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원하시는 두 기둥
2001-12-13 21:08:31

2001년 11월 4일
왕상 7:13-22





10년을 기다려주신 주님!




우리 교회에는 많은 청년들이 있지만 주로 이른 시간인 1부 예배에 참석하고 또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하는데, 요즘은 새벽기도회에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경건한 한 청년이 있는데 그 청년이 며칠 전에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살아 계시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주님의 선하고 놀라우신 계획을 모든 분들께 소개하고 싶어서 이렇게 게시판에 글을 올립니다. 올해 70세이신 저희 어머니께서 드디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모두 축하해주십시오.(너무 기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12년 전 선친께서 59세의 나이로 몹쓸 병을 얻어 세상을 먼저 떠나신 후 작은 형은 어머니를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불쌍하게 돌아가신 선친의 제사를 살아 생전에는 모셔야 한다며, 예수님 영접을 자꾸만 미루시다가 언젠가 작은 형의 성화에 못 이겨 "내 나이 70(칠십)이 되면 교회에 나가마"라고 말씀하시고 살아오셨습니다.(저희 형제들의 본격적인 중보 기도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는 서두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모든 계획은 주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처럼...




작년, 저희 고향집 바로 앞집에 생면부지인 노 목사님 부부가 성남에서 내려오셔서 주님께서 계획하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갑자기 70 이신 어머니께 자궁질환이 생겨 수술을 급하게 받아야한다는 진단이 있어 성남의 작은 형 집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작은 형 집에 머물면서 주일에는 마지못해 교회를 같이 가야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급하면 하나님을 찾는다는 진실을 어머니를 통해서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10년 전 어머니께서 "내 나이 70 이 되면 교회에 나가마" 라는 말을 기억하시고 놀라우신 10년 계획을 이루어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놀랍고 무한하신 능력으로 급하다던 어머니 수술도 받지 않게 하시고 건강 회복시키셨으며, 지난 주(10월28일) 드디어 집 앞에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스스로 무릎꿇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놀라우신 능력의 주님을 찬송합니다! 우리가 마지못해 주님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진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10년도 기다려 주십니다. 아니 그 이상도 기다려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주위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분들은 오직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만을 믿고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들의 기도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죄 많고 허물 많은 저희들 모두가 선하고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주님의 강한 군사이기를 소망합니다. 10년을 기다려주신 주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주님께 감사 찬송 드리며 "




이와 같이 한 생명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11월9일) 우리교회는 2001 새생명 잔치를 가지게 됩니다. 이 잔치에 많은 잃은 양들이 함께 참여하는 생명의 잔치가 될 수 있도록 열린 구역예배에 참석했던 분들을 포함하여 많은 새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모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의 완성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 부분입니다. 두 기둥은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인 놋 점장이 히람이 만들었고 그가 이 두 기둥의 이름을 지었는데, 우편(남쪽 편)의 기둥을 야긴으로, 좌편(북쪽 편)의 기둥을 보아스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 기둥을 성전 입구 제일 앞 현관 부분에 설치했습니다.




성전 앞에 든든히 서 있는 이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생각해볼 때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기둥 역할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야긴과 보아스와 같은 성전 기둥이 되려면 어떤 기둥이 되어야 할까요? 주님께서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해 원하시는 기둥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반듯한 기둥




기둥은 반듯해야 기둥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구부러져 있거나, 비뚤어져 있으면 건물을 받칠 수 없습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반듯해야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반듯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며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연약한 인간의 모습 때문에 실망스러운 일을 틀림없이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반듯하기만 하면 그 실망이 적게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생각함으로 꾸준히 기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위축된 모습, 안달하는 모습, 복에 너무 연연하는 모습은 없어야 하고, 전도할 때나 심방할 때에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서는 허리를 굽히지만 개인의 삶의 모습에서는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끔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들을 보면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총동원 주일 날짜에 맞추어 많은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서 "한번만 교회에 나와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사정해서 그 날에 데려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마치 교회에 나오면서 은혜를 베푸는 생각으로 나옵니다. 그처럼 마음이 높아진 상태에서는 절대로 은혜 받고 거듭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높여 버리면 교회에 나와도 변화 받기 힘들지만 그러나 사랑하고 섬기면서 감동을 준 다음에 교회로 이끌면 교회에 나와서도 은혜를 받기가 쉬워집니다. 내가 다니고 섬기는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끌어야지 그렇지 않고 "우리 교회가 작은 교회인데 당신이 도와주세요"라고 하면서 싫은 사람을 억지로 이끌어 오게 하면 마음이 높아져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흔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방법으로 한 사람을 이끌어 사정해서 높은 마음으로 오게 하면 당장 눈앞에서는 한 사람을 얻어 교회에 보탬이 되는 것 같지만 2-3년 후에는 더 큰 후유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억지로 이끌면 사람의 마음이 높아질 수 있고 마음이 높아지면 은혜도 못 받고 그것은 결국 모두에게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은혜가 되어서 은혜를 받으러 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없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오면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교회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면서 자기의 높아진 마음을 낮출 생각은 하지 않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본인에게도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허리를 굽히는 일은 있어도 애걸복걸하고 사정하고 쩔쩔매는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섬기는 모습으로는 허리를 굽힐 수는 있어도 쩔쩔매는 모습으로는 허리를 굽히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와 원리를 가지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당한 모습에 신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당당하게 살면서도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허리를 굽히는 일은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없는 당당함은 잘못된 배짱을 낳을 수 있고, 당돌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기둥은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는 반듯한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기둥




