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산 운명의 날 2000년 9월 28일
2002-05-21 13:59:46



예루살렘의 이른 아침은 깊은 인상을 마음속에 안겨 준다.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눈부신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사이프러스나무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다윗왕도 솔로몬왕도 맛보았을 예루살렘의 향취에 가슴은 감격으로 가득 찬다.

지금부터 20개월전,2000년 9월28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에 아침이 밝았다.그 날 아침 7시30분 당시 이스라엘 야당 ‘리쿠드’당의 당수 ‘아리엘 샤론’이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랐다.그는 그 곳에 약 15분간 머물렀다.이른 아침 잠깐동안 이루어진 그의 성전산 방문이 이스라엘 정치에 태풍을 몰아오고,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래로 최악의 중동사태를 불러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마치 시한폭탄 뇌관에 불을 붙인 듯,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흥분한 그들은 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그리고 총을 쏘며 저지하는 이스라엘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아랍인들의 대규모 항거운동(인티파다)이 시작된 것이다.이렇게 시작된 ‘인티파다’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아랍측 쌍방에 약 2000여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동안 사태는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왜 이스라엘 야당 당수의 성전산 방문이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 문제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에게 성전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성전산’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던 자리로서,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오늘날도 그 곳 위로는 비행기조차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게 여긴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산은 아랍인 이슬람교도들에게도 3대 성지가 된다.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가 지상의 삶을 끝내고,백마를 타고 승천한 장소가 바로 그 곳이라고 믿는다.그들은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밟았던 마지막 발자욱의 흔적까지 그 곳의 바위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고,그 곳을 ‘하람 에스 샤리프’라고 불러왔다.‘고귀한 성역(聖域)’이라는 뜻이다.이스라엘 사람들과 아랍인들이 그 곳을 성지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각각 다르고,부르는 이름조차 같지 않다.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지역이 서로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지 중의 성지라는 점이다.

그러면 성전산은 누구의 땅이라고 해야 옳은가? 이것은 3000년의 긴 역사와 뒤엉켜져 있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그리고 예루살렘 원주민으로부터 훗날 성전 건축의 대지가 될 땅을 매입했다.다윗왕이 지불한 땅 값이 구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사무엘하권에는 은 50세겔이라고 되어 있다(삼하 24:24).그런데 역대기에는 그보다 훨씬 큰 금액인 금 600세겔로 기록되어 있어 값의 차이가 엄청나다(대상 21:25).땅값으로 지불한 돈의 정확한 액수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그러나 여하튼 다윗왕은 원주민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했고 그 장소 위에 다윗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왕은 성전을 건축했다.그곳이 바로 ‘성전산’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다윗왕이 성전산 지역을 돈을 주고 샀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다윗왕의 후손이 되는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산의 소유권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이다.그러나 구약성경의 기록이 오늘날 소유권 분쟁 해결에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고,아랍인들은 그런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한다.

서기 7세기 중엽,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그 후로 줄곧,십자군 시대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성전산 지역의 주인이 되어 왔다.

그러던 중,지금부터 35년전인 1967년 소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이스라엘측은 이 전쟁에서 성전산 지역 ‘탈환’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이스라엘 최정예 공수부대가 예루살렘 전투에 투입되었고,치열한 전투 끝에 성전산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이 때,이스라엘 병사들의 얼굴은 땀과 감격의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장장 1300년만에 유대인들이 성전산을 다시 차지한 것이다.이스라엘측은 즉시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국토에 합병(合倂)시킨다고 선언했다.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측의 일방적인 선언일 뿐,지금까지도 성전산 지역은 여전히 아랍인들의 관할권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 극단적인 과격파들은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그들은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성전산 위에 있는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폭파시키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사람들이다.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22개 아랍동맹국가들은 물론이요,이슬람국가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57개 국가들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에 보복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이스라엘측은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고,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될 수가 있다.이것은 단순한 가상의 시나리오만은 아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랍측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야당 당수 ‘샤론’은 경호원과 세계 언론에 둘러싸여 방문한 것이다.그의 ‘전시용’ 행적은 그동안 비교적 잠잠했던 중동 사태에 불을 붙였고 혼란의 극으로 치닫게 했다.그러나 이 일은 ‘샤론’이 이스라엘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성전산 방문은 정치인 ‘샤론’의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행보였던 것이다. (계속)

박준서<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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