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듣고 행하는 자 2002-01-28 13:25:28 - 마태복음 7:24-27 - 2002년 1월 27 박은호목사 작년 9월 말에 동안교회를 사임하고, 10월부터 ‘높은뜻 숭의교회’를 개척하면서, 저는 요즘, 전에 섬기던 교회들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상당한 목회적인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단순한 시간적인 여유라기보다는, 기존의 목회와는 다른 목회를 시도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대적인 목회적 여유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루는, 수요일 날 다른 날보다 좀 더 일찍 오후 6시경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전에 같으면 수요기도회가 있기 때문에, 기도회를 마친 후 이런 저런 일 조금 정리한 후 집에 가면, 아무리 빨라도 저녁 9시는 넘어야 됩니다. 작년 10월 이후, 가끔씩은 다른 교회 수요기도회에도 참석하곤 했지만, 매번 그렇게 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 석 달 그런 식으로 수요일 날, 부담 없이 때로는 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교회도 가보기도 하곤했습니다. 그날 따라, 일찍 집에 들어가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좀 쉬려고 하는데, 제 아내가 조심스럽게 남편인 목사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당신, 요즘 새벽기도회를 해요? 수요기도회를 해요? 그렇다고 주일찬양예배를 해요? 주일 날, 주일예배만 드리는데…,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아내로부터 그 말을 들으니까, 속으로 좀 섭섭하더라고요…. 속으로 혼자 그랬지요. 아니, 그렇다고 제가 평소에 농땡이 부린 목사는 아니거든요. 1989년 6월 14일에 목사 안수 받은 후, 부목사로 8년, 담임목사로 4년, 작년 한 해 동안 동안교회에서 팀목회를 하면서, 13년 동안 안식년 한 번 못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목회를 했는데, 개척교회 하면서 형편상 잠시 누리는 여유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나?”는 혼자생각을 하면서, 짧게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좀 멋쩍은 말투로, “응, 지금 대강당 보수공사하고 있는데, 공사 끝나면 수요기도회 곧 시작할 꺼야…” 대답은 했지만, 참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한 참 후에 아내가 또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그것 다 이해가 가지만, 적극적으로 학교와 의논해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제 아내가 볼 때는, 열심히 목회하지 않고 소극적이지 않느냐는 거지요. 아무튼, 그 날 저는 아내로부터 기가 많이 꺾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다른 교회의 수요기도회에라도 가지 않고 집에서 쉰다는 것 때문에, 농땡이 목사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요즘,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교회와 목회를 하기 위해서 더 많이 애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우가 우리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에 수요기도회가 없고, 새벽기도회도 없고, 금요기도회도 하지 않는 것 보면서, 우리교회가 美國敎會를 닮아 가는 교회가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분도 계시는 것 사실입니다. 미국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는 미국교회를 닮으려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수요기도회 하고, 새벽기도회도 하고 금요기도회도 하는 전통적인 한국교회를 닮거나, 그런 교회가 되려는 교회도 아닙니다. 높은뜻 숭의교회가 관심 가지고 있는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에클레시아)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려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4-27절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비유’(譬喩)로 산상수훈의 최종적인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높은뜻 숭의교회 교우들이 추구해야 할 신앙이 어떤 신앙인가? 높은뜻 숭의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인다면, 어떻게 붙이겠습니까? … 저는,‘두 건축자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여보고 싶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 동의하실 겁니다.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그것 모르는 사람 어디 있어?” 하시겠지만, 그러나 정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결론인 이 비유말씀, ‘두 건축자의 비유’를 정말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 제가 생각하기에는 좀 과장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의 저와 여러분의 신앙과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많은 부분에서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비복음적인 그릇된 신앙’과 주님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비복음적인 교회’가 아니었는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은 적어도 3가지 점에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기준을 달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4,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매우 중요한 ‘强調語法的인 표현’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새로운 기준의 문제』입니다. 그 새로운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말’이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말씀하시고, 동시에『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을 복음적으로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첫 번째 열쇠(Key)입니다. 『나의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말씀’을 가리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이 아닌 것을 거부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겁니다. 모세의 말이나, 서기관의 말이나, 바리새인의 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산상수훈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式’이 있습니다. 그 식은, “너희는 지금까지 그렇게 들었고,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느냐? …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But I Say to You).” 이것이,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사용하셨던 말씀하시는 式입니다. 즉, 율법서나 선지서를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오해하고, 잘못 배우고, 잘못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해석하고, 새롭게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그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해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여태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 때, 진정한 개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저는, 니버가 매우 예리하고 정확한 관찰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마 6:22-23). 여기서 말씀하시는 눈이란, 시력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역사와 사물과 인생과 교회를 보는 렌즈, 시각을 말합니다. 밝은 눈과 같은 가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와 사물과 인생과 교회를 보는 밝은 눈과 같은 렌즈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치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 렌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렌즈를 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눈이 밝게 됩니다. 높은뜻 숭의교회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이 시대와 한국교회에게,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새로운 눈’을 주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 새로운 기준, 눈을 갖기 위해서는 깊이 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 46-49절 말씀에 보면, 저자 ‘누가’는 ‘마태’와는 달리 또 다른 의미 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과 같은가 하면 집을 지을 때, 기초를『깊이 파고』주추를 반석 위에 놓는 사람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은,『깊이 판다』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에 속담처럼 통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덮어놓고 믿어라, 무조건 믿어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 되도 믿고, 이치에 맞지 않아도 덮어놓고 믿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성이 있습니다. 