가지고 드라이브를 좀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틀란타 시티에 가서, 그게 도박장이 있는 도시입니다. 슬롯머신을 통해서 도박을 해 가지고 130불을 땄습니다. 그것 가지고 모든 비용을 다 치르고, 아주 후하게,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도박 따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땄을 때 일어서야 합니다. 이제 얼마 벌렸는데, 그 쿼터가 500개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만한 통에 가득 돼요. 이거 쏟아진 다음에 벌떡 일어서고 말았어요. 그게 어렵습니다. 꼭 더 나올 것 같거든요. '좀 더 따면 안되나?' 그러다가는 다 집어넣고 맙니다. 그게 망조예요. 그러니까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땄을 때 벌떡 일어서는 거, 그거 보통 위대한 용기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얼마를 잃었습니까? 잃었으면 이제 잃은 것으로 끝나야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만회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그것이 패가망신하는 이유입니다. 얼마를 잃었든 잃은 것은 잃은 거예요. 그냥 끝난 거예요. 다시 시작을 해야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하다가 자기 생명 다 바치는 거예요. 여러분 얼룩진 과거, 잘못된 일, 후회스러운 게 너무 많아요. 그 명예에 있어서 경제에 있어서 인권에 있어서 많은 손해가 있어요. 이 분하고 억울한 것, 이거를 봉창을 내겠다는 거죠. 만회하겠다고 하다가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거죠. 지나간 건 지나간 거예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예요. 손해를 본 것은 본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을 내야 됩니다. 바로 여기에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올시다. 자기와의 싸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리버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신앙하는 사람들의 윤리생활을 말하면서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인간 실존의 세 가지 유형을 말합니다. 첫째는 Man the Maker,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스스로 행동합니다. 무엇인가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내가 무엇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한 의식의 존재가 있고, 둘째는 Man the Citizen.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시민전체 속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이 시민들과 나와의 관계, 이 윤리성에 있어서 의무와 율법을 잘 지켜가겠다. 그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바른 시민의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거기에 모든 힘을 기울이며 사는 사람이 있다. 세번째 사람은 Man the Responser, 그것은 항상 응답하는 자로 삽니다.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어. 나는 분에 넘치는 신세를 졌어.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나는 늘 부족하고 이렇게 형편없는데 받은 사랑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 이것은 내 한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그는 Responser로 오직 응답적 존재로 자기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쪽입니까? 이 모든 문제를 제가 더 분석해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무엇입니까? 예수를 배우는 것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까? 예수를 본 받겠다는 것입니까? 예수처럼 살아보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겁니까? 다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가지고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엄격히 말하면 오순절 성령받을 때까지는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저 예수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죠.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말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 있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올시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고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올시다. 그래 '예수를 믿는다'란 곧 십자가 이해에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쳐다볼 때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요 내 대신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인데 그가 대신 죽었습니다. 아직 나는 살아있으나 의미상으로 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내 대신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체험이 확실해야 됩니다. 또한,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 계시입니다. 우리는 '사랑' 할 때 여기 좀 문제가 있어요. 아이들도 크면서 보니까 가끔 속상할 때 그래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사랑을 의심해요. 그러나 부모님으로서는 이것 참 깜짝 놀랄 일입니다. "안 사랑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 당연하고 얼마나 사랑하고 정말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데 이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거예요. 왜요? 사랑의 방법이 다르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할 때, '아! 하나님의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건강해야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사업도 잘 돼야지. 그리고 세상에서도 명예도 얻고 잘 살아야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이냐 이거야, 한평생.'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그거 맘에 안 들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마음에 들어야 되는 거예요. "독생자를 주셨다" 그것으로 충분해야 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 속에 엄청난 사랑의 계시가 있으니까요. 그것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의 감격함.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에요. 또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어둡지만 십자가를 쳐다보면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생의 길이 환하게 관조됩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신학적 정리를 해줍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는 언제나 이것을 말해줍니다. 저는 그 이론을 매우 좋아합니다. Double image of the cross.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저만큼 죄인이라는 것이죠.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살아서는 안 되는 죄인이요.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아요. 단 한마디 의견도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 없어요. 왜?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죠. 내 죄가 이만큼 많다는 거예요. 무슨 할말이 있어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도 그저 할 말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다'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서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거냐.' 그만한 소중한 존재예요. 나의 존재는 나의 인물도 아니요 나의 능력도 나의 지능도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가 계시되어 있는 것이요.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벌써 죽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Daily Die.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새롭게 죽음을 확인해요. 마틴 루터는 이것을 받아서 좀더 깊은 말씀을 합니다. Daily Baptism 이라고 합니다. 매일 세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율법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매일 같이, 날마다 새롭게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이겨보려고 했습니까? 가끔은 그런 말하데요. "마음을 비우세요." 비운다는 말을 쓰기도 하고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을 본 일이 없어요. 