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 결산 2002-03-13 23:38:37 마25:14-30 오창우 2001-12-30 우리는 월말이 되면 월말정산을 하고 연말이 되면 연말정산을 한다. 지난 한달 동안 얼마나 잘 썼는지, 일년동안 얼마나 잘 썼는지, 어떻게 해야 잘 쓰게 되는지 연구를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산하면서 우리가 잘한 것은 무엇이며,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새로운 신앙의 삶, 성숙된 삶 지금보다 더 가치 있고 높임 받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이 시간 말씀을 전하려 한다. 1. 세상적 결산과 신앙적 결산은 다르다. 1). 세상적 결산/ 사업적 효과, 경제적 이익이 판단기준이다. 2). 신앙적 결산/ 관계적 효과, 서로를 알고 믿는 믿음이 판단 기준이다. 세상은 사업적 효과 또는 경제적 이익에 의해 판단을 한다. 우리 나라 3대 그룹 하면 삼성, 현대, 대우그룹을 지칭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대우가 망하고 sk가 떠오르고 현대가 많이 약해졌다. 생각지 못했던 벤처기업들이 더 유망하다고 인기가 있다. 신동아. 국제 그룹은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소위 시장원리, 약육강식의 원칙- 힘있는 자는 살고 힘없는 자는 죽어야만 하는 세상적 기준에 의한 결과이다. 이런 세상적인 결산에는 힘이 있는 것이 선이다. 없는 자의 소리는 힘이 없다. 이것이 세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차별이 있고, 억울한 자가 있다. 그래서 일을 달라고 데모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산은 이와는 다르다. 하나님은 신앙적 결산을 하신다. 신앙적 결산이란 힘있는 자는 살고 힘없는 자는 도퇴시키는 사업적 효과에 의한 결산이 아니다. 차별이나 억울한 것이 없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가 언제나 우선이다.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에 하나님이 세상의 법칙대로 구원받을 자격을 따져서 구원하신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성경에서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으니, 구원받을 사람, 천국갈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 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는가? 구원받지 못할 나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린 시간은? 바친 물질은 얼마이며? 기도해서 응답을 받은 횟수는? 전도한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이렇게 사업적 판단을 하신다면 당신의 점수는 얼마인가? 시장원리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었는가? 어떤 분은 교회를 세상적인 판단과 가치기준으로 평가하는 분이 있다. 우리는 1년 동안 많은 사업을 했다.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다. 그럼, 잘한 것은 살리고 못한 것은 퇴출시키자고 한다면, 예배 잘드리는 교회는 예배만 드리겠는가? 전도 잘하는 교회는 전도만 해서 전도단체가 되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신앙적 판단이 따로 있는 것이다.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이런 사업적, 경제적 효과를 따지는 시장원리에 의해서 `너는 지난 한해를 잘 살았구나, 이제 새로운 해에도 잘 살아다오 많은 이익을 내다오` 하시면서 살아도 좋다. 직분감당을 잘했다. 새해에도 나의 일을 계속 맡아서 하면 좋겠다. 이런 칭찬을 받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쉽지 않다. 아마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판단하시고 결산을 하지를 않으신다. 신앙적인 결산을 하신다. 그러기에 참 신앙인은 언제나 겸손하다. 많은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는다. "제 힘으로 했나요?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반대로 신앙인이 타락을 하면 세상적인 결산을 하려고 한다. 세리처럼 나는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구제를 하고..... 내가 잘했다. 그것이 힘이 되어 남보다 목소리를 높이고 으뜸이 되고자 한다. 다윗을 보라. 인구조사를 한다. 자기의 군대 수를 센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그러면? 신앙적 결산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다. 5, 2, 1달란트이다. 그리고 오랜 후에와서 결산을 한다. 그리고 그 한 일에 대하여 평가를 한다. 5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와서 열심히 일을 해서 5달란트를 남겼다고 한다. 2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와서 열심히 일을 해서 2달란트를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1달란트 받은 사람은 1달란트를 그대로 가져 왔다. 남긴 것도 없고 낭비도 하지 않았다. 허비하지도 향락에 사용도 하지 않았다. 주인한테 손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이런 내용을 보면 사업적 결산을 하는 것 같다. "얼마를 남겼는가? 일을 해서 얼마를 남겼는가" 하는 경제적 이익을 찾는 느낌이다. 그러나 주인은 사업적 결산을 하지 않는다. 주인의 평가를 보라! 남긴 것에 대한 관심은 없다. "얼마를 남겼다고,그렇게 많은가? 그것밖에 없는가?" 하는 경제적 이익의 숫자에 대한 질문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주인의 평가는 일군으로서의 자세, 인격이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으로만 평가를 하고 결산을 한다. 상벌도 사업적인 숫자로 평가하지 않는다. 단지,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라, 쫒아 내라!". "같이 살자와 살지 못한다"는 것이 상벌의 내용이다. 주인은 많이 남긴 사람이라고 자립시키지 않는다. 너는 조금 더 있으면 자립을 시켜 준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맡길테니 같이 살자." 주인의 잔치에 즐거움을 같이 나누자 하는 것이다. 철저히 신앙적 결산을 하신다. 신앙적 결산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시다. 그의 백성들은 주인되시고 왕의 명령대로 살기 만하면 된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도 잘살 국민은 없다. 우리가 지금 민주사회지만 여기에도 엄연한 법칙이 있다. 이 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법이 무어냐? 하나님이 법이다. 그 하나님이 살라는 대로 살아야 한다. 이런 백성이 좋은 백성이고 이렇게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백성이 사랑을 받는 것이다. 