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메모 2002-05-03 17:36:29 잠언 14:30-32 오늘은 잠언 14장 30절에서 3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성경의 메모"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메모라는 말을 순수 우리말로 하면 비망록이라는 말입니다. 비망록이라는 말보다는 우리가 메모라는 말을 더 많이 쓰기 까닭에 메모라는 말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메모라는 말은 memorandum을 줄인 말입니다. 비망록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꼭 지켜야 되는 것 꼭 필요로 하는 것을 기록해 두는 것입니다. 비방록을 보고 지켜야 될 것은 지키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지 않고 오래 기억해야 될 것은 기억합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을 비망록에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메모해 두는 사항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메모해 둔 것을 늘 참고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성경전체가 비망록이겠지만 잠언 14장 30절에서 32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우리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 꼭 있어야 되고 지켜야 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말씀을 따라 이 시간에 "성경의 메모" 혹은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이 중요하다고 메모해 준 것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마음의 건강 (30) 사람에게는 마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음이 병들면 그 사람의 생활이 병들고 그 사람의 인격에 병들고 그 사람의 말도 역시 병이 들고 전체가 병이 들게 됩니다. 마음의 병이 들었던 사람이 고치고 건강함을 얻으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계획이 나옵니다. 마음이 병들어 버리면 생각과 모든 계획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찬송가 197장을 보면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주사 굳세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마음이 담대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아들은 가인과 아벨 둘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라고 하는 두 아들만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아담의 아들이 열명이었는지 백명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대표적인 아들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한날 한시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쁘시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형 가인은 '내가 다음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리겠다'라고 마음을 다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고 동생의 제사는 받으니까 성경에 기록하기를 '심히 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일 생각까지 합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병든 마음이기에 동생에 대해 분을 내고 미워합니다. 오히려 '내가 동생보다 더 좋은 제사를 드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마음이 아닙니까?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끝내는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은 병든 마음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시기 혹은 투기 내지는 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시기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이 잘 되면 절대로 봐 주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잘 못했습니까? 나 보다 잘 했으니까 잘 된 것이 아닙니까? 건강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래 나는 너 보다 더 잘 해 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너는 나 보다 훌륭하다, 더 잘됐다'하여 샘을 내고 못 봐 주고 미워하고 나중에는 죽입니다. 시기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파멸을 초래하는 마음의 큰 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0절을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시기는 자기의 뼈를 썩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기심은 가질 수록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멸하게 만듭니다. 남의 무덤을 파는 것 같으나 내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시기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큰 병입니다. 이것을 고치기 전에는 마음이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네가 나 보다 공부를 잘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는 여느 때 너 보다 한시간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앞서겠다'라고 생각해야 건전한 경쟁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공부를 덜하면서 '실력은 네가 나 보다 낫다? 내가 그 꼴을 못 봐 주겠다'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음의 화평'이라고 하였습니다. 화평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주님 나를 치료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치료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여호와 라파 여호와 라파'에 나오는 라파라는 단어로서 치료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 성경에 마음의 화평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병들어 있는 것을 치료하니까 마음이 평안해 진다는 것입니다. 네가 잘 되는 것을 못 봐 주고 배 아파하던 내가 그 마음을 치료한 결과 그 마음이 화평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리켜서 마음의 건강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절대 시기하지 마십시오. 질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 뼈를 섞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하십시오. 육신의 생명이 됩니다. 그 결과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음의 건강을 메모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탐심이라고 하는 사람과 시기라는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 두 사람 앞에 도인 같은 노인이 나타나더니 "너희들 중에 무엇이든지 나에게 먼저 이렇게 해 달라 혹은 저렇게 해 달라고 구하는 사람에게 구하는 것만 꼭 주겠고 참았다가 둘 중 나중에 구하는 사람에게는 처음 구하는 사람의 갑절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탐심이라는 사람이 먼저 구하겠습니까? 절대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구해야 내가 너 보다 갑절을 받기 때문입니다. 샘이 많기로 유명한 시기 질투라는 사람은 네가 갑절이나 받는 꼴을 못 본다고 생각하여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먼저 구하겠습니까? 서로가 구하지를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시기라는 사람은 오래 참지를 못합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아파하며 못 참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가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할아버지!" "왜?" "내 눈 하나를 빼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탐심이라는 사람에게서 눈을 몇 개를 빼겠습니까? 시기라는 사람에게서는 눈 하나만 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탐심이라고 하는 사람은 눈 몇 개를 빼야 합니까? 두개다 빼야합니다. 시기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시기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마음의 큰 병이요, 파멸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뼈의 섞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시기 질투라고 하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마음이 건강하게 살면 생각도 건강해 지고 인격도 건강해 지고 생활도 건강해 질 것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의 존귀 (31) 이 말씀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은 존귀하다, 또는 사람을 귀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어느 부자의 두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살아 생전에 유산을 달라고 매일같이 요구하지 않습니까? 하두 간청을 하니까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그것을 정리해서 멀리 멀리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서 그 재산을 모두 허비하고 맙니다. 외국에 나가서 빈털털이가 되었으니 살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체면을 불구하고 살길은 아버지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돌아오는 거지꼴 된 아들을 뛰어나가 맞으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보게 되면 성공하고 오는지 망하고 오는지 알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그 때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성공을 어느 아버지인들 원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망하고 실패했다면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 성공과 실패보다 더 귀한 것이 아들이었습니다. 성공이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더 귀한 것은 아들 자신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가졌느냐 하는 문제로 사람을 따지고 차별하면 안됩니다. 얼마나 가졌다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 자체인 것입니다. 