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2001-12-24 20:36:01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그렇게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한 다음에 오늘 2절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다시 한 번 자기가 사슴이 목말라 함과 같이 그렇게 찾고 갈급해 하는 그 하나님이 누구이며 자기가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찾는지를 다시 한 번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이 내 "영혼이" 갈망한다라고 말한 이 사실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의 갈망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그것을 자기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기의 온 몸으로 깊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인들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망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변화가 온 것에 대해서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내 얼굴이 수척해졌다든가 아니면 내 눈의 기력이 쇠하여졌다든지 등등의 표현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 시인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였는데 그 영혼이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을 시인 저신은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원리, 이러한 생각들을 온전히 붙잡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하는지 모릅니다. 내 영혼이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져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땅으로 추방되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지만 우리는 그러한 반란을 당하고 강제로 추방되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소를 얼마든지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뵈올 수 없는 상황이 될 때조차도 우리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생각이 이러한 영혼의 간절한 몸부림과 영혼의 간절한 사모하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육체로써 영을 억누르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참된 부르짖음이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의 참된 갈급함이 무엇인가에 우리도 귀를 기울이고 깨달아 알 수 있는 영적인 지각을 소유할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서 아주 예민해졌을 때에는 우리는 언제나 느낍니다. 성령을 따라서 예민하게 살 때에는 성령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하게 하시는지를 내 영혼이 헤아리면서 기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영혼이 가지고 있는 갈망과 영혼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 소원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지각해내고 그것으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삼고 영혼의 바램들이 우리 존재 자체의 바램이 되어서 영혼이 바라는 바처럼 추구하고 영혼이 바라는 바처럼 나아갑니다. 시인은 영혼이 생존하는 하나님을 갈망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마음과 그의 모든 육체와 그의 모든 삶이 영혼의 이 바램을 따라서 똑같이 동일하게 그런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렇게 사모했고 그렇게 부르짖었고 그렇게 갈급해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진정으로 영혼과 그 육체의 삶과 영적인 모든 삶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런 깊은 신앙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시인이 갈망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쉽게 풀어서 말하면 지금 여기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뵙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늘 높이 계셔서 인간들 마음대로 살라고 내버려 두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임재하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대사를 행하시고 열조에게 베푸셨던 그 크고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시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시인은 이전의 열조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큰 일, 어느 신도 행한 적이 없었던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역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분향할 때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일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제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뵈었을 것이고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릴 때 영광스러운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감격을 함께 가져다 주던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그러한 놀라운 예배의 현장을 성소에서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위해 현존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이 시인은 바라고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여러 곳에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온 땅을 지으시고 홀로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궁창이 그의 진실함을 선포하고 그의 영광은 온 세계에 미치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이 이와같은 신앙의 세계를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세계의 주님이시며 성소에만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유배당해서 끌려 온 요단강 건너편에서조차도 자신들을 지켜 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여전히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지킨다고 하는 신앙이 이 시인에게 없었을 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고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인의 곁에 놓여있는 모세오경이 그를 위로할 수 없었고 시인의 곁에 있는 제사장의 의복이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많은 두루마리와 그 많은 규례와 율례들이 이 시인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시인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것은 이전에 우리가 어떤 신앙의 이력을 가지고 살아왔는가 그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고 생생하게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하고 분명히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구별시켜 주시는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을 뵈옵기를 사모하고 원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틀에 가둘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살아있는 표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 중심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이 관념 속에 고요히 묶일 수 없고 당신이 그의 삶 속에 살아계심을 드러내 보여주실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숨기려고 애를 써도 불끈 불끈 튀어 나와서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애를 써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의 삶과 신앙과 기도 속에서 불끈 불끈 튀어 나오셔서 그 안에 그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 신앙의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이 아님을 보여 줌으로 양자를 구별지어 주는 것입니다. 생존하시는 그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신앙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반드시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기를 갈망하는 그런 갈망들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인은 지금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미 생존하시는 그 하나님을 시인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기 속에 신앙의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이 살아서 이렇게 영혼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주님을 갈망하는 것 그것 하나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갈망했던 것은 생존하시는 그 하나님이 내게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가시적으로 나타나셔서 주님의 임재를 보여 주실 것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며 이것을 향한 갈망은 곧 부흥을 향한 갈망입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 그것은 정말 구별된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매주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게 해 주는 그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삶은 정말 다를 것입니다. 