반대로 주인이요, 왕이 되는 분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죄요, 감옥이요, 죽음이다. 오늘 우리는 1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린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잘 살았는가를 평가하고 결산을 해보자.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고 싶은 것은 신앙적인 결산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평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있다. 2. 신앙적 결산은 어떻게 하는가? 첫째. 얼마나 착한가? 둘째, 얼마나 충성된가 하는 것이다. 1) 얼마나 착한가? 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나는 예수믿는 삶은 착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악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착하다는 말은 얼마나 믿음이 얼마나 있는가? 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착하다 하는 경우를 보라. 할머니들이 아이를 돌보는데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서 얼마나 힘드세요" 라고 물으면 할머니들은 "이 아이는 순해서요" 라고 한다. 그 말은 내 말을 잘 듣는다 하는 말이다. 다른 어른들이 안으면서 "착하지?" 한다. 그 말의 뜻은 "이 아이는 나를 믿어 준다. 그러니 나의 말도 잘 듣는다.", " 착하지?" 하는 말은 "나를 믿어달라 너를 헤치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닌가? 이처럼 착하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은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악하다는 말은 불신한다, 믿지를 않는 것이다.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착한 사람, 착한 동물은 무엇 때문인가? 본래의 성품이 좋아서? 는 아니다. 어려서 우리 아이들은 나한테는 울지 않아도 다른 이들을 보면 울었다. 우리집 개는 주인인 나한테는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와해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납게 짓는다. 그것은 본래의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거의가 착한 사람들이다. 요셉을 보라. 형들이 자기를 팔아 넘겼다. 애굽으로 팔려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안 형들은 자기들에게 원수 갚을까 벌벌 떤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한다. 요셉은 이렇게 착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 욥을 보라. 고난을 받지만 착하다. "고난 중에도 나의 가는 길을 주께서 아시나니 나를 이와같이 단련한 후에는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냥 착한 것이다. 다윗을 보라. 사울 임금이 죽이려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를 용서한다. 착하다. 이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원망도 하지 않는다. 원수를 갚는다고도 하지 않는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는데 털깎는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 같다고 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착할 수 밖에 없다. 여러분은 얼마나 착한가?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은 사람들의 모습과 1달란트 받은 사람의 모습에서 비교해 보라! 어떤 차이가 있나? 바로 가서 일하는 모습과 가서 땅에 묻는 모습의 차이는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이고 믿음과 불신의 차이이다. 바로 가서 일하는 사람은 말이 없다. 언제나 일하지 않는 사람이 말이 많다. 믿으면 착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말이 많다. 생각이 많다. 하나님을 믿지를 않기 때문이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을 보라. 24, 25을 보라.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웠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철저히 불신한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말이다. 심지 않고 거두는 사람이라는 말은 도둑놈이라는 말이다.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이라는 말은 불한당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악한 사람은 믿음이 없을 뿐 아니라. 남의 인격을 폄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까지도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인이 아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부부 지간이라도 "나는 당신을 안다.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알고..." 하며 흥분하는 분들 있다. 진짜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도 모른다. 더구나 남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알아주는 것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알아주는 것보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기를 기뻐하라. 그래야 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내가 너를 다 안다?" 이런 사람은 조심해라! 1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까 염려가 된다. 이렇게 남을 해할 뿐아니라. 자신도 해하는 일이다. 나는 지난 일년동안 돌아보면서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났다.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원하던 일, 원치 않던 일...... 그 때마다 나의 반응은 한가지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를 목사 되게 하시고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원수질 일도 없다. 반대로 누구를 더 가깝게 할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누구와 가깝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해도 많이 받는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신앙이 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고 내 가는 길을 인도해 가시는 줄로 믿는다. 