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2002-04-01 15:08:41 마태복음 27 : 45-56 // 2002년 3월 24일 미국의 유명한 주간지 피플은 최근호에서 생명의 고리(Circle of life) 라는 제목으로 '크로스'라고 하는 4살 때 미국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사람의 감동스런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크로스는 2001년 10월, 간의 일부를 이식 받지 않으면 6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패밀리얼 아미로이드시스' 라고 하는 간이 단백질 성분을 분해하지 못함으로 체중은 자꾸 줄어들게 하고 시력을 점점 약화함으로서 고통을 안겨주는 희귀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체중은 줄어들고 시력은 깜깜해져가고 죽음의 날만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로시'의 약혼녀가 자기의 친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자기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의 남편은 32살 된 목사 '덕 앤드루스' 라는 분이었는데 그 분이 자기의 간 일부를 떼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크로시'에게 이식해주었습니다. 그 덕택에 '크로시'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은혜에 감동을 받아 자신도 자기와 같이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간 이식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간 이식 자를 애타게 찾던 중 중국계 이민자 '릴리 쳉' 에게 이식을 해주었습니다. 피플지는 그 감동적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백인 목사- 한국계 입양아-중국계 여성'으로 이어지는 미담을 '역사적인 장기 기증 릴레이' 라고 평가했습니다. 미담의 첫 번째 주인공인 앤드루스 목사는 "수술 뒤 회복기간이 길어 적정했지만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고통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 있는 고통, 가치 있는 희생을 통해서 또 다른 두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는 축복, 그것은 누군가 대신한 고통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돈을 버는 것,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면 얻어질 수 있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는 것, 역시 노력하고 평소에 인간관계를 잘 맺으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받으셨고, 내가 받아야 할 고통, 내가 받아야 할 단절의 아픔을 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절대고독과 처절한 단절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정오까지 십자가에 못 밖히셔서 세 시간동안 십자가에 달리셨고, 다시 세시간이 지나서 제9시, 즉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귀한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일 중에 최고 절정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시간이 지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시간이 더 지날 무렵에 하나님의 아들이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십니다. 한 생명이십니다. 한 사랑으로 묶여져 있는 일체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외치시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의 위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때의 그 고통을 시편 22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촛 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받은 겁니다! 이 사건은 누구에게나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가장 고통스런 그 순간에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저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을 제가 굉장히 사랑합니다. 17살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그 아들을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 분신이요, 제 목숨처럼 사랑합니다. 이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것이 제 심정입니다. 그 아이가 잘되는 일이라면, 주님이 들어 쓰는데 필요하다고 하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정말로 아들을 사랑합니다. 제 아들을 다른 천하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바꾸자고 해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나에게 주며 바꾸자고 유혹해도 저는 제 아들을 그것과 바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내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분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저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있고, 악한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아들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평범한 사람도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 성자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은 제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 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버리셔야만 했습니까? 아니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왜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여러분들과 저를 사랑하셔서 그의 성자를 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과 나, 죄 많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저주받은 나,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나, 쓰레기만도 못하고, 벌레만도 못한 그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측량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는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죄 많은 나를 대속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단절의 아픔과 고통스런 절규는 성부 하나님께서 바로 내가 받아야 할 그 형벌과 죄 값을 그의 아들에게 대신 지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사,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사 그토록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이 사랑이 이해가 되십니까? 믿어지십니까? 여러분 속에 지금 경험되십니까?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아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였습니다. 신앙생활도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그만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유명한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니며 치료를 시도합니다.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대학생 형제 자매들에게 광고를 해서 단체로 헌혈을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부모님의 눈물겨운 노력과 성도들의 기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헌혈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16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죽음은 지켜보는 우리들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하물며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얼마나 큰 아픔이요. 슬픔이었겠습니까? 아이를 세상에 보내고 얼마 후에 교수님이 학생들이 드리는 예배시간에 나오셔서 인사를 하면서 짧은 간증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제 아들을 먼저 보내면서 깨달은 중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동안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식으로는 알았습니다. 교리 적으로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피부로 느껴지거나 경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죽음에 넘기 우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사랑한 그 사랑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버림으로 대신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십자가상에서 못 밖히신 주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의 일체이신 분이셨으나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과 단절되셨고, 하나님도, 사람도, 하늘도 땅도 외면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을 맞이하여야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이 예수님으로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가장 필요로 할 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때에는 성부 하나님은 그에게 계시지 않았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녹슨 못에 박히시는 아픔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군병들이 조롱하고 백성들이 비웃는 비웃음의 고통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토록 죽기까지 사랑한다고 따랐던 제자들의 배반의 고통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병 고침을 받은 사람, 떡 얻어 먹은 사람, 나사로 같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외면의 아픔을 무어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아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고통은 언제나 함께 하셨고, 사랑하셨고, 당신을 온전히 계시해주셨던 성부 하나님이 죽음의 쓴잔을 마시며 고통해 할 때는 정작 함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절규하는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왜 우리 주님이 그토록 단절과 고립과 고독의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하였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 우리가 받아야할 그 형벌을 그 순간 예수님께서 온통 짊어지시고 담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자 마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세상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값을 대신 당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칭 메시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 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신 죄 값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죽음에 넘겨져야 합니다. 