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사46:8-13)
2002-03-11 00:32:25



AD 73년, 사해 근처 '마싸다'( )라고 불리는 한 요새에서, 967명의 유대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에 끝까지 항거하였으나,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가 이끄는 제 10군단 정예 로마군인들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마싸다는 흙산이라 올라올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포로를 이용하여, 인공언덕을 쌓아 진입로를 만들었다.
그때 유대인 지도자 엘 아제르(El azar)는, 부하들에게 비장한 연설을 한다.

[나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동지들! 오래 전 우리는 주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섬기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이, 우리가 섬길 진실하고 올바른 하나님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결심을, 행동으로 증거 해야할 결정적 순간이다.

바로 이런 때, 우리는 스스로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한 목숨 부지하겠다는 생각에서, 노예가 되는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
만일 로마 군인들에게 살아서 붙잡히면, 그들이 우리를 그대로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으며, 이 항거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마지막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에게 이러한 특권을 주신 분이 주님이신 만큼,
주님은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명예스럽게 죽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로마 군인들의 총공격에,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스스로 명예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남아 있다. 이것만은 우리의 대적도 방해하지 못 한다.

로마 군인들은 우리를 생포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승리를 그들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랑하는 아내들을, 로마 군인들에게 능욕 보일 수 없다. 자식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보아서도 안 된다.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을, 우리의 손으로 거두어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 역시, 사랑하는 이들의 뒤를 따라야 한다.
자유라고 하는 이 영광스러운 수의를 입고서, 우리는 고이 잠들어야 한다.

그것에 앞서, 우리가 사용하던 온갖 물건들을 다 불살라, 대적들에게 전리품을 남겨 주지 말아야 한다. 이 요새도 그들이 태우기 전에, 모두 태워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예외다. 저 창고에 아직도 가득 남아 있는 식량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행여나 우리의 적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것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적의 손에 거룩한 도성과 지성소가 무참히 파괴됨을 보기 전에, 우리는 모두 죽어야만 한다.

우리는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은 야속하게도, 우리의 애국심과 열정을 외면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국운을 회복시킬 희망은 없다. 이제 남은 길이란, 명예롭게 죽는 길뿐이다.
지금 우리가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친절은, 그것은 죽여주는 일 뿐이다. 서로가 죽여줄 수 있는 이 귀중한 기회도, 우리에게는 얼마 남지 않았다.
목숨에 미련이 있어, 저 원수들에게 굴복한다고 한들, 그들이 곱게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끝없는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을 것이고, 늙은이들은 고문에 당장 죽고 말 것이다. 남편 보는 앞에서 부인들은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는 자식들은 '아빠!'를 소리쳐 불러도, 족쇄에 묶인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자! 주저하지 말자. 아직 우리에게, 칼을 쥘 자유가 있다!
우리 손이 마지막으로, 정중한 충성을 바칠 기회를 주자! 적에게 노예 되지 않은 이 상태로, 다같이 죽자. 아내들과 자식들과 우리 다같이, 자유인의 몸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자.]

엘 아제르의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가족들끼리 서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 다음,
남편들이 제각기 제 아내와 자식들을 자기 칼로 죽였다.
가족들을 죽인 남편들은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선정하여 나머지 남편들을 죽였다.

그 열 사람은 자기들의 사명을 완수한 다음, 다시 한 사람을 제비 뽑아 나머지 아홉을 죽였다.
그 한 사람도 나머지 아홉을 죽인 다음, 식량 외의 모든 물건과 건물을 불태우고 자결하였다.
이렇게 해서 967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집단 자살을 피해 살아 남은, 두 늙은 여인과 한 아이가 있었다.
군대를 따라왔던 종군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생존자들에게, 마싸다의 최후에 관해 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자살하자는 말이 아니다. 절대 자살하면 안 된다.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씀은 나라와 자유에 대한 고귀함을 말해 주는 이야기다.
나라가 망하면 가정도 망하고, 자신도 망하게 된다. 힘이 없으면 망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1.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8).
우상숭배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되었다. '이 일을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즉, 과거를 반성해보고, 다시 잘못된 길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금은 이스라엘 초급 장교가 되면, 반드시 마싸다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마싸다! 다시는 함락되지 말라" 이 쓰라린 정신 위에, 이스라엘은 오늘 굳건히 세워졌다.

