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물에 잠기라 2001-12-28 21:02:09 본문 : 겔47:1-12 한 소년이 학교에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자기가 신고 있는 신발이 너무 낡았기 때문입니 다. 더구나 아버지는 지체부자유자이었고 일용직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새 신발을 사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 소년이 학교에 가기 위하여 신을 신으려고 하는 데 새 신은 아니지만 깨끗하게 빤 운동화가 놓여 있었습니다. 신어보니 자신의 발에 꼭 맞 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편지가 쓰여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발은 아니지 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발걸음으로 살거라" 아버지의 편지였습니다. 이 소년은 이 편 지를 읽으면서 자신의 행복을 그동안의 모든 일들을 위로 받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일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 다. 1만 명의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이 함 께 갔습니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 을 침공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당시 임금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녀 죽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에겐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 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은 소망을 선 포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포로들은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해서 위로를 주었 을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가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하루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 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가운데에도 성전 문지방 밑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 런데 그 문지방의 어디를 통과해서 흐르고 있습니까? 제단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이 제단을 감싸면서 통과해야 남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 나온 샘물이 제단을 한 바퀴 돈 다음에 그 제단을 통과해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으로 본 문은 시작됩니다. 그러더니 성전에 물이 그득히 고이며 한번 걸어보라고. 그래서 걸어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찰랑 찰랑 흘러 넘쳤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 금 있다가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물은 점점 차 올라 허 리까지. 오늘 본문에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가슴까지. 급기야 물은 성전에 가득하여 헤엄하지 않고서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한바퀴 휘감아 돌더니 사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해 바 다에 도착하자 죽었던 사해 바다가 살아나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어 노는 것 아니겠습니 까? 그리고 사막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데 보니까 사방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 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그 성전에서부터 하나의 생명의 강이 시작되어 그 강이 사막 에 흐를 수 있다면 그리고 죽음의 상징이었던 사해까지 그 생명의 강이 연결되어 마침내 사 해 바다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그 사건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분명히 암울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꿈을 버리지 않으면 회복을 가지 고 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이 잡혀있던 아우슈비치 형무소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비 누의 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빅톨 프랭크에 의하면 죽음을 앞에 두고 깨어진 거울로, 먹을 물로 자기를 가꾸던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자들만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본문은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앞 뒤 막혀있는 곳에서 소망을 주었습니다. 본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강이 되었 다고 했는데 실상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곳입니다 .더구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그 물이 사막을 통과하고 사해 바다까지 이르러 마침내 죽은 사해 바다를 살렸다고 하니 상징 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이지요. 저희 나라도 물로 인해서 울고 웃지 않습니까? 엊그제 가뭄이다가 이제 장마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하튼 지구의 71%가 물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때문에 앞으로 물로 인해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에서 시작된 나일강은 이집트에 흐르는 전장 6,670km의 긴 강입니다. 이집트를 통과하는 나일강 의 길이는 1,500km입니다. 나일강 상류 좌우에는 케냐, 수단, 탄자니아 등 여러 나라들이 자 리잡고 나일강 물을 먹고삽니다. 그런데 나일강 상류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든지 가뭄으로 물 부족 현상이 벌어지게 되면 케냐나 수단이나 탄자니아 등이 나일강 물을 가로막고 내려 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중동의 오일 전쟁보다 더 심각한 물 전쟁이 일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물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도 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물이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 러갔다고 했는데 여기 제단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강물이 무엇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강물의 의미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한 복음을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물과 성령으로 너희들이 거듭나야 하리라. 나 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이것은 성령의 물에 감동되어 예수님 의 보혈의 은총에 적셔진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성령의 생수가 제단에서부터 흘러온다고 얘기하고 있 습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 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가 흐르기 때문에, 구원의 보혈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깔뱅은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단임을 믿으 시길 바랍니다. 쉽게 생각하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물이 흐르고 있는 구원의 자리임을 믿 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인간적으로 생각합니다. 운동경기를 본다고 교회 안나오고, 어떤 일이 생기면 먼저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십시오, 교회가 우스운 곳이 아닙니 다.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우 리의 신앙에 핑계를 대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신앙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본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너의 신앙을 측량하라.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 중에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몇 천년 전 에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먼저 발목을 잠근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3절) 발목에 물을 잠근다는 것은 신앙의 초보상태입니다. 왔다 갔다 족입니다. 발목에만 물차 있으니 아직 체험도 없고 감격도 모자라고 그냥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 를 드립니다. 남자분들 중에서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다 압니다. 교회 나가는 것도 반대 안 합니다. 발목만 담그고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남자 분은 주일날만 되면 아이들 다 깨웁니다. 성경 암송시킵니다. 아내를 잘 도와줍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 아이들을 재촉해서 교회에 옵니다. 차 문까지 열어 줍니다. 그리고 본인은 무엇 하는 줄 아십니까? 주차장에서 자는 것입니다. 18년 동안 그랬다는 것 입니다. 그래도 4년 뒤에 한번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목 신앙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구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발목신앙도 되지 못하는 오늘 본문 11절에 말하는 진펄과 개펄 신앙이 있기 는 합니다. 이들은 교회 냄새만 맡았을 뿐입니다. 물도 적셔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들어와도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 은 더 강력한 경고를 합니다. 11절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에 그 영혼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 구원의 강물에 뛰어들지 못한 사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두 번 째로 무릎까지입니다.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 릎에 오르고"(4절) 그래도 물은 차 올라야 합니다. 