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셨다! 2001-12-25 20:30:35 고전15: 20∼26 오늘 부활절 예배는 예년과 같이 1부는 말씀 중심의 예배가 되겠고 2부는 찬양 중심의 예배 가 됩니다. 여러분, 1부에서 말씀으로 은혜 받고 2부 예배에서 다시 찬양으로 은혜 받으시 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중고등부가 정성껏 마련한 뮤지컬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를 꼭 보시기 바 랍니다. 부활은 설명하는 것보다 느끼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특별히 어제 집중적으로 힘쓴 일이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내 안에 고이도 록 하는 일입니다. 부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부활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성도들 이 설교를 통해 부활에 대해 들으면서 동시에 저의 음성을 통해, 표정을 통해, 태도를 통해 부활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부활은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해야 하는 일입니다. 농악판에서 농악이 절정에 이르면 듣고 보던 사람들이 농악판에 뛰어들어 함께 어울립니다. 어깨춤을 추며 "얼쑤 좋다!" 합니다. 농악이 우리의 기본적인 정서이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 게 됩니다. 외국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신기한 듯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성도들은 부활판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부활 주변에 머물러서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농악이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정서라면 부활은 성도들의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3절 뒷부분을 보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 '모든 사람들' 안에 는 나도 들어 있습니다. 이 짧은 한 절은 부활에 관한 기록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무리 놀랍고 위 대한 사건이라도 나와 관계가 없으면 나를 흥분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 말을 뒤집으면 "그리스도 밖에는 부활이 없다"가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은 개인적인 사건만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입니다. 마지막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실현시키는 종말론적인 사건임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들도 다시 살아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 이것입니다. 여러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인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부활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장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문 제 투성이의 골치 아픈 교회였습니다. 그 안에 분쟁이 있었고 윤리적인 타락이 있었고 신학 적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빈부의 격차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생긴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이런 문제들을 인편을 통해 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1절의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 는 것이라" 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에게 교회의 문제에 대해 하나 하나 묻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유권해석을 요청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듣고 또 해석을 요청 받은 문제들에 대해 하나 하나 대답해 나가다가 끝에 가 서 부활을 내놓습니다. 이 것은 부활 신앙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 신앙 위에 서면 분쟁도, 빈부간의 격차도 신학논쟁도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터진 부분에는 연고를 발라주고, 머리가 아프다니 아스피린을 주고, 배가 아프 다니 소화제를 주고, 부분적으로 치료해 나가다가 끝에 가서 만병통치약으로 부활을 내 놓 는 것입니다. 원주제일감리교회에 문창모(文昌模) 장로님이 계신데 이 분은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1931년 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서 70년을 일하다가 지난 3월 31일에 95세로 은퇴했습니다. 세계 최고령 의사로 기네스 북에도 올라 있습니다. 70년 동안 현역 의사로 일했으니까 잊지 못할 일들이 많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잊지 못할 일이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이 일이라고 합니다. 십여 년 전에 경찰관이 죄수를 한 사람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이 아프니 좀 치료해 주십시 오" 부탁했습니다. 문 장로님은 그 사람을 치료해 준 다음에 묶인 손을 꼭 잡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예수 믿고 회개하라고 간곡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 경찰관이 다시 찾아와서 "그 죄수가 밤새 소리지르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태 도가 달라졌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무슨 약을 주셨습니까?" 물었습니다. 문창모 장로님은 신약과 구약을 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죄수는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에게 신약과 구약보다 더 좋은 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부활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약과 구약이 약 가운데 제일 명약이듯, 부활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고 만병통치약이 됩 니다. 뒤에 문창모 장로님은 그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나는 지금 천당 가는 길입니다" 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성을 점령했는데 그 성에는 상자가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상자는 밧줄로 복잡하게 얽매어 있는데 누구든지 이 밧줄을 푸는 사람은 세계를 다스리는 제왕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밧줄을 풀기 위해서 애썼지만 매듭이 어찌나 복잡한지 모두 실패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듣고 그 상자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칼을 빼들어 밧줄을 내리쳤습 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밟고서 칼을 높이 쳐들고 "나는 세계의 제왕이다!" 소리쳤습니다. 알렉산더는 푸는 것이나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 하나 푸는 것 보다 일시에 끊어버리는 것이 그의 호쾌한 성격에는 더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모든 복잡한 문제를 일시에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문제들의 해답입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 인생의 종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여기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니다! 부활이 있다!" 이런 질문을 안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있게 사는 것인가?" 부활은 여기 대해서 정답을 줍니다. "부활을 믿으며 살아라! 그러면 보람있게 살 수 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가 "어찌하여 의가 패배하는 일이 많이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여기에 대해 "아니다! 부활이 있다. 부활은 의의 최후 승리를 증거해 준다!"라고 대 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을 통해서 모든 문제, 중요한 문제, 당면한 문제의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인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서 부활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면서 부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들이 질문한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하고서 대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7장 1절부터는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하고서 부부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7장 25 절에서 "처녀에 대하여는"하고서 임박한 재림과 앞둔 성도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 말하고 8 장 1절에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12장 1절에서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 16장 1절에 서는 "연보에 관하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에 대하여는" 이런 말이 없는 것을 보아서 고린도교회 가 부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사도님, 부활 문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묻지 않았습 니다. 