기둥은 건물을 떠받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장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그 건물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기둥에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높은 위치를 생각하기보다 맞는 위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 그런 자세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자세이며 합당한 자세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자세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세 중에서 이 자세를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봉사의 자리, 헌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배하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자리를 잘 지키는 원리를 듣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죄는 바로 하나님의 설정해 주신 자리를 이탈한 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위치를 벗어날 때 제일 먼저 고장나는 부분이 귀입니다. 그때는 좋은 소리도 나쁘게 들리고, 어떠한 얘기도 순수하게 안 들립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기의 자리를 이탈하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 사람 때문에 전체 무리의 발걸음이 멈추어지게 되고 힘들어지게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이탈하게 되고 새로운 자리를 찾게 됩니다. 물론 옛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로 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모두 많은 교훈을 배우고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과 상처 속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지혜롭게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짐을 같이 지는 기둥




기둥은 건물의 무거운 짐을 떠받치는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기둥은 대접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짐을 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직분은 원하지만 짐을 싫어하면 결코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영광과 존경은 책임과 의무를 다한 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달라는 자세로 기둥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섬기는 자세로 기둥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섬길 거리, 일거리를 적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적절한 일거리를 발굴해야 하고, 성도는 봉사에 힘써야 합니다. 그 결과로 훌륭한 지도자는 교회 내의 실직자를 없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훌륭한 기둥은 명예만 가진 교회 내의 실직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말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자꾸 드리고 싶고 바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결국 그런 분들이 교회를 받치는 기둥이 됩니다.




또한 기둥은 교회의 제일 앞에서 짐을 질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가 성전의 제일 앞의 현관 부분에 세워진 것처럼 교회의 기둥은 제일 앞에 서서 어려움도 맞이할 줄 알아야 하고, 그리고 미리 와서 교회에 오는 분을 맞이하는 자세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기둥일수록 부지런하고 인사성이 밝고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대개 자기만 알아달라고,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바로 그때 시선의 초점을 남에게 돌리고 섬기는 짐을 질 줄 아는 사람은 믿음의 훈련이 잘된 분들이고 정말 교회의 기둥이 될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공동체 원리를 아는 기둥




기둥 하나로 건물을 받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기둥도 혼자서 건물의 기둥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영성이 좋다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큰 역할을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나의 영성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영성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은혜, 나의 기분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은혜, 기분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균형의 원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인도하는 리더십의 원리를 모르면 공동체가 고생을 합니다. 혼자만의 영성보다 공동체의 영성이 더욱 소중한 줄 알고, 공동체의 목표와 방향과 비전과 흐름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영성의 원리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혼자의 영성에 심취하면 그것은 <영적 깊이>의 증거가 아니고 <영적 게으름>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영성을 생각하면서 성공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사려 깊은 자세로 남의 입장도 생각하고 관심도 많이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공동체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순간에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자세입니다. 가끔 살다보면 환경과 여건이 힘들어 짐을 지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짐을 지는 모습이 공동체 원리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힘들다고 연약하고 병든 모습을 보이면 주위의 일시적인 위로는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편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병든 사람은 더 상처받을 환경에 많이 처하게 됩니다. 힘들어도 그 여건에서 같이 짐을 지는 자세가 있어야 위축되지 않게 되고 그러한 자세를 통해서 결국 교회의 기둥이 되는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는 기둥




사실상 기둥은 그 건물과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기둥은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보호하려고 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일이라면 모든 일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최대한의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서는 안됩니다. 그처럼 책임을 지는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고 온전한 기둥이 됩니다. 우리교회는 다음주일 교회 창립 47주년을 맞이하면서 장로님 10분을 포함하여 75명의 항존직분자들을 임직하려고 합니다. 이분들이 모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목숨을 걸고 지키며 보호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최대한의 책임을 질 수 있는 든든한 기둥,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암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우리교회에서 모두 아름다운 기둥의 역할을 감당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둥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뜨거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하신 구속의 사랑을 뜨거운 감격과 감사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결국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만찬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성찬을 받아먹고 마실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새롭게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희생의 주님의 몸에 내가 연합하는 신비의 체험입니다.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이제는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하게 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집니다. 성만찬 때의 교제는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됨을 말해주며, 그런 효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지체임을 계속적으로 다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만찬 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들과 자매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간의 화해와 참여를 요청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심을 축하하고 확신하는 축제입니다(고전11:26,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열어주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입니다. 한스 큉(Hans Küng)이란 신학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에서 성만찬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요,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야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말한 것입니다. 성만찬은 이 땅의 마지막 날에 기쁨과 영광 중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나눌 하나님나라의 식사의 표징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받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다시 살아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쳐 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주님의 인격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이 거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의 분신으로 항상 승리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admin

�댁쟾�쇰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