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
2001-12-13 16:31:03



(사 6:1∼8) 설교자 : 임영수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아가 죽던 해인 주전 742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다왕 웃시아는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예루살렘 방벽을 견고히 하고, 군대를 재조직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통하는 무역 통로를 안전하게 개설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웃시아 통치기간 중 유다 백성은 다른 어느 때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컸습니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이사야도 웃시아 왕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가 바로 유다를 다시 세우고 남왕국과 북왕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유다 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기대와 함께 그의 희망의 미래를 설계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기대는 이사야 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다 백성 모두가 웃시아에 대해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웃시아가 죽자 유다백성은 깊은 좌절과 슬픔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에게도 웃시아의 죽음은 깊은 좌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웃시아의 죽음은 이사야의 미래를 송두리채 앗아갔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아왕이 죽던 해에 어느날 깊은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사야가 찾은 성전은 그 전에 그가 드나들던 바로 그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안과 밖은 그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별로 특별한 기대를 갖지 않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이사야 앞에 전개된 성전 분위기는 그전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사야 앞에는 매우 신비스러운 광경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이 주님의 주위를 돌면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고 찬양했습니다.


우렁차게 부르는 그들의 노래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 광경을 본 이사야는 너무 놀라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뵙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그 때에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부집게로 집은, 타고있는 숯을 손에 들고 이사야에게로 다가와서 그의 입에 대며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다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때에 이사야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사야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는 먼저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이사야는 사회현실 때문이 아니고 자신에 대해서 깊이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를 깨끗케 하시고, 그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깨끗케 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드리게 했습니다.

이사야가 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사야 한 사람이 아닌 전체 유다백성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브르심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 백성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은 결코 쉽고, 평안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게는 그 길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야할 분명한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와 백성의 미래는 웃시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한 인간이 그의 시대에서 사회적 여건에 맞추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가다가 권력의 몰락과 함께 깊은 좌절에 빠져 버리는 장면과, 그리고 다시 현실을 넘어선 거룩한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겸허하게 응답하여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 6장은 문장형식으로 볼 때 이사야가 자신의 체험을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이러한 회고록에서 인간은 자기 시대의 상황을 초월할 수 없지만,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희망, 목적, 의미는 현실을 초월해서 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받은 것은 물론 그가 살던 시대 상황 때문이지만, 그를 예언자로 살 수 있도록 불러세운 힘은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신이 그 시대에 예언자로 살아갈 모든 삶의 근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웃시아가 통치하던 시대에서 이사야는 왕의 통치하에서 어떻게 그의 삶을 성공적으로 잘 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 그의 주된 생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는 단지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춤니다. 그래서 본문을 읽는 사람은 이사야 처럼 예언자로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형태는 거의 모방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웃시아가 살아서 정치를 잘하건, 그가 죽었건 간에 그 시대에 태어난 이사야에게는 그가 살아가야 할 그만의 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방이 아니라 유일한것, 창조적인것인데 그러한 삶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의 관련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에게 소중한 것은 그가 예언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자신의 삶을 발견했다는데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하나님과 관계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할 수 있는 복종의 길을 찾았습니다. 이사야는 그 길을 웃시아가 죽던 해에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이사야에게 예언자의 길은 그의 소명, 의무, 의미 이전에 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전 존재를 일치시켜갈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체험과 비슷한 체험 중 하나로 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슐드(Dag Hammrskjold)의 체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인 1961년 어느날 누가, 무엇을 그에게 묻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고, 그 답변을 생각해 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 "예,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복종의 답변 후, 함마슐드는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나는 나의 실존이 의미로 가득차 있었으며, 나의 삶 역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복종 속에서 이루어진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한 개인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고, 전체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던 사람은 이사야 뿐이었습니다.


스위스 쮜리히 퀴스나하트(Kusnacht)에 있는 융의 저택 현관 문 위에 "우리가 불러 보았든지, 안 불러 보았든지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들었든지 안들었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느 시대에서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심을 듣는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거의가 다 자신의 의미와 취향에 따라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 바쁩니다.


어떤 농부가 그의 선조들로부터 방대한 농지를 물려 받아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농부로 농사짓는 일은 그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가기 위한 수단도 되지만, 그것은 그의 취미며 기쁨이었을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대지를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저녁무렵 그는 밭에 나아가 밭 한쪽 모서리 언덕에 앉아, 서쪽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는 해와 그 붉은 햇살에 물든 대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어느 때보다 그 대지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때 그에게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해 갈꼬?" 그때 그는 그 음성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응답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전과는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의 현실의 삶을 그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긍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전과는 다른 농부로 되어가면서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둬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길을 성전에서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종교의 참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복종케하는데 있습니다. 종교의 의미와 목적은 부정적인 무거운 짐을 지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구나 정직해져가는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종교의 목적은 핑계와 한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울분을 "카타르시스"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직해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하는데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누가 더 인기있고, 명성이 있는 자리에 올라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살아가기 매우 어렵고 힘든 시기입니다. 희망이 없고, 원칙, 질서가 없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벤처에도 손을 대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해서 성공한 것을 모방해 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심각한 문제는 인간의 삶이 모두 정치적 동기로 이루어 집니다. 남북한 문제, 환경의 문제, 사회질서, 경제, 교육, 의학, 문화, 종교 제반의 중요한 삶의 문제들이 진실된 동기 없이 정치논리로 다루어지고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더욱더 힘들어져 갑니다. 살기 싫은 사회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권력과 특별히 연류되어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이미 많은 부를 축적해서 돈 쓰는 재미를 누리고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이 땅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이 현실에 몸담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사실 정치지도자가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은 그 시대의 현실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게 해야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 반대이면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민을 가든, 여기서 살든, 우리에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문제 해결없이는 어디를 가든 방황, 무의미, 갈등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진국으로 이민을 가면 우리 사회에서 느끼는 만큼의 사회적인 불쾌감은 줄어들것입니다. 그러나 불쾌감만 줄어든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우리가 왜 주일을 소중히 여깁니까?


우리의 현실의 삶을 지탱해주고 유지시켜주는 힘은 과학, 물질, 권력, 성,이상의 것입니다. 그 힘은 희망, 목적, 의미인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는 자신의 삶과 현실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긍정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참여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지혜"


지혜

단지 명석함이나 해박한 상식이나

능란한 처세술이 아닌

지혜를 원합니다.


지혜

당신으로부터 오는 지혜

첫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을 첫 자리에 놓는

참으로 지닐 만한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는

참으로 가치있는 것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나날이 겪어야 하는 사소한 일들에 매이지 않고

저 너머를 응시하는

분별있는 정신과 진솔한 마음.


제 정신의 범위와

제 마음의 끝없는 지평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저를 지으셨기에

은연중에

제가 찾고 있는 분은 당신

저를 가르치고 이끌 수 있는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빛으로

제 정신과 마음을 밝혀 주십시오

바르게 보고

현명하게 판단하며

분별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오만함과 완고한 마음을 지니지 않게 해 주시고

감추어진 위험으로부터

음모를 꾸미는 적으로부터

저 자신의 미망으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


진리에 눈뜨게 해 주십시오.

충고를 쾌히 받아들이며

잘못을 고쳐나갈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주십시오


저 자신의 열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아첨이나 거짓에 놀아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바로 여기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의 무한한 지혜가 저를 휘감아

지혜와 굳셈을 지닌 자 되게 해 주십시오.


제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제가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


蝡조 만나스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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