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2002-05-23 15:55:27



본문 : 사도행전 18장 1-11절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0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03 업(業)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0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0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0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0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0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0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하루 중에도 낮과 밤이 있고 십리 길도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있듯이, 우리 성도들이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에도 형통한 날이 있고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전도서 7:14절을 보면 좬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좭고 말씀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형통한 날만 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형통한 날만 주신 것이 아니라 곤고한 날도 아울러 주셨습니다. 이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되는 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형통한 날만 계속된다고 하면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현상유지되기도 어렵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업이 잘되어 돈도 잘 벌고 애들도 공부 잘하고 온 식구가 건강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기도할 제목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아 성장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만사가 형통하다 보면 기도를 하긴 해도 간절히 기도할만한 제목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교만해지고 방자해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신앙적으로 해이해지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에는 누구나 고민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다보면 은혜를 받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충성하지 못한 것과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 그리고 감사생활을 온전히 하지 못한 것 등등 하나님 앞에 오만방자하며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고 바르게 살기로 결심하게 되며 충성하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곤고한 날이 오면 당장은 괴롭겠지만 우리의 신앙에는 오히려 유익하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십니까?
만사가 형통한 가운데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하며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반대로 곤고한 중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생각나거든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죄가 떠오르지 않고 죄 때문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셉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하루아침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것과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요셉이 갖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잘 참고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창세기 45:8절에서 자신의 형님들을 향해 좬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좭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형님들이 자신을 미워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았을지라도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며, 다만 형님들은 그 일에 심부름한 것뿐이라는 설명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전화위복이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좬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좭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창 50:20).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아무리 인간들이 죽이려고 하고 해치려 해도 하나님께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애매히 당하는 고난 중에 있으시다면, 요셉처럼 참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나아간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생각하며 인내할 때 주님의 모습을 닮게 되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인격자가 되며 신앙이 더욱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군신자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왔을 때에 좬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좭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도바울의 심정이 대단히 찹찹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고전 2:3).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워 떨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없을 때에, 욥처럼 사단에게 내어주신 것처럼 느낄 때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실패했을 때에, 육체의 가시가 있어 괴롭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지 못할 때 죽음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더구나 아무리 기도해도 도무지 응답이 없고 마치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이키시고 외면하신 것만 같을 때에 두렵고 떨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말씀해주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를 앞두고 바울의 마음이 두렵고 떨린 이유는?
1. 아덴에서의 전도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도한 지역 가운데 가장 성과가 없었던 곳은 지금의 아테네인 아덴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의 전도하는 광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그곳에 있는 지식인들과 철학자들과 변론자들을 굴복시킬 생각으로 그 동안 배운 학문과 철학을 총동원하여 유창한 말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열과 성을 다해 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 별로 나오지 않게 되자 그의 마음이 우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전도자가 유의 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전도는 말로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전도에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욕심과 교만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욕심이 앞서면 실패합니다. 전도자는 항상 기도하면서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유창한 말로 그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시면 택한 백성을 만나게 하실 것이고 복음이 증거되게 하셔서 믿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면 밥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실패하게 되면 밥맛도 없고 잠도 잘 안오고 잠을 자도 피곤하고 마음이 답답합니다. 아마 사도 바울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 고린도에서의 전도가 아덴보다 더 어려워보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항상 분비는 곳이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교통의 요충지는 가장 문화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며 죄악이 관영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학문의 도시인 아덴에서도 전도의 열매가 없었는데 이 죄악의 도시 고린도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울의 마음이 매우 답답하고 우울했을 것입니다.

3. 바울의 형편이 매우 곤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동행해주었던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겨두고 혼자 전도여행중이었습니다. 사실 어려울 때 믿음의 동지는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낼 때 둘씩 둘씩 짝을 지워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서로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짝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좋은 믿음의 짝을 만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상 “주님! 좋은 신앙의 동지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외로움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바울은 수중에 가진 돈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곤고한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부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은 유대인으로 장막제조업자였으며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좋은 동지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바울을 도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나 잘 도와주었으면 사도 바울이 좬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좭고 했을까요(롬 16:4).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저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케네디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가 알고 있는 주위의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이 뉴욕에 가면 언제든지 그분들의 집에 부담없이 머문다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이 특별히 무엇을 잘해주어서가 아닙니다. 호텔비가 무척 비싼 뉴욕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거처를 제공해주고, 그들이 먹는 대로 먹고, 단 며칠이라도 자기 집처럼 편히 지내다가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그들 부부의 마음이 귀한 것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볼 때 우리 교회가 급성장할 때마다 돕는 천사들을 보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불같이 일어나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기하급수적으로 성도의 수가 불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군신자들을 보내주셔서 오늘날과 같은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눈에서 눈물이 나오다가 피가 나올 정도로 저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주는 성도님도 있었습니다.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저의 목회에 돕는 천사가 되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들 부부처럼 하나님의 종을 잘 돕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종을 돕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돕는 일은?
1. 순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7절을 보면 좬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좭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즐겁게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순종하며 도와야 합니다.

2. 주님을 대접하듯 대접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절을 보면 좬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좭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40절을 보면 주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좬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좭고 하셨습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종을 돕는 사람이 어찌 축복받지 않겠습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언제나 설교를 들을 때 얼마나 유식한가 그렇지 않은가? 말을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표면적인 것들을 따지지 말고 “하나님의 종을 통해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자세로 말씀을 경청하는 성도처럼 하나님의 종을 기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3. 위로하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좬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좭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환상은 바울에게 있어서 수십 개의 사단 응원군보다 더 큰 힘이 되는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는 주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상상외로 전도의 열매가 많이 맺었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지 승리의 결과를 미리 안다고 하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감옥에 가면서도 그처럼 태연자약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통해 이미 결과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누구보다도 시험을 잘 견디던 욥이 도중에 낙심한 것은 결과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해주심으로 해서 욥은 마침내 큰 시험을 이겨내고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 약속을 이미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에서 좬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좭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에게도 환난이 있습니다. 환난이 오는 이유는 환난이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었을 뿐더러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의 앞길에 형통한 날도 있고 곤고한 날도 있지만 이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곤고한 날 곧 환난 때에 신앙의 지조를 지켜나가면 더 큰 성장과 축복이 있는 줄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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