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2002-04-15 16:24:55

요한복음 2:23 - 25절 // 02/04/14

가정사역자들은 자녀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있어서 무조건 규제할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실천하도록 당부합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이 그 날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미리 상의하거나 부모가 추천하는 프로그램을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요즘 저희 집 아이들이 텔레비전 시청하는 것에 대해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사역자들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환경적으로도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나 저의 아내는 단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하되 시간을 정해놓고 보도록 하고, 그 외 시간은 텔레비전을 끄게 합니다.

그런데 아직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인지 가끔씩 저나 제 아내가 없을 때,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한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했던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아이들이 저나 아내가 없을 때 텔레비전을 시청했던 사실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켜보면 압니다. 켜보면 채널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바뀌어져 있을까요? 만화만 나오는 채널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분명 나갈 때는 그 채널이 아닙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보면 채널이 만화 나오는 채널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엄마 아빠가 없을 때 텔레비전을 보았는지 묻습니다. 물론 저희 집 아이들은 "보았노라"고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대신에 아이들의 말을 빌리면 "딱 한 개만 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말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은 그게 신기한 모양입니다. 집에 있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텔레비전 시청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좀 어디가 모자란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아니 순진하다고 믿고 싶습니다) 아뭏튼 아이들은 저희들이 없을 때 일어났던 일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말하는 저와 아내를 보면서 참 신기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신기할 것도 없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아이들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채널이 바뀐 것을 보고 알았다고 말한다면 아이들은 다음부터 텔레비전을 끌 때, 원래 채널대로 바꿔놓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들 수준에서 볼 때, 신기한 것이지 조금만 더 성장한 학생들이나 어른들의 수준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 날 아이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지 않고 아이들이 행한 일에 대해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채널이 바뀌어 있다는 것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내가 누구며, 어떤 성격의 소유자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며,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일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놀랄 일이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신기한 일까지 눈앞에서 펼쳐 보인다면 결코 예삿일로 넘길 수는 없습니다. 예삿일로 넘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한 사람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3절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거기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 그리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 쫓으시고 상을 뒤 엎으셨습니다.

이 당시 성전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이며,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제사가 드려지는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누가 감히 난동을 부릴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청와대에서 누군가가 상(床)을 엎었다면 가정을 해봅시다. 도대체 누가 상(床)을 엎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입니다. 미친 사람이든지 아니면 청와대의 주인인 대통령이든지…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렇게 했다면 그 두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청와대에서 어설프게 상(床)을 엎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엎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엎을 수 있겠습니까? 하기야 우리는 집안에서조차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남자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 시대에 만약 자신이 집안의 가장(家長)이랍시고 상을 엎었다가는 그 날로 쫓겨나는 아주 불행한 일을 초래할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이렇듯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집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런 말이 바르게 들릴리 만무입니다. 단지 그들도 생각하기를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는 이 사람도 둘 중에 한사람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미친사람이든지 아니면 예삿인물이 아니든지…