독일의 '바이츠체커'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1985년 세계2차 대전, 승전이 아니라 패전 4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대하여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된다."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과거에 매이면 미래가 없다.
그러나 과거를 잊으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가난했던 때를 잊어서는 안 된다. 병들었을 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실패하고 낙심되었을 때, 미래가 캄캄하게 보였을 때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 경험한 뼈아프게 경험,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깨달은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해마다 3.1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일본을 규탄하기에 바쁘다.
"한일합방은 한국에 근대교육을 소개하고, 철도와 항만을 건설해준 유익한 것이었다"라는 식의 일본 장관들의 망언을 들을 때, 그 규탄의 목소리는 극에 달한다.
그런데 그렇게 일본을 규탄하다가도, 물건 살 때는 "역시 물건은 일제가 최고야!"라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역사를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는 일본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백성들은 우리 물건을 애용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성하지 않는다. 규탄만 한다.
이제 우리는 일제통치에 대해서 '규탄'만 하기보다는 '반성'해야 한다.

'왜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는가?', 규탄보다 자기 반성이 우선이다.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그런 민족적 수난을 당했던가?'를 깊이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IMF를 맞이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6.25 동란 이후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고통 당하던 그때를 잊어버렸다.
올챙이 시절을 잊었기 때문이다.

배고파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칡뿌리를 캐 먹던 그때 그 시절,
힘겹게 넘어야 했던, 보릿고개의 아픔과 고통을 잊어버리고,
좀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흥청망청 쓰다가 IMF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치지도자를 많이 욕한다.
그렇게 정치지도자들이 썩었다고 욕하면서도, 그들이 나오면 또 찍어준다.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실패를 다시 경험해야만 한다.

다시 생각하지 못하는 자, 반성하지 못하는 자가, 패역한( , 활보하다, 달려들다) 자다.
남자다움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야 다시 죄짓지 않는다.
죄와 싸우는 힘이 남자다움이다.

다윗은 남자다웠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는 자만이 기억할 수 있기에, 9절에 "옛적 일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무엇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2. 하나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9).
모세 이후,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다른 구원자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낼 때,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① 홍해가 막히면,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이적으로 구원하셨고,
② 목마른 기갈의 위험이 있으면, 반석에서 생수를 제공해 주셨다.
③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의 위험이 있을 때, 만나를 공급받는 신비의 체험을 했다.

④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때 하나님은 구원의 상징인 구리뱀을 장대에 세워,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받게 하셨다.
이처럼 위험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마누엘하며, 에벤에셀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성도의 삶은 광야의 삶이다. 하지만 광야의 삶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고통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돌봐주신다.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하라.

힘에는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열왕기하 6장 참조)
사람들은 보이는 힘만 믿으려고 하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힘이 더 크다.
미국은 세계제일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월남전에서 패했다.
그들이 무기가 부족해서 패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정신에서 패배했다.
이스라엘은 아랍군대 1억을 상대로 해서, 100분의 1도 안 되는 인구를 가지고 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생존을 위해 싸웠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정신상태에서 먼저 이겼다.

어떻게 해야 정신력이 강해질 수 있나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67년 6월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은,
전방에 병사들을 내보내 놓고, 자신은 방송국에 앉아서 시편 27편을 낭송하고 있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전쟁터에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국방장관의 확신에 찬, 시편낭독을 듣던 병사들의 마음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일당 백]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다.
이들을 누가 이길 수 있는가? 무기에서 나오는 힘이, 이것과 비교가 되는가?

이 사람들은 병력수가 많다고 해서 당해낼 수 없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드온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나가서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모두 32,0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사람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하셨다.
줄이고 줄인 결과 300명이 되었다. 그 300명이 나가서, 메뚜기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은 사람의 수에 있지 않고, 더구나 화력에 있지도 않다.
그러면 나라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신이고, 더 나아가서 기도하는 힘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중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명저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부는 "절망하는 것이 죄다"라는 전제 하에,
인간이 절망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제2부는 "절망하지 않는 것이 죄다"라는 명제 아래,
인간은 절망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에, 희망이 있다고 했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찾으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하나님만 구하면, 절망의 끝에서 소망의 노래가 들려온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힘있게 살아가야 한다.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은, 이스라엘이다.
마싸다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했다.
로마제국은 승전을 기념하여 개선문을 세우고, 금화를 발행했다.

그 금화에는 라틴어로 '유대아 카프크'(유대를 사로잡았다)란 글이 있고,
뽐내고 서있는 로마 군인의 발 밑에, 꿇어앉은 한 유대 부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로마인은 승리의 축배를 들었고, 유대인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현재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유대인은 살아 남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왜 그런가?
로마는 승리의 날을 기념했지만, 유대인들은 패배의 날을 기억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 어디서든, 절망적 상황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으면 거기에 희망이 있고, 자유가 있고 영생이 있다.
그래서 어렵고 고통스러울수록, 우리는 주님께 나와야 한다. 주님께 더욱 나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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