이제 물이 점점 차 오르게 되면 무릎까지 오르게 되지요. 무릎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위해 바지를 걷어 부칩니다. 팔을 걷고 일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입만 벌리면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 두 번 교회 오다가 예수 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친구들이 교회를 비판하면 그게 그렇게도 싫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다고 방어하 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릎까지 차 오른 신앙인이 되어 가는 거지요. 이전에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 면 혼자서 헐떡거리고 뛰어다녔습니다.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 보려고 했습니 다. 선배들을 만나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더 얽히고 꼬이기 시 작했습니다. 아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 해보자.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신통하 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더 꼬이더니 하나님이 도와주기 시작하 자 그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그의 무릎이 기도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무릎이 은혜의 강물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신앙 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옛날 중국 영화를 보면 제자를 훈련시킬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양쪽 물통에 물을 길러 오게 하면서 물을 반쯤 채웁니다. 그리고 빨리 오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물이 다 튀어 나갑 니다. 물이 가득 차야 합니다. 그래야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릎까지 오면 무엇인가 신앙 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 데 안정감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허리까지입니다.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 에 오르고"(4절) 그래서 물은 또 다시 불어나야 하는 겁니다. 다음 단계는 물이 허리에 차는 단계입니다. 허리는 중심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중심이 잡히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냥 성 경이 옛날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성경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것을 깨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옛날 역사책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저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핑돌며 감격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허리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는 단계입니다. 예배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빨개져서 나가야 합니다. 어떤 남편이 그러더라는 것 아닙니까?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하도 울면서 눈이 벌개서 일어서니까 자기 아내에게 그러더랍니다. "이놈의 교회에 최루탄 뿌렸냐." 감동이 있게 되면 물이 허리에 차 오르고 있는 것임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에베소서 6 장에 보면 안전무장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 허리에 진리 허리띠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부 터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이 잡혀있는 신앙 말입니다. 이때부터는 사람들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껴 앉을 수 있습니다. 객관화 시켜 영적으로 보게됩니다. 부부, 친구, 세상의 관계들에 대해서 객관화시키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허리에 힘이 있으면 웬만한 유혹이나 시험에는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가슴까지입니다. 물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또 불어납니다. 본문에 문자적으로는 생략이 되었지만 당연 히 거쳐야 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슴까지 물이 차는 단계입니다. 가슴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연조만 깊어지다 보면 기쁨이 없고 감격 이 없습니다. 자칫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십상이지요. 습관에는 원래 감격이 없는 겁 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빨을 닦으면서 아~ 이빨이 닦여진다. 은혜가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 수하면서 아~ 세수하는구나. 눈물이 핑돌면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세수하시는 분 계십니 까? 빨리 해치우는 겁니다. 예배 한시간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을 하더라도 찬송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감격이 없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이 물에 잠기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 면서도 기쁨이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감사가 없는 신 앙인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자기 독백에 그치고 맙니다. 감격이 없는 찬송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는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과 은혜의 단계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깊어져 가고 있습 니다.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5절) 강물이 있습니다. 이 강물에서 즐거이 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은 더운데 수영 못 한다고 괴로워하는 분도 계십니다. 같은 강물인데 말입니다. 들어와 보지도 않고 덥다고 짜 증만 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강물에 있는 사람은 시원합니다. 그리고 물에 뜨게 됩니다. 몸을 맡기면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가 겨우 접촉만 할 정도의, 맛만 볼 정도의 얕은 물이 아닙니다. 헤엄쳐야만 할 물, 우리를 능히 잠기게 하는 물, 넘치는 강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표현을 빌리면 풍성한 강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러나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그 영원한 생명을 얻기만 하고 신앙의 진전이 없는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도약이 더 이상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이 풍성한 강속에 잠겨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놀라운 삶을 준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의 강속에 발목만 잠기게 하고 있습니다. 만일 온 몸을 담그고 그 속에서 헤엄치며 하나님의 생명의 깊이를 맛본다면 그 삶이 얼마나 놀라울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더욱 풍성하고 더욱 깊은 삶 이 예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정도라는 것이 겨우 발목만 적시는 자리에 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황폐한 사막에 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 신선한 생명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연상 해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도 가능합니다. 죽어 있던 내 영혼 속이 다시 소생하는 놀라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죽어 있는 사해와 같았던,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 던 내 영혼 속에 생명의 근원이 되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내 영혼의 찬란한 부활의 이상을 바라보십시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생명이 없는 자들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이가 나 를 치료하시고, 나를 만드신 이가 나를 새롭게 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 님과 바른 관계에 설 때 그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 사 이에 바른 관계가 맺어질 때 우리의 영혼이 소생합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어야지. 애쓰고 노력하는 것 이 아닙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축복이란, 내가 노력한대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에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망설이지 마십시오. 뛰어드십시오, 그리고 물위에 뜨십시오. 오늘 본문은 그 강물을 통하여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치료하는 역사를 체험합니다. 내 영 혼이 소생케 부활하는 경험을 합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이 풍성한 강을 예비하셨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풍성한 강속에 들어 갈 수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시간의 우선 순위, 내가 철저하게 계획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반듯한 삶이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쫓기듯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한 구절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되 억지로 지지 말아라. 이왕 십자가를 지려면 기꺼이 지거라. 그러 면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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