열어 놓고 예수 믿어도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싶은데, 어떻게 덮어놓고 예수 믿는데 바른 신앙, 복음적인 신앙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은 덮어놓고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정말 생명을 걸고 깊이 파야 얻을 수 있는 보화와 같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땅을 깊이 파야합니다. 그리고는, 그 발견한 보화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소유한 全財産을 다 팔아서라도 그 발견한 보화를 사야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복음말씀은, 그저 입술로 눈으로 이해되고, 얻어지는 것 아닙니다. 깊이 파야 이해가 되고, 그 말씀의 보화를 내 것으로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그저, 아멘 아멘 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十誡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선언하신 후, 10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잘 아시는 대로,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기록한 여호수아서나 구약의 왕들의 시대를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과 이방인들을 진멸하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멸하라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 우리가 믿는 하나님 헷갈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왜 언뜻 보기에는 헷갈리는 말씀 같은 이런 사건과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 깊이 파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깊이 파보지도 않고, 이런 전쟁과 살인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당화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소위 성전(Holy War)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복음에는, 聖戰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왜 이와 같이 서로 상충되는 듯한 모순된 성경말씀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때로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없습니까? 하나님 참 이상한 하나님 아니신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언제는,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언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진멸하라, 다 죽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하나님 절대 아니시라고 믿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고 질문을 드리니까 어느 분이 그러십디다. “이방인들은 죄가 많은 백성이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구 삼아 다 죽이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가 없는 깨끗한 백성입니까? 아닙니다. 죄로 따지자면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죄인입니다. 아니, 그들 역시 이방인보다 더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이 기록되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시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화친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이방인들, 가나안 원주민들과 전쟁을 하면서 죽인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역사적인 산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까지, 우리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기준처럼, 惡人과 善人을 구별하시고, 택한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시고, 한 사람은 사랑하시고, 한 사람은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가 형제나 이웃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깊이 판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의 시각으로, 지금까지의 기독교역사와 우리의 삶과 내 신앙과 삶의 문제와 교회, 모든 것을 다시 본다는 말입니다. 셋째, 복음을 듣고 행하는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常識과 크게 다른 말씀을 두 번씩이 강조하시면서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나의 이 말』을『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나의 이 말』을『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그렇게 골치 아프게 예수 믿을 것 있나? 하는 마음으로『믿음으로 산다』는 말씀과 서로 상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무시해버리지는 않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그 복음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였던 S. Kierkegaard는 당시 교회에 다니는 敎人들을 가리켜 ‘집거위들’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거위들은 매주일마다, 뒤뚱거리면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면서 설교말씀을 아주 아주 열심히 듣습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집거위가 아닙니다. 답답하게 이 좁은 장소에만 머물러 있어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설교자인 숫거위는 교인들에게 더욱 용기를 줍니다. “여러분은, 뒤뚱거리며 걸어다니지 않고, 저 공중의 새와 같이 창공을 향하여 날아갈 수 있습니다. 더 먼 지역, 더 축복 받은 땅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거위들은, 매주 설교를 들으면서, 꽥꽥거리는 소리였겠지만, 어떻게 했겠습니까? 신아 나서, “아멘, 아멘, 꽥꽥…”하면서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끝난 후에는,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시 일렬로 줄 서서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복음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우화입니다. 저도, 키에르케고어가 말한『집거위 우화』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서 좀 다른 각도에서 더 깊은 문제 한 가지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깊은 의도는, 그저 단순하게 행동하느냐? 행동하지 않느냐? 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얼마나 봉사 많이 하십니까? 그러나, 봉사하느냐? 봉사하지 않느냐? 의 문제는, 예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수요기도회에 참석하느냐? 참석하지 않느냐?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금요기도회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죄송하지만, 그 모든 열심과 우리의 행위가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세의 말이나, 서기관의 말이나, 바리새인의 말을 듣고 행하는 것, 그들을 따라 행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고 그들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라서 열심히 하면 할수록, 外飾하는 자가 됩니다. 화 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악행과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것은, 바리새인의 정신으로, 서기관의 정신으로, 외식하는 자들의 정신으로 무엇을 행하느냐? 행하지 아니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말씀으로, 그 복음의 정신으로, 그 복음을 듣고 그 복음으로 행하느냐? 행하지 아니하느냐? 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의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많은 것 중에서 가난한 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낸 부자들의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더 크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교만한 마음으로 외식하는 기도를 드린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남의 것을 討索 하고 도적질한 세리가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회개하며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를 더 의롭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천국에 더 먼저 들어간다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깊이 파고, 고민하고, 땀흘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하느냐?를 고민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듣고 행하는 자의 삶을 살아보셨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하신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는 말씀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