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2001-12-13 19:57:00

2001년 1월 14일

막 2:18-22





새 천년이 지나 2001년 새해가 밝아왔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출발을 시작한 지 두 주간이 지났습니다. 전혀 알 수 없는 미래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여러 분야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예상이 됩니다만 그 중에서도 전통적인 질서와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여러 가지 정신적 도덕적 혼란도 예상됩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는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도전과 문제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례요한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질문에도 여러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몰라서 알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고, 둘째는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던지는 경우도 있고, 셋째는 상대방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뜨리려고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질문도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성격이 다분히 많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금식하지 않지만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하지 말라 해도 금식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지 낡은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복음 속에 담긴 능력, 비밀, 신비, 기쁨, 사랑, 평화, 풍성한 삶, 자유와 구원




이 비유는 단순하면서도 참으로 신선한 영적 충격을 주는 비유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새 포도주는 무엇을 말하며 새 부대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새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쳐 주시고 설교하신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 복음 속에 담긴 능력, 비밀, 신비, 기쁨, 사랑, 평화, 풍성한 삶, 자유와 구원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구원의 능력(the power of salvation)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첫 기적을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잔칫집 같은 기쁨이 충만한 삶이요,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변하는 삶이며,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맛이 있고 더 좋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란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의 일을 하였습니다. 별로 공부도 못하고 인물도 특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책 한 권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고 영적 자극과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고민하게 하고 전통적인 가르침과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케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 자유함을,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원이 건강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위해 있듯이 나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왔노라 하셨으며,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더럽고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주님은 "내가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염려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차원이 다른 참신하고 능력 있으며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낡은 전통에 젖어있는 바리새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벅찬 말씀이었습니다. 북한 말로 접수하기에는 좀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은 그들과 충돌하게 되셨고 그것이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새 술과 같은 복음을 수용하기 위해 새 부대를 마련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낡은 부대는 새 술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어 거기다가 새 술을 넣으면 부대가 터져 새 술도 못쓰게 되고 부대도 망가뜨립니다.




낡은 부대처럼 자기 고정관념과 편견에 꽉 사로잡힌 사람은 신앙생활도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위선적인 삶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생명과 능력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시도, 새로운 생각(idea), 새로운 자세로 진리를 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창의적인 삶이 고갈됩니다.




칼릴 지브란이 쓴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책에서는 그 시대 사람들 77명이 예수를 그리고 있는데 그들 77인 중에는 예수의 대적도 있고 친구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제사장, 창녀, 세리, 시인 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공통점은 교리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예수, 석고화 된 예수가 아니고 피가 돌고 눈물이 있는 살아 있는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77인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세 번 만납니다. 그 중에서 첫 번으로 예수를 만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분을 처음으로 본 것은 유월이었다. 그는 밀밭 가운데를 걸어가고 계셨는데 그 때 마침 나는 내 심부름하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분의 발걸음의 리듬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달랐고, 그분의 몸의 움직임은 내가 전에 보았던 어떤 모습과도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모양으로 땅을 걷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분이 빨리 걸었는지 천천히 걸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분을 다시 본 것은 팔월인데 내 창문에서 내다본 것이었다. 그분의 몸은 혼자인데 각 부분이 서로 모든 다른 부분을 사랑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향을 뿌린 내 옷을 입고, 로마 장교가 주었던 금신을 신고 그분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분에게로 다가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그분도 "미리암 안녕"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보셨다. 그분의 밤 눈은 어떤 사람이 본 것과도 다르게 나를 보셨다. 나는 갑자기 온통 벗은 몸인 것 같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분은 다만 "안녕" 했을 뿐이다. 나는 그분에게 "우리 집에 아니 가시렵니까?" 했다. 그러니까 그분은 대답하기를 "내가 벌써 너의 집에 가지 않았어?" 했다. 나는 그 때 그분이 무엇을 뜻하시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술을 드시고 진지를 잡수시지 않으렵니까?" 그러니까 그분은 "그래, 미리암.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그분은 그러셨지. 그런데 그 두 낱말 속에 바다의 음성, 바람과 나무의 음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그 말을 내게 해주셨을 때, 그것은 생명이 죽음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왜냐고요, 여러분들 알아들으십시오, 나는 죽었다. 나는 자기의 혼과 서로 이혼을 한 여자였다. 나는 지금 당신들이 보는 이 자아와는 떨어져 살고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의 것이었지만 또 누구의 것도 못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창녀, 일곱 귀신 들린 여자라 불렀다. 나는 저주를 받은 몸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새벽 눈이 내 눈을 들여다보아 주셨을 때 내 마음의 모든 별들이 빛이 멀어져 버리고 나는 미리암, 단순한 미리암이 되어버렸다. 자기가 전에 알았던 땅에서는 잊혀져 버리고 새로운 자리에서 자기를 발견한 여자가 되었다.




