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 시대의 '다른 복음'들 2001-12-26 16:55:14 본문 갈 1: 6∼10 오늘 본문 가운데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6절에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8절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절에 같은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렇게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 앞뒤에는 아주 강한 말들이 있 는 것을 봅니다. 6절을 보면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상하게 여긴다는 말은 '놀란다', '절망한다', '고통을 느낀다' 이런 뜻입니다. 8절과 9절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는데 목회자가 삼 가고 또 삼가야 할 것은 교인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저주는커녕 교인들에 대해 서운한 마음조차 갖지 않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목회자에게는 축복권과 함께 저주권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 저주권은 벌의 침과 같습니다. 상대방도 아프게 만들지만 행사하는 사람에게도 그 이상의 아픔을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두 번씩이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 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 문제가 아주 중요하고 다급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복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복음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이비복음입니다. '사'(似), 비슷해 보이지만, 근사해 보이지만. '이'(而), 그러나, '비'(非) 복음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의 앞 뒤에 따옴표를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바른 복음에 맞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의 다른 복음은 유대교, 그리고 교회 안의 바리새주 의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유대교는 팔레스타인의 지역종교가 되어 많은 지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고 바리새인들은 사라져 이천 년 전의 시대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다른 복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이단들, 두 말 할 것 없이 다른 복음입니다. 교회를 교란시키는 여러 주장들, 7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 밖에도 복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복음이 아닌 것들, 다른 복음들이 있습 니다. 첫째, 천주교입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 감사주일인데 매년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과일과 곡식으로 제 단을 장식합니다. 그 과일과 곡식들은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고 오후에 사회복지 시설에 갖다주는데 주로 이 위에 있는 천주교에서 경영하 는 고아원에 가지고 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천주교를 다른 복음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면에서는 뜻을 같이 하지만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 을 기준으로 할 때는 천주교는 다른 복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천주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장점과 매력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종교입 니다. 예배 의식, 미사, 장엄합니다. 신부님들, 거룩해 보입니다. 저희 교회 주변에 천주교 시설들이 여럿 있어서 수녀님들을 종종 대하는데 수 녀님들, 경건해 보입니다. 실제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 수사(修士)라고 밖에 잘 나타나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은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회적인 공신력이 높아서 천주교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서 공헌을 많이 했습니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운 동의 성지처럼 인식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 원로 목사님인 김찬국(金燦國) 목사님이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 당해 옥살이 하다가 1975년 2월 17일 석방되었습니다. 국내외의 요구가 하도 거세니까 정부에서 마지못해 석방했습니다. 석방되시던 날 서대문교도소 앞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아주 추운 밤이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데 그 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 당했던 분들 여럿이 석방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서대문교도소를 나온 분이 천주교의 지학순(池學淳) 주교님이었습니 다. 그 다음에 학생운동을 하던 이철(李哲)씨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김 목사님이 목에 커다란 타월을 두르고 웃으면서 교도소 문밖으로 나오셨습니다. 천주교는 지금도 사회적인 영향력이 큽니다. 때로는 대통령의 말보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또 봉사와 구제활동도 많이 합니다. 개신교는 쩍하면 쩍쩍 갈라지는데 천주교는 놀라운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습니 다. 천주교는 이렇게 좋은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 질을 기준으로 하면 바른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 다. 개신교의 세례를 천주교에서는 영세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분이 개신교로 오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의 율례로 되어 있습니 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형식의 차이는 이렇게 극복하고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을 기준으로 하면 인정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8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천주교의 잘 못된 가르침과 부패를 보다 못해 1517년 10월 31일, 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95개조를 비텐베르그 성교회(城敎會) 정문에 내 걸어서 개신교운동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날입니다. 만일 천주교가 다른 복음이 아니고 바른 복음이라면 루터가 한 일은 부질없는 일이 됩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하고 따르고 있는 우리들도 이상한 사람들이 됩니다. 천주교가 바른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개신교의 반열을 지키고 있고, 오늘 모든 교회들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개신교 는 힘차게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온 천주교는 여러 번 큰 박해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규모가 컸습니다. 이 때 황사영(黃嗣永) 이라는 사람이 비단에 우리 나라 천주교의 형편을 알리고 우리 나라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을 써서 북경으로 보내려고 했 습니다. 이것이 발각되어 박해가 더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을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라고 합니다. '백'은 비단 백자입니다. 황사영 백서는 로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신앙의 향기 200년 특별전시회"가 강변도로 옆에 있는 절두산 순교박물관 에서 열렸는데 이 황사영 백서를 로마에서 빌어다가 특별전시를 했습니다. 애 써 가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천주교에 대해서, 특히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 대 해서 남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비단 에 13,384의 글자가 깨알같이 써 있었습니다. 대단한 정성입니다. 머리가 숙여 졌습니다. 다른 전시물들 앞에는 조명을 잘해 놓았는데 이 백서 앞에는 불을 켜지 않았습 니다. 자세하게 보기 위해 불을 좀 켜달라고 했더니 관리하는 분이 안 된다고 전구의 열이 백서에 영향을 줄까봐 불을 못 켠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쓰고 보존되고 있는 백서이지만 그 내용은 기분이 나쁜 것 입니다. "청의 황제를 동원해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어 주십 시오. 서양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강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 게 해 주십시오", 비이성적인 내용입니다. 아무리 정성이 깃들어 있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알맹이가 이러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말하면 천주교는 바른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입니다. 장점이 많고 매력적인 면이 많아 사람을 끄는 힘이 있지만 다른 복음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끌려서는 안 됩니다. 둘째, 십자가가 없거나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는 가르침들입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다른 복음' 하나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 어는 다릅니다. 6절은 '헤테른'이라는 말을 썼고 7절은 '알로스"라는 말을 썼습 니다. 헤테른이라는 말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뜻합니다. 변질된 복음을 말합니다. 6절의 다른 복음을 영어성경은 another gospel이라고 했습니다. different gospel이라고 한 영어성경도 있습니다. 복음이었는데 변해 버린 것을 말합니다. 알로스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가운데 다른 하나라는 뜻입니다. 7절의 다른 복음 을 영어성경은 other gospel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교회 밖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유대교가 밖에서 이제 막 생긴 갈라디아 교회를 위협했습니다. 