마음 속에 순종하자. 감사하자. 기뻐하자. 이해하자. 하나되자. 사랑하자. 감싸주자. 인내하자.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축복하실 것이다. 불평하지 말자. 비판하지 말자. 오해하지 말자 .반목하지도 말자. 갈등하지 말자. 투쟁하지 말자. 원수지지 말자. 미워하지 말자. 비난하지 말자. 분노하지 말자. 변덕스러워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은 축복을 받지 못한다. 받아도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사도바울은 인생의 만년에 디모데에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느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신앙인은 마귀와 영적 전쟁을 하는 군사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목표이다. 내 명예, 내 재산, 내 가족, 이것을 지켜서 의의 면류관이 아니다. 믿음을 지켜야 한다. 왜?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찬송가> "세상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의 얼굴을 뵈오리라" "내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이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 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하나님은 절대로 날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내 믿음, 내 착함, 그것 보시고 승리케 해주실 줄로 믿는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는 말은 내가 능력자다, 슈퍼맨이다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뜻이 뭔가? 항상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비천해도 풍부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일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나는 "믿음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누구나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서도 잘하기는 쉽지 않다. 당신은 어떤가? 어려움이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다. 원치 않는 일, 상황, 등이다. 문제가 생길 때, 참지 못하고 문제를 삼고 일으키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교회경력은 있어도 믿음은 없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역사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는 것은 (1)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 사랑을 믿는 것이다. 어떤 상황을 당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칼 바르트라고 하는 세계적인 신학자가 있다.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이 분이 미국에 갔을 때, 기자들이 물었다. "당신의 신학 대단합니다. 방대합니다. 오묘하고 깊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많을 걸 연구하고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평생 세계적인 신학자로 내가 성경을 연구해서 깨닫게 된 것이 딱 한가지인데, 하나님 나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녀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착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주권을 믿지 못하면 당신의 믿음은 인정받을 수도 없고 착하지도 못한 신앙인이다. 착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순종할 뿐이다. (2)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내 고통을 아시지요? 도와주세요. 힘주세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는 것은 신앙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의 응답은 늘 더 큰 것으로 (신소걸 목사의 헌금 500만원은 1억원으로 돌아 왔다.)돌아온다. 신앙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다. 하나님의 역사이다. 악한 사람이 되지 말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서는 안 된다. 오늘도 하나님을 믿는 착한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신앙적 결산의 두 번째는 2) 얼마나 충성되는가? 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충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일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일! 즉 내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 가정. 자녀, 부모. 형제. 직장, 어려운 이웃, 까다로운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일들까지도 하나님 나에게 주셨다. 안산제일교회 고 훈 목사님이 지금 투병 중에 계신다. 하나님의 사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 이 분이 병상에서 지은 시 하나를 소개한다. 제목/ 잃은 것과 얻은 것 나는 암으로 인해 내 생애에 중요한 몇 가지를 잃었다. 위 절반, 십이지장, 약간의 췌장과 대장, 체중12키로. 그러나 후일에 다시 찾을 수 있음 엄청난 충격, 나 뿐아니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두려움, 이것은 오직 하나님 손안에 있음. 나는 암으로 인해 내 생애에 아주 소중한 것을 얻었다. 수술과 투병을 통한 고난의 체험 나도 병들 수 있다는 겸손의 체험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준 사람들을 통한 사랑의 체험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아는 변화의 체험 병들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 곁에 다가갈 수 있는 위로자의 체험 날마다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소망의 체험 나는 암으로 인해 약간의 손실은 있었으나 오늘밤 내 생애의 커튼이 드리워진다해도 실로 계산할 수 없는 더 많은 은혜를 얻었다. 