마음을 비웠다고 큰소리 빵빵 치지만은 남보고 비우라고 하지 자기는 안 비우더라고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이기는 일이 나로 가능하냐는 얘기지요.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내가 확인하는 것이올시다. 바로 며칠 전에 제가 저 평양에 갔다가 고향을 좀 방문하는데 차를 타고 사리원을 거쳐서 재령 거쳐서 신천을 쭉 가는데, 제가 신천을 지나갈 때 옛날에 제가 신천 가서 다른 일로 간 일은 없고, 김익두 목사님을 만나러 갔었어요.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것, 연로하신 분이 설교하시는 것, 성경공부 가르치시는 것을 제가 들은 것이죠. 너무너무 제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분은 언제나 설교나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자기가 경험한 거 자기 젊었을 때 경험한 이야기를 자꾸 하십니다. 그게 생생한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그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믿기 전에는 신천 장의 유명한 깡패입니다. 아주 소문난 깡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이제 전도사가 되어서 아직 목사가 되기 전에 너무 불같이 열심히 끓어올라서 매일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얼마 전까지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이러고 다녔단 말이에요.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죽었나 살았나 한번 시험을 해보자.' 문 앞에 와서 "예수를 믿으세요" 하는 걸 설거지물을 갖다가 얼굴에다 확 뿌려버렸어요. "죽었나 살았나 보자"했더니 김익두 전도사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죽었으니 네가 살았쟎느냐" 했답니다. 그렇지요?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에 옛날 사람이라면 이게 살아남아요, 오늘이 장례식 날이지. 안 그렇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어요.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상관이 없어요. 나는 벌써 죽었어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특별히 오늘 본문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여러분,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율법 앞에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완전히 지킬 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 것입니다만은 그건 이론이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누가 율법 앞에 의인이 있습니까? 작으나 크나 죄인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 자유할 수 있는 심령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벌을 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든 대신 받든 벌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 내가 죽어야 됩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이라도 감옥 안에서 죽으면 그 시체는 감옥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자를 정죄합니다. 죽은 자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죽어질 때, 여러분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질 때, 내 영혼이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십자가가 나 자신을 죽여버립니다. 쳐다볼 때 나는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자유, 그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입니다. A. W. 토저 라고 하는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한 방향만 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보아요.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아요. 두 번째는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는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고 피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과거는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만을 중심해서 생각합니다. 십자가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한평생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일 뿐이지 내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람에게는 아무 의도 공로도 없습니다. 캐나다의 마크 피셔라고 하는 분이 "골퍼와 백만장자"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을 썼는데요 그 책 속에도 재미있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운동으로나 사업으로나 혹은 공부로나 성공하는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확실한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정입니다. 정열적으로 삽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죠. 열심히. 그게 아주 필요해요. 두번째는 집중입니다. Concentration. 요새 보니까 박세리도 그러데요. 성공의 비결이 뭐냐고요? Concentraion. 그 젊은 나이에 애인을 만나고 싶기도 하고 댄스홀에 가고 싶기도 하고 뭐 또 현장에 서서도 '남이 잘하나 못하나 남들이 뭐라고 하나' 막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Concentration. 심지어는 내가 지금 몇 점을 맞고 있느냐, 몇 점을 지고 있느냐 그것도 잊어버려야 됩니다. Concentration, 십자가에다가 집중적으로 주의를 집중하게 될 때 이제 그 안에서 모든 해답이 나옵니다. 갈라디아 5장 2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과 욕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으니 나는 욕심이 없어요. 나는 정도 없어요. 바로 그 마음, 그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합니다. 자기 의미를 발견합니다. 자기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게 그리스도 인입니다. 한국전쟁 때 있었던 이야기는 너무나 귀중한 이야기입니다. 지뢰가 터지면서 이 군인이, 저도 그런 걸 많이 보았습니다만, 몸이 공중으로 올랐다가 떨어졌어요. 아무 데도 다친 데는 없는데 이 두 눈알이 빠져나갔어요. 의사가 수술을 하게 될 때 "봉합수술을 하지만은 수술은 하나 자네는 안구가 없어서 장님이 될 수밖에 없겠네." 이 청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장님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고 나를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말합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붕대를 감아 놓았는데 며칠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분명히 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자기 눈을 빼준, 제공해 준 분이 계셔서 눈 하나는 볼 수 있게 됐네." 그랬더니 "애꾸눈으로 살면 뭘하나요" 이러더랍니다. 아니라고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앞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좀더 환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자기 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 눈 하나가 없습니다. 그때 그는 그 앞에 꿇어 엎드리고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저는 온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하게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여러분,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고야 이 청년이 자기 삶의 가치를 재발견 한 것이올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골로새 3장 1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라. 위를 보라. 오직 위를 보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느니라. 그 속에 내 생명이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랬어요.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사랑으로 살아갈 때 무한한 자유를, 용기와 능력을 충만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 임의로 살려고 애쓰고 어느새 자신을 의지한 나머지 실패 투성이요, 허물과 그리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많은 잘못들을 범하며 삽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힌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이제 새로워지고 이제 자유함을 얻고 이제 온전한 충만한 그런 생의 의미를 살아갈 수 있게 큰 은총을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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