그 다음 그분은 나를 들여다보셨다. 그분의 눈의 대낮의 빛이 내 위에 쏟아졌다. 그는 말씀하기를 "너는 많은 애인을 가졌지,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만이다. 다른 사람들은 너를 가까이 하는 가운데 제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은 네 속에 자기네 목숨보다 더 맥없이 사라져 버릴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보지만 나는 네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네 인생의 가을이 와도 거울 속에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겁내지도 않고 침범 당하는 일도 없는 아름다움을 본다. 나만이 네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날에 그분의 눈의 지는 햇빛이 내 속에 있던 용을 죽여버렸고, 나는 한 사람의 여자가 되었다. 나는 미리암, 밋첼의 미리암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새해를 맞이하여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어떤 원칙과 종교적 경건의 규례들을 지켜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또 다시 낡은 껍질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안주해 버리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 버리면 그래도 다행인데, 그렇게 될 때 새 것을 새 것으로 보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새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새 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것을 말할 때, 종류가 같은 것이라도 그 전에 사용하지 않던 것, 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것을 새 것이라 합니다. 사람을 말할 때도 한 번도 보지도, 만나지도 상대하지도 않은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새댁, 새 아기, 새 언니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성서적 관점에서 말하는 새 것, 새 사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의미하는 새 것


성서에서 의미하는 새 것은 생명, 사랑, 치유, 회개, 창조입니다. 지브란의 책에 나오는 77인의 예수 만난 이야기는 비록 추리와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새 것을 왜곡시키지 않고 새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 새 것을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보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이 새 것을 새 것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가리워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새 것을 볼 수 없는 가리워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것이 종교적 편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편견은 자기 의라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에서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것이 다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그는 비록 그 시대 버림받은 여자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종교적 편견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순수함이 새 것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습니다. 마리아는 뭇 남성들에게 매력있는 여성으로 보여지기 위해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 언제나 민감했습니다. 주름살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그의 좌절도 컸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그의 인생의 가을이 와도 거울 속에 자신을 드려다 보기를 겁내지도 않고 침범 당하는 일도 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예수의 사랑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새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 후로는 거짓으로 꾸며 가는 아름다움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삶의 변화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엄격한 종교 형식과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지만 실제 있어야 할 새로운 삶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것은 그들이 새 것을 새 것으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것은 모두 정죄, 갈등, 적대감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삶의 문제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들을 지켜 가는 것으로 그들은 스스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를 사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사랑, 자유, 성취, 충만은 그들의 종교의 경건의 틀을 파괴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거나,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의라는 축을 중심으로 해서 이해하고 받아드리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금식 논쟁에서 복음서 기자 마가는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 종교를 믿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지켜오던 종교적 규례 가운데 금식은 매우 중요한 경건의 관습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에서 엄격하게 시행해 오던 금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 기간에 시행해 오던 금식 그리고 평상시 주간에 두 번(월, 목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이 있었습니다.




금식의 목적과 의미와 효력




금식의 목적과 의미, 효력은 음식을 먹지 않는데 있지 않습니다. 금식을 하므로 마음의 묵은 밭을 갈아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므로 충만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낡은 껍질을 깨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금식에서 나타나는 효력, 의미가 예수에게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세 가지 비유로 그들이 새 것을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는 혼인집 비유며, 다른 하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 그리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의미는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낡은 자아에 고정되어 있거나, 정착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낡은 것, 버려야 할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고정관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새로운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때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이 됩니다. 죽은 것의 특징은 신축성이 없고, 부드러움이 없습니다. 뻣뻣하고 딱딱합니다. 생명력이 없는 것은 신축성이 없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의 피부의 부드러움과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깨끗한 심령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 떠난 사람이나 피조물은 모두 부드럽지 못하고 뻣뻣합니다. 굳어있는 교만한 마음은 융통성이 없고 새로운 변화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삶, 새 역사는 진리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사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의미, 새로운 목적, 새로운 가치입니다. 이 새 것을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서 그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기독교가 이 땅 위에서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라는 문제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새 해를 맞이하여 우리의 희망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에 묶어두어서도 안되며, 교리의 틀 속에 가두어 두어서도 안됩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낡은 종교적 형식의 틀 속에 가두어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거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낡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통념 되고 있는 것들로 지역주의, 학벌주의, 뇌물이면 다 된다는 엉터리 신조, 돈, 권력, 출세를 생의 제일 목표로 삼는 인생관, 자연환경의 그 아름다움과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값진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탐욕 등입니다.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갖는 편견입니다. 종교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야하는데 오히려 더욱더 편견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무서운 것은 독선, 절대주의, 편파성, 자신의 경건을 절대시하는 아집 등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할 때 그 예수는 어디까지나 자기교파, 자기교회, 자기 자신만을 수호해주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예수는 자기 그룹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그룹 이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예수가 되어버립니다.