이러한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이 시인은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갈망했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오늘 이렇게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라고 말하면서 시인은 스스로 한탄하기를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말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정해진 곳 이외에서 드려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땅은 악한 자들에게 빼앗겨서 자신들은 그 땅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시인으로 하여금 더 비통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들이 그 이방의 땅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루종일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너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간다마는 그 하나님이 정말 계시냐 묻고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은 정말로 묻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을 리가 있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찾는 너는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인생이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서 불신앙의 세상을 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그런 미친 사람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냉소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의 태도가 아무리 진지하고 아무리 열성적일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이 시간에도 존재하여 이 세계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믿지 않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시인에게 반문했던 불신하는 세상은 지금도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과연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냐 과연 그가 우리 인생의 모든 해결해 주시는 해결의 근원이 되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마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들을 향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물음 속에는 우리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는 불신앙의 세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묻고 있습니다. 시인이 받았던 질문을 우리도 똑같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시인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물었을 때에 눈물이 주야로 자기의 음식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여 드릴 수 없는 이 현실, 주님이 분명히 준재하고 이 시간에도 살아 역사하셔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이 이방의 땅도 주님의 수중에 있어서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고 허무시기도 하시고 왕권을 높이 드시기도 하고 집어 던지기도 하시는 그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이렇게 물을 때에 이 시인은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큰 슬픔에 사무쳐서 식음을 잃어버릴 정도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파리해졌을 때에 눈물이 주야로 이 시인의 볼에서 흘러내렸고 그 눈물을 삼키는 것으로 아침을 대신했고 눈물을 씹는 것으로 저녁의 끼니를 대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 속에 있었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인과 똑같은 질문을 받을 때에 우리는 마땅히 이 시인처럼 눈물이 우리의 주야의 음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이 가까워 올 때에는 이런 사람들이 어디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묻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줄 수 없는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어두운 한 구석에 얼굴을 묻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애처로운 소리는 부흥의 불을 지피는 불씨가 되었고 그들이 흘리는 그 눈물은 지펴진 불씨 위에 떨어지는 몇방울의 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춤추고 노래해야 될 때가 아니라 울며 애통하며 애곡해야 될 때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와 교회에서 보여 주지 못하는 생존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끊임없이 오만한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던지고 있는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뇨라고 묻고 있는 이 모든 오만에 찬 질문들 앞에 어찌할 수 없는 교회의 현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고 슬퍼하는 이러한 기도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응답 보십시오. 주님은 이 고라의 자손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서 한 때 승리한 것 같은 압살롬은 비참하게 죽고, 버려 두고 떠나와야 했던 그 법궤와 성막으로 영광스럽게 다시 승리하여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퇴락한 성막을 고치며 그 속에서 꺼졌던 그 제사의 불을 다시 지피며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동행하며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다시 한 번 발하시고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이 성소 속에서 경험했을 때에 이 고라의 자손은 이방의 땅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을 단번에 위로받았고 주야로 음식을 삼았던 그 흐르던 많은 눈물들을 주님이 그 예배의 현장에 다시 임재하심으로 말끔히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아픔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그리고 이방의 사람들 앞에서 주눅드는 것이 하나도 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보여줄 수 있는 자리로 하나님은 다시금 이 고라의 자손을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가 참된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의 눈에서 흐르고 있는 그 눈물을 세상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눈물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시인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그 순간마다 주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아픔으로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이 시인의 눈물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그러한 부흥의 때가 오기를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억눌림과 쇠약함과 모든 무기력과 무지로부터 해방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교회를 통해 이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자유케 하는 생명의 샘물이 폭포수와 같이 터져 나와서 고통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그 영혼의 갈급함을 해갈시켜 주고 참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그러한 부흥의 때를 사모하는 것이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다윗이 그 좋은 성소를 버려두고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이 깃든 예루살렘을 버려두고 이방의 땅으로 유배를 와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다윗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고라의 자손의 이 간절한 기도는 비록 죄로 말미암아서 왕권을 잃어버리고 거룩한 성소를 원수들에게 내어 주어서 이방의 땅으로 이렇게 망명생활에 접어 들게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잃어버렸던 왕권을 되찾고 떠났던 성소로 되돌아 가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그렇게 지금은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고 외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이방의 땅에 유배 온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소망을 가지십시오. 이렇게 이방의 땅에서 이 눈물의 기도가 주님에게는 기억된 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결국은 그가 그렇게 사모하던 대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이 특권을 다시 한 번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또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네가 정말 그러한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뇨? 되묻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질문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탄원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양심의 송사와 사단이 우리를 향하여 송사하는 그 송사 속에서 눈물로 주야로 내 음식을 삼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 성소로 이끄시고 그 잃어버린 왕권을 되찾고 그 속에서 영광스러움 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수 있는 생존하시는 그 이전에 만났던 광대한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최대의 열망은 언제나 그 백성이 임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그의 백성을 통해 친히 보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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