하여 고난은 자원하여 받을 이유는 없으나 내게 주는 고난이라면 감사함으로 감당할 일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일들을 통해 나를 축복하시려고 주신 일로 믿으시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 하나님이 주신 일이니까? 이처럼 충성이라는 말은 주어진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주어진 일은 달란트이다. 달란트의 가치는 6000데나리온이다. 하루 품삯이 5만원이라면 자그마치 3억원의 돈이다. 하나님은 엄청난 가치를 주신 것이다. 므나의 비유로 보면 일군들에게 꼭 같이 10므나씩 주셨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다르게 주셨다. 이 두 비유에는 차이가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하시려는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 (1) 달란트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보자. 내가 만든 것은 많지 않다. 시간, 재능, 부모, 자식, 교회.... 같은 시간을 살아도 상황은 다 다른 것이다. 학교입학의 경우 특별한 것 하나만 잘해도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게임만 잘해도. 초등학교를 못나와도 대학교수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시간. 성별, 재능, 환경 등 다다르다. 받는 이에 따라 차별처럼 보인다. (2) 문제는 받은 사람의 선택이다. 예/ 한 남자를 두 여인이 사랑을 했다. 이 남자는 명문대학을 나와 일류기업을 다니는 유망한 청년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것이다. 한 여인은 그것은 손에 문제가 있다. 그만둔다. 다른 여인은 손을 꺼내게 만든다. 아무렇지도 않다? 왜? 그냥 습관상.. 결혼을 했다. 문제는 선택이다. `미국의 샤갈`로 불리는 리버만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여든 한 살에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폴란드 출신인 리버만은 아홉살 때 단돈 5달러를 들고 미국에 이민와서 맨해튼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리버만은 일흔네살에 은퇴한 후 노인정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하루는 바둑 파트너가 약속을 어겨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 봉사요원이 말했다."그림을 그려 보시지요." 리버만은 화실을 찾았고 그 때부터 10주간 교육을 받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나이 여든 한 살 때의 일이다. 화가 리버만은 일약 `원시의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로 불렸고 그림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는 백한 살에 스물 두 번째 개인전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늦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시도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때가 아닌 그분의 때를 깨닫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육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적절치 못한 시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시기를 `하나님의 때`로 삼으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우리의 환경이나 육체의 젊고 늙음은 장애가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3. 신앙적 결산으로 본 일군의 종류 신앙적 결산으로 본 일군에는 4종류의 일군이 있다. 첫째,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이런 사람이 되라. 둘째,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이런 사람이 되선 안된다. 싸워라 셋째, 착하고 게으른 종이다.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극히 이성적인 신앙인이다. 신앙이 아닌 도덕과 윤리정도로 아는 사람이다. 자기 만족에 참 신앙인이 아니다. 열매가 없다. 기적도 없다. 신앙인이 아니다. 충성을 하라! 넷째, 악하고 충성된 종이다.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나 뜻은 안중에 없다. 자기 생각에 충실할 뿐이다. 자기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듣는다. 다 자기에게 이로운 말만을 듣고 일한다. 오늘 우리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결론> 1. 하나님은 신앙적 결산을 한다. 착하고 순종된 종이 되라는 것이다. 새해의 청지기들이 임명을 했다. 많이 바뀌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5달란트처럼 꼭 맞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적성에 안 맞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만은 분명하다. 다 여러분들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어려운 결단이다. 여러분들에게 기대를 한다. 착하고 충성 되라 2.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삶이 되게 하는 일이다. 1) 특별기도회에 많이 참석하라. 가족이 다나오게 하라. 어려서부터 훈련을 시키자. 송구영신 예배에 나오라. 가족이 다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축복이다. 2) 모든 교회가 이런 문제로 고심을 한다.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좋은지? 교회에게 목사님처럼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있다. 설령 이 일로 먹고 산다고 해도 대가를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비라고 한다. 세상 일에 비교해서 적은 것이기 때문에 봉급이라는 말 을 봉급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가 점점 수준이 있는 전문성 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성가지휘, 반주 등이다. 이분들에게도 전문성을 인정 하고 교통비 정도를 드리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에서 자란 이들에게도 교통 비를 주어야 하는가? 한다. 말자. 하면 편하다. 그러나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깨달은 원칙이 있다. 교회봉사는 봉사일 때 축복이지, 대가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업이 있어서 봉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풍족하게 나타나게 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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