묻지도 않은 문제인데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말합니다. 주문 받지 않은 것을 제공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부활 문제를 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 사도의 마음속에는 "고린도교인들이여, 그대들은 다른 것은 다 물어보면서 어찌하여 마땅히 물어보아야 할 부 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다른 것들은 액세서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첫 부분에서 십자가를 높이 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심 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 17∼18).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 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 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 2 2∼24), 고린도전서 1장은 십자가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2장에서도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 1∼2) 그리고 끝 부분인 15장에 와서는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부활은 오메가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또 다른 알파가 됩니 다. 우리는 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부활 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궁금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해외여행을 떠날 때 이것저것 다 챙겨서 정량이 초과될 정도로 많은 집을 들고나섰 는데 정작 여권은 안 가지고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다른 것보다 부활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인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부활은 소망 가운데 소망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 가운데 살아야합니다. 소망 가운데 가장 큰 소망이 바로 부활의 소망입 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 빠져 있습니다. 교육계의 형편도 매우 힘이 듭니다. 부활은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줍니다. 올해 부활절에 관한 교계 신문들과 잡지들의 기사를 많이 읽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매 년 같은 주제로 여러 번 말해야하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기도 어렵고 새로운 은혜 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저 비슷비슷한 내용들입니다. 그 가운데「기독교연합신문」의 대담 기사 제목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회 부활신앙으로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회 부활신앙으로 일으키자", 이 제목은 우리 사회 형편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신앙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신앙은 절망을 거부합니다. 부활신앙은 용기의 근원이요 재기의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땅에 떨어진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부패한 사 회도 소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의 느낀 절망이 더 컸을까, 아니면 나의 절망이 더 클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이 가졌던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은 없습니다. "다 끝났다!", 그래서 배신자 유다는 목메어 죽고, 다른 제자들도 고기 잡으러 가고 엠마오 로 가고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소망을 갖습니다. 다시 모입니다. "새로 시작하자!" 그렇게 해 서 시작된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 소망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생명권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복 제, 낙태, 안락사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요즘 우리 나라 의료계는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이른바 소극적 안락 사를 추진하고 있는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지도 가르쳐줍니다. 생명의 시작과 끝의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생명윤리를 새로 세울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내가 이 집의 주인이면 이 집을 세를 놓을 수도 있고 수리할 수도 있습니다. 부수고 새로 지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 그리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 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교회 식당 앞에 조그만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부활절까지 완성하기 위해 관계된 분들이 수 고를 많이 했습니다. 연못 안에 조그만 분수들이 있어서 물을 내뿜고 있습니다. 분수가 물을 내뿜기 위해서는 물 이 고여야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순절 기간 경건의 물이 고이게 하셨습니다. 이제 분수에 물이 솟는 것처럼 부활의 기쁨이 솟구치기 바랍니다. 부활절이 되면 우리는 부활의 기쁨과 함께 우리 나라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온 날이 부활 절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절은 음력을 기준으로 정하기 때문에 매년 날짜가 다른데 1885년의 부활절은 4월 5일이었습니다. 그 날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항을 통해서 한국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주장이 있지만 한국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이 날을 출발점으로 잡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 위에 우리가 수지에 들어와서 첫 예배를 드린 날이 1997년의 부활절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 땅, 새 시대, 새 역사를 열어 가는 교회"를 장기표어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제 이천 년을 맞이한 흥분도 사라져서 "새 시대"라는 말이 빠지고 대신 "새 성전"이라는 말 이 들어가기도 하고, 수지도 이제는 새 땅이 아니어서 그 말이 빠지기도 하지만 "새 역사를 열어 가는 교회"는 변함이 없습니다. 부활절은 목양교회가 새 역사를 열어가기 시작한 날입 니다. 올해 부활절에는 본당 상량(上樑)을 합니다. 어제 하려다가 여러분이 교회 오시면서 본 중장 비 사정으로 오늘로 미뤄졌습니다. 문화원도 오늘 개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극복이라는 큰 문제를 해결하셨으므로 그 밖의 잔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하며 살아가야 하듯 주님께서 저희 교회에 새 역사를 열어갈 터전을 마련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 들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화가의 제자들 가운데 십자가만 중점적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제 자는 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이 제자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자네는 왜 십자가만 그리는가? 그것도 좋지만 부활하신 예수님도 그리기 바라네! 아니 부활하신 예 수님을 더 많이 그리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 자네 그 표정도 바꾸는 것이 좋겠네!" 이제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밝게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소망의 근원이라는 것을 생 각하며 부활의 기쁨이 분수처럼 샘솟는, 부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 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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