그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삿인물이 아니라면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했던 표적이란 깜짝 놀랄만한 아주 신기한 일, 즉 보통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일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을 받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성전을 헐라는 것과 그 성전을 사흘동안에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46년이란 세월동안 지었고 아직도 공사가 다 끝나지 않은 이 튼튼한 성전을 자신들이 헐 것이며, 또 설령 헐었다 할지라도 이 거대한 성전을 사흘동안에 일으키겠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보이려고 하셨던 표적은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어떤 신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를 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적의 진정한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표적 그 자체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주님이 표적을 행하신 목적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징징거리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표적을 행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계획아래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주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어떤 표적을 행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이름을 믿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발휘하신 큰 능력을 보고, 선지자로 혹은 메시야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에게 굴복시켰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요한복음 1장 12절에 나오는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과 여기서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지나서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니그데모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오게 한 것도 결국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3장 2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굴복시킨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믿는다는 것과 자신의 마음을 그분 앞에 굴복시킨다는 것은 별개입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를 예수님께 나아오게 했던 동일한 기적들이 다른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보이시는 기적이 사탄의 힘을 빌어서 행하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주께 맡기거나 신뢰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께서 친히 그들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주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자신들의 마음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 앞에 자신의 마음을 굴복시키지 않는 것은 이들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아니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마음의 중심을 주께 굴복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오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고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의 상태로 나왔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부담감 없이 나오고 싶어합니다. 그저 마음이라도 좀 편해지기 위해서 나오려 한다거나 현대생활의 두려움이나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어떤 부담감도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부담을 느끼지 않겠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오기는 하지만 마음을 전적으로 주께 맡기거나 굴복시키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드린다면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하는 것도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교회를 정하려 하려 합니다. 교회생활도 편하게 하기 위해 예배만 드리고 더 이상 발을 안으로 들여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결과로 인해 대형교회는 점 점 대형화 되어가고, 개척교회는 교인이 없어 허덕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 주 5일째 근무가 실시된다는 것 때문에 교계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 5일째 근무가 실시되면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가족단위로 야외에 나가버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우려에 앞서서 교계가 먼저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반성입니까? "왜 성도들을 이토록 연약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그분께 자신의 마음을 맡기고 신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 5일째 근무가 실시되면 주일을 지켜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그분을 예배하기보다는 야외에서 자연을 벗삼아 지내려는 마음을 먼저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 정도도 극복할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을 갖게 했다면 이것은 우려할 것이 아니라 반성할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는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나 주 5일째 근무가 실시될 때, 야외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때가 되면 여유가 있든, 여유가 없든,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남으로 교회로부터 이탈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것과 자신의 중심을 주께 맡기고 그분께 굴복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해서 곧 자신을 주께 굴복시키거나 마음의 중심을 주께 의탁하고 맡기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들 중에 신앙생활을 부담없이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반성해야 합니다. 편하게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 앞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마음상태가 어떠한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의 이름은 믿었지만 결코 자신의 마음을 주께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주님께 의탁함으로 말씀 안에 거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그분의 이름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 자체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까? 그분께 나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굴종이 아니라 그분께 나를 맡기고, 그분 앞에 순종하는 것이 신뢰의 시작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알고 계십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의 이름은 믿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아무런 변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믿었다'는 단어와 24절에 '의탁하다'란 단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믿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상태가 어떠한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전혀 변화나 요동이 없는 그들의 상태를 주님은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주를 믿는다고 말한다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주께 나를 맡기고 그분을 진심으로 신뢰하며 주안에서 거룩한 믿음의 부담을 갖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물을 차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나오셨습니까? 변화를 갈망하면서 나오셨습니까? 주께 나의 마음을 드리고 내 생각도 그분께 굴복시키려는 자세를 가지고 이곳에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편하게 부담없이 한번 예배를 드리려고 나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상태가 어떠한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만약 저나 여러분이 주님 앞에 거룩한 부담을 가지지 않고 편하게 예배드릴 양으로 나왔다면 주님도 결코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나 자신부터 먼저 변해야 합니다.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마음의 변화나 동요가 없다면 그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 일뿐 주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분을 믿는다고 말할 때에는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모든 것을 신뢰하며 내 마음을 그분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크게 실망을 하실 것입니다.

물론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된 수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남에게 지기 싫어서 행하는 것이거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의 중심은 여전히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주를 알지 못했을 때의 습관이나 주장 이런 것들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주님도 결코 우리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으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신 까닭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부르실 때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알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수가성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지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또 자기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 배반하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회개의 심정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다락방에서 설교하실 때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과 근심도 아셨습니다.

그런 분이 지금 이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속에 있는 것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25절에도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감추고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감추면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수 십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와 남편사이라 하더라도 감추고, 말하지 않으면 그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생겨난 말이 무엇입니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들의 속에 있는 것만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에 있는 것도 훤히 들여다보십니다. 아니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삶의 방식을 쫓고 있으며,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아내나 남편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아십니다.

오늘 본문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들로부터 아무런 증거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자들의 증거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할 뿐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자식을 볼 때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애비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집 자식인지 집안 꼴을 알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결국 그 집의 가장인 아버지를 향한 비난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심을 주께 드리지 않는 사람, 수 십년동안 믿었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 이런 자들의 증거는 오히려 주님의 사역에 큰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사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많은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위해 친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표적도 보이시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그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이 집은 내 아버지의 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만 의지할 뿐, 그분 앞에 변화된 자신의 삶을 결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았지만 결국 주께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굴복시키지 못한 모습 때문에 훗날 그들은 주를 반대하는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48절을 보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을 결단하지 않고 기적만을 원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분의 생명에 참예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게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그런 방법으로 시작해서 믿음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생명에, 혹은 영생에 참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잘못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과 주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 결단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그 정도의 믿음이라면 주님은 우리로부터 아무런 증거도 받으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주님을 동정하려는 태도와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 참석하는 것을 가지고 굉장히 유세를 부립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생각이 주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도 영광을 얼마든지 받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예배를 드려줌으로 무언가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로부터 아무런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변화가 없는 삶, 중심을 주께 드리지 않는 삶의 태도를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 자들로부터는 그 어떤 증거도 받으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되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이름만 믿는 신자로 남아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삶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중심을 주께 드리고 그분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길이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제 주님 앞에 나를 숨기려 하지말고 나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어 주님 앞에 여러분의 삶을 결단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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