그와 함께 갈라디아 교회 안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율법의 행위를 덧붙여야 온전하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들이 주장을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밖의 다른 복음보다 교회 안의 다른 복음이 더 무섭고 피해가 큽니다. 1980년대에 우리 나라에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강조된 일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 이것이 사회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는 구호였습니다. 자동차들 가운데 코란도라는 이 름을 가진 지프차가 있는데 코란도는 "코리안 캔 두"( Korean Can Do), "한국 사람은 할 수 있다"를 합한 말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이 적극적인 사고방식 운동은 교회가 주도한 것 같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0년대에 미국 가든 그로브 처지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 었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쓴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은 베스트 셀러 가운데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어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주장들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때 제일 사랑 받은 성경말씀이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좀 더 자세하 게 말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 안에서" 이런 뜻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때는 복음입 니다. 신앙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빼고,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도외시하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또 어리석음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수험생들, 그렇게 기도하면서 수험에 응하시기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도 종교개혁 운동을 할 때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 도다" 하면서 힘있는 장수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지했습니다(찬송가 384장).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는 것은 교만이고 어리석음이라고 했습니 다. 아주 좋게 말해서 신념입니다. 신앙과 신념은 다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어느 설교가 명설교이고 어느 설교 가 명설교가 못되는가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습니다. A라는 사람에게는 졸 작으로 들린 설교가 B라는 사람에게는 천둥과 같은 진리의 가르침으로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의 구성이나 표현이나 논리는 뛰어나도, 듣기에 아주 재미있어도, 설교를 위한 기도가 부족하면 명설교인 것처럼 보이나 명설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문학에 대해서 "어떤 작품이 명작이고 어떤 작품이 졸작이냐 판정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겠다는 정열과 성실성이다" 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설교에도 인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기준, 기본적인 기준, 필수불가결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설교에 서 십자가가 얼마나 강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들 가운데 십자가가 빠진 것 은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강조되지 않은 설교는 명설교인 것 같으나 명설교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강조되지 않는 것은 다른 복음으로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들입 니다. 십자가가 강조되는 설교는 명설교가 아닌 것 같아도 명설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 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고 이어 22절과 23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 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 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하고 2장 2 절에서 결정적으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 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선포하고 있 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들이 명설교인 것입니다. 교회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도 다른 복음입니다. 일제 시대 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민족운동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분들 가운데 교회에 끝까지 남아있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1873-1935)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처음에는 교회에 열심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열심히 했 습니다. 특히 학교를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사 회주의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니까 사회주의로 갔습니다. 이 분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너무 간단하게 단 정지을 수는 없지만 요약하면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회참여 운동에 앞장을 서는 장로교의 교파가 하나 있습니다. 이 교파가 만들어지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분이 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작사한 고 김재준(金在俊) 목사님입니다. 올해가 이 분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김재준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많은 강연이 있었는데 그 강연들의 공통된 요지가 "이제는 사회에서 교회로"였다는 신문보도를 보았습니 다. 교회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하고 다른 것도 해야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다른 것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복음으로 흐릅니다. 셋째,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하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세상도 좋고, 교회도 좋다, 안 됩니다.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 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관입니다. 영국의 왕들이 종교개혁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할 때, 이것도 좋고 저것 도 좋다 할 때 '아니다, 철저하게 개신교 신앙이어야 한다!' 하고 일어선 것이 청교도들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중국에 경교(景敎)라는 기독교의 한 파가 들어갔는데 중국에 먼저 들어가 있던 도교를 보고 "도교도 좋다", 그래서 예배당을 세우고 도관(道 館)이라고 도교식 이름을 부쳤습니다. 불교를 보고 "불교도 좋다", 그래서 십자 가를 세울 때 연꽃 위에 세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없어져 버렸 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아 니하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물건을 뜨겁게 하면 병균이 죽습니다. 그 물건을 차갑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상품포장에 "냉동보관 하십시 오"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면, 뜨뜻미지근하면 쉬게 썩습니다.. 변질하기 쉽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 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였 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다" 해야합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이런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오직 믿 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했습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이것뿐이다!' 하는 뜻입니다. 독이 많은 버섯일 수록 더 예쁘게 보이는 것처럼 다른 복음, 사이비 복음일수 록 사람들을 끄는 힘이 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만 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 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바른 복음 위에 분명하게 서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 48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요즘 '개혁'이라는 말은 혐오감을 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 개혁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사회만 그 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그렇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참된 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 바른 복음을 세우는 것 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다른 복음의 요소나 위험이 없습니까?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않습니까?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않고 바른 복음을 세우고 따르는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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