종교적인 경건의 형식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에게 맞는 예수는 요즈음 어린 십대들에게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는 예수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예수는 항상 그들과 같은 사람들만을 옹호해주고 감싸주며 합리화시켜 주는 분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경멸하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예수는 그러한 형식적인 경건에 묶여있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예수, 세리, 창녀, 죄인들에 대해서는 경멸과 증오를 퍼붓는 예수가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예수는 우리의 낡은 사고의 틀 속에 안주하는 예수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아들 예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 것을 낡은 도식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 것의 의미는 없습니다. 새 것은 새 것으로 바라보며 그 새 것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가 낡은 시대의 틀 속에 묶여 반목과 질시로 밤을 지새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고통하시며 세미한 음성으로 하시는 말씀은 사랑과 생명의 세계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는 사랑이며, 생명이요, 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의 참여




사랑하는 영암교회 공동체 성도 여러분! 우리 영암교회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에 참여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지적 수준이나, 경제적 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능성은 이 공동체는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려고 하거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것과 같은 낡은 것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적인 가능성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새 해에 새 시대의 역사의 도상에서 걷고 계시는 살아 계신 예수를 증거해 갈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우리교회 15명의 소중한 선택받은 사람들이 영성훈련에 참여하고 돌아와 새로운 인생의 터전에서, 새로운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가정 공동체에서, 새로운 교회의 공동체에서 섬김의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




IMF 체제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일어났던 한 일화가 있습니다. 돈리라는 사람이 추운 겨울 직업을 잃고 죽기보다도 싫은 구걸에 나서야 했습니다. 어느 고급 식당 앞에 서서 한 쌍의 부부에게 동정을 합니다. "미안하오. 잔돈이 업소." 남자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때 부인은 남편이 퉁명스럽게 거절한 것을 알고는 "여기 1달러가 있습니다. 음식을 사 잡수시고 용기를 잃지 마세요. 직업을 찾도록 기도할께요."하고 말했습니다. 돈리는 너무나 고마워 "고맙습니다 부인, 부인은 나에게 출발과 새 희망을 주셨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은 "당신은 예수님의 떡을 먹을 겁니다. 이 떡을 다른 이에게도 주도록 노력하세요."라고 다정히 말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달러를 받은 돈리가 50전을 남기고 50전으로 요기를 하고 있을 때 바로 앞에서는 한 노인이 자기를 한없이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나머지 50전을 꺼내 그 노인에게 빵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조금 떼어먹던 빵을 종이에 싸고 있었습니다. "내일 먹으려고 싸가세요?" 돈리가 물었습니다. "아니, 저 길가에 꼬마 신문팔이가 있는데 그놈에게 나눠주려고."




두 사람은 빵조각을 가지고 아이에게 갔습니다. 아이가 미친 듯 빵을 먹는데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머지 빵조각을 개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신문을 팔러 뛰어가서 노인도 일감을 찾으러 뛰어갔습니다. "나도 이렇게 있을 순 없지." 돈리는 길 잃은 개의 목에서 주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주인은 너무 고마워 10달러를 주면서 "당신 같은 사람을 내 사무실에 고용하고 싶소. 내일 나를 찾아오시오." 돈리는 비로소 그 작은 빵 속에 임재하는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축제와 같은 삶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재현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미 받은 바 은혜와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 때 우리는 금 년 한 해 축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새 해를 이미 희망과 함께 새롭게 시작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와 계시는 주님과 함께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성패는 예수를 누구로 고백하고 따르느냐에 있습니다. 새 해의 기독교의 전망도 여기에 있습니다. 새 해에 새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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