못 가졌다고 해서 절대 깔보지 마십시오. 사람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하나의 값어치를 말씀하실 때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온 천하를 얻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네 목숨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온 천하를 가졌다고 내 목숨이 귀하고, 온 천하를 못 가졌다고 내 목숨이 천해집니까? 그런데 사람은 꼭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자본주의의 특성입니다.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합니다.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아예 사람 자체를 달리 봅니다. 나보다 작디 작은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만 그런다면 모르겠지만 믿는 사람도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아파트 평수와 상관없이 사람은 귀합니다. 얼마나 배웠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사람 자신입니다. 내 자리가 얼마나 높으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아주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막론하고 절대로 사람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똑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진 것으로 혹은 배운 것으로 또는 그가 앉은자리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면 안된다고 성경은 메모해 줍니다. 사람은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 똑같이 존귀하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똑같이 귀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사람은 똑같이 귀중합니다. 사람 귀한 줄로 알고 사람을 귀히 여기라는 것이 성경의 메모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라고 했는데 가난한 사람을 학대할 이유가 없는데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멸시를 하고 학대를 합니다. 그 결과는 그 가난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귀하다 하고 지어 놓았는데 돈 몇 푼을 나는 더 가졌고 너는 못 가졌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멸시하고 깔본다면 하나님 앞에 망할 짓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시지 않습니다. 절대로 돈 몇 푼 더가지고 덜 가진 것을 가지고 사람 차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절대 학대하거나 멸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가난과 상관없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은 오히려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사람 차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 되신 분들은 내 딸과 며느리를 차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딸 된 사람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차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내 딸과 며느리를 차별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잘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시집가서 제 살림하는 내 딸, 시집와서 나를 받들어 주는 며느리를 왜 그렇게 차별합니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존귀합니다. 오래 믿어서 내가 무슨 직분, 무슨 직분을 맡았다는 것 때문에 이제 겨우 예수 믿고 세례 받고 구원받은 초신자를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신앙의 교만처럼 교만 중에서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아껴주고 그의 믿음을 위해서 도와주고 그를 붙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어리다고 왜 무시합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돈 몇 푼 못 가졌다는 것 때문에 못 가진 사람을 멸시하지 말아라. 그것이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있느냐 불쌍히 여겨 도와 주라. 그 결과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결과가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절대 사람차별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시고 어디 가서나 사람을 존귀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인간 자체를 존중히 여기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신자의 소망 (32)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긍휼 까닭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다고 한 것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기 까닭에 우리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괘씸죄에 걸리면 그 인생은 끝이 납니다. 괘씸히 여기신다면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서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살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을 하지 못하셨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롭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었다가 부활하는 날에는 바로 예수님의 몸과 똑같이 부활하기 까닭에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으로 끝내면 우리의 부활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의를 나에게 주사 나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백성 삼아 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케하시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거듭남 때문에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당당하다 할지라도 죽음으로 그 소망이 끝나는 죽은 소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어도 부활까닭에 그리고 거듭남까닭에 산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항상 소망 중에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2절을 보면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환난이 닥쳐오면 엎드러지고 끝나고 맙니다. 아무리 환난이라고 해도 죽는 것 이상의 환난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이 닥쳐오면 죽는 것으로 엎드러지고 끝이 납니다. 엎드러지고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즉 믿는 사람은 죽어 죽어 할지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죽어라 죽어라 하는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지경에도 소망을 가지십시오. 거기에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유로 심지어 죽는다고 할지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죽을 지경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라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소망이 있다. 항상 소망 중에 살아라'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메모해주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장미나무에 가시가 많습니까? 없습니까? 많습니다. 또 가시나무에 가시가 많습니까? 없습니까? 많습니다. '가시나무를 심는 자는 장미꽃을 기대하지 말라'고 펄페이라는 사람의 한말이 있습니다. 가시나무와 장미나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겉은 비슷해도 종류가 다릅니다. 가시나무를 심으면 절대로 그 가시나무에 장미꽃이 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시가 많은 장미나무를 심어 놓으면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납니다. 믿는 사람의 소망은 장미나무와 같고 믿지 않는 사람의 소망은 소망이라는 말 자체는 같지만 가시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소망은 장미꽃 나무와 같아도 세상을 향한 소망은 가시나무와 같습니다. 우리가 가시나무를 심으면서 장미꽃을 바라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장미나무를 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세상에서도 하늘에서도 장미꽃이 핀다는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까닭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까닭에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 중에 살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시기 질투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큰 병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봐주지를 못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은 지키기 쉽지만 웃는 자와 함께 웃으라고 하는 말씀은 너무 힘든 말씀입니다. 질투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큰 병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이 병을 치료하고 마음의 건강, 마음의 화평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람은 존귀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보다 또는 얼마나 가졌느냐 하는 것 보다 사람 자체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차별을 하면 안됩니다. 내 딸과 내 며느리를 차별하지 마십시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차별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다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믿는 사람에게는 죽을 지경에 이른다 해도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 중에 항상 살아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은 부활로 통해서 일으켜 세워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성경이 메모해 주는 바를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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