대속 적인 죽음도 없는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 대속 적인 죽음을 당한다 하여 죽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 죽음이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는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가 다시 산 자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고, 권능으로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기에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막힌 담을 허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버렸습니다. 51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인간의 죄악 때문에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담이 있었습니다. 그 담이 바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입니다. 죄인은 휘장을 지나 주님의 보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죄의 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죄의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어나니 그 길은 우리를 휘장 가운데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생명 적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 회복의 표적이 그 즉시 벌어졌습니다. 51절과 52절을 보십시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사단에게 메여 있는 자들이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직접 대면할 수 있습니다. 직접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을 위해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도에서 선교를 활동을 하던 선교사 한 분이 뇌출혈이 생겼습니다. 전신에 마비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거기서 기도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제물 삼아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하고 기도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낳을 것을 믿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건강해 질 것을 믿습니다. 마귀의 자식된 몸이 다시 풀려질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물 삼아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일년만에 완전히 회복이 되어서 다시 인도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충성을 다해서 사역을 합니다. 그가 고백하는 말이 "내 인생의 마침표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 내 인생은 중단이 없다." 끝까지 충성을 다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인도에서 성자소리를 듣는 스탠리 존스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예수님 때문에 찬양할 수 있게 된 것, 예수님 때문에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것,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충성할 수 있는 것, 예수님 때문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 그것들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절대로 멀리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마다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 성도님들은 두 번 태어나서 한 번만 죽습니다. 한번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나고 또 한 번은 물과 성령으로 영혼이 중생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한번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영혼과 분리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어머니 태로부터 태어난 그 한번의 출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두 번의 죽음이 있습니다.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이요, 영혼이 영원히 심판을 받는 사망을 또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그 날 진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위가 터졌습니다. 사망의 무덤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나 증거 하였습니다. 생명 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광경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즐겼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가 보자,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는가 보자 하면서 즐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했던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그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과 그리고 함께 있었던 연약한 여인들, 그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보았습니다. 죽음의 쓴잔을 마시면서도 원망하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외치시면서 운명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을 보면서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아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피에 적시는 영혼이 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이 시간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죄의 몸에 대한 죽음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요, 그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사죄하는 은총도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흘린 보혈이 여러분의 심장을 적시고 영혼을 적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십자가의 피에 적셔진 사람입니다. 미우라 아야꼬의 양치는 언덕의 소설의 주인공 나오미는 목사님이신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료히치라는 바람둥이 청년과 결혼을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하자마자 료히치는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삽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남편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나오미는 별수 없이 친정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서 남편을 잊을만 하였을 때 남편 료히치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자신을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부정한 자를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아버지는 딸을 설득해서 결국 료히치를 받아들입니다. 처갓집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동안 료히치는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술도 끊고, 방탕한 생활을 끊습니다. 건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료히치는 시간만이 있으면 다락방에 올라가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나오미가 "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고 물으면 료히치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크리스마스 때 완성이 될 텐데 그 때 보여주겠다" 고 말을 합니다. 어느 날 안식과 평강을 되찾은 행복한 료히치에게 어떤 여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만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사양을 해도 계속 요구하니까 그럼 한번만 만나겠다고 하면서 만났습니다. 여인이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그럴 때마다 료히치는 대답합니다. 나는 옛날의 료히치가 아닙니다. 하루밤만 잠을 자고 가라고 애원을 해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료히치에게 여자는 또 요구합니다. 그러면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이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헤어지자고 합니다. 헤어지기를 원해서 료히치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여인이 거기에 독약을 탄 것입니다. 나오미가 남편을 장사지내고 다락방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그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밖히시는 예수님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십자가 밑에 고개를 떨구며 울며 기도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가만히 보니까 료히치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십자가의 피를 맞으며 회개하며 사죄의 은총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외쳤습니다. ' 자가의 피에 적셔지는 영혼은 아름답다. 료히치는 아름답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란 말입니까? 미인도, 배우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에 영혼이 적셔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예수의 피로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흘린 주님의 피가 지금 여러분의 영혼에 적셔지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이 되고, 생명의 고리가 되어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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