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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통해 예수를 닮아가자
2002-05-31 18:36:13



2002목회비전(훈련)



에베소서 4:11-16, 베드로후서 1:1-11





미국 동부의 유명한 성공연구가인 지그 지글러(Zig Ziglar)는 인간의 잠재의식이 한 사람의 성공과 성숙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실험을 통해서 입증하였습니다. 지그 지글러의 실험 대상은 벼룩이었습니다. 그는 벼룩을 병에 담아 놓고 뚜껑을 덮어놓았습니다. 여러분, 벼룩의 점프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이 세상 그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신장에 비례해서 벼룩만큼 높이 뛰어오르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 만큼 높이 뜁니다. 지그 지글러가 병에 담아 놓은 벼룩도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병안에서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뛰어올라도 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벼룩이 생각을 하기를 "아, 내 능력은 병뚜껑까지로구나"하고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정해버렸습니다. 이쯤 되자, 지그 지글러가 병의 뚜껑을 열어놓았습니다. 여러분, 벼룩이 병을 빠져나왔을까요? 이미 자신의 한계를 병뚜껑으로 한정했던 벼룩은 그 이상의 높이를 생각하지 못했고 결국 병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이 벼룩처럼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누리게 하실 것이 분명한데도, "나 같은 사람이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뭐!", "더 하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야!", "이제 훈련받아서 뭐하겠어! 그냥, 조용히 신앙 생활하는 것이 제일 편하지!"이렇게 생각하면서, 내 발로 하나님이 주시려는 은혜와 축복을 차버리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은 목회비전 네 번째 시간입니다. 무슨 내용을 다루는 시간이죠? "훈련" 훈련입니다. 훈련은 자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훈련을 통해 온전한 신앙인이 됩시다!"



1.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

그러면 왜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어떤 성도들은 교회서 '훈련', '훈련'하면, "무슨 교회에서까지 피곤하게 훈련받아야 합니까?", "훈련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반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훈련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훈련과 구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내 삶을 그분에게 맡겼다면, 이미 나는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가 왜 훈련을 받아야만 하겠습니까? 요즘 목회비전 설교를 하다보니, 조금 딱딱하죠? 문제 하나 냅니다. "왜 우리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한 때 사천만이 좋아했던 사지 선다형 객관식으로 보기를 드립니다. 1번, 남는 게 시간이니까. 2번, 목사님이 하라고 하니까 목사님 체면 살려주기 위해서. 3번, (저 같이) 멋진 목사님과 만나기 위해서(왜 웃습니까?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목사요, 사랑 많은 목사입니다) 4번,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 몇 번입니까? 3번이요? 물론 여러분들이 저와 우리 부목사님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정답은 아니지요! 몇 번입니까? 그래요. 4번입니다.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온전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ε?? ?νδρα τ?λειον)'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 되다'는 의미인데, 특별히 텔레이온은 말 그대로 '완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숙'의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훈련받는 목적은 훈련을 통해서 성숙한 신앙의 상태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도가 어디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도는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신앙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적으로 성숙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 미숙아가 되어 세상 가운데서 패배자의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로 4절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악한 자들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못마땅해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 대답하십니까?

5절 말씀입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성도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악인의 성공하는 것 때문에 시험드냐?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을 때가 많은데, 그때는 어떻게 이기겠느냐?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안한 땅인데, 그곳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올 때 어떻게 이기겠느냐? 훈련받지 않고 네가 과연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사단의 속임수와 유혹에서 굳세게 버텨 승리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풍파 속에서 믿음으로 굳세게 서길 원하십니다. 편안할 때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연단한 사람만이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올곧은 신앙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로써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라" 그런 뜻입니다. 만약 성도가 영적인 성장을 하지 않고 구원받았던 처음 순간 그 모습 그대로 머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원을 받긴 했지만, 세상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굳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신앙 훈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훈련으로 단련시켜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각 집회마다 출석카드를 제출하게 합니다. 물론, 주일 예배 시에는 하지 않지만, 부흥회나 특별 새벽 기도회, 그리고 특별 교육 훈련이 있을 시에는 출석카드를 제출하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보였습니다.

첫째, "목사님! 신앙 생활 알아서 하는 것 아닙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구요,

둘째는 "목사님! 이렇게 출석카드를 제출하게 되니까, 더 열심히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아무런 제재도 없을 때에는 흐지부지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렇게 하니까 어렵더라도 나오려고 애쓰게 되네요."

성도 여러분, 어떤 반응이 더 많았을까요? 둘째 반응은 제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는데 첫째 반응은 분명하게 전달되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합니다. 제가 몇 십 년 신앙생활 했는데, 꼭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열심히 하게 되는 것도 아니예요. 그러니, 하지 마세요!" 이런 분들이 있더라구요. 물론, 내색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얼굴 보면, 압니다. 이 자리에도 그런 분 몇 명 있네요. 성도 여러분, 출석카드를 제출하게 하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그냥 나오는게 좋습니까? 물론, 그냥 나올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이보다 좋은 게 없죠! 하지만, 그게 안 되지 않습니까? 조금만 틈이 나면, 훈련받는 일에 게을러지기 십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기꺼이 출석카드를 제출하는 것 역시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담임 목사로써 여러분들을 피곤하게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다 여러분의 신앙이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지고 성장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잘해 보자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훈련받게 해 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모든 것을 자기 시각에서 판단하지 마세요. 출석카드 내는 것이 번잡스럽고 불편하다구요? 그러면, 오늘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사무실에 들러서 출석카드는 많이 가지고 가서 한꺼번에 써놓았다가 올 때마다 하나씩 가져오세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훈련받지 않아도 될 만큼 온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 있다면 제가 그분에게 훈련받겠습니다. 우리가 훈련받지 않으면, 사단은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공격합니다. 나약해진 신앙 상태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습니다. 사단에 의해서 넘어갈 수밖에 없어요. 사단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을 간직하고 싶지 않습니까? 힘써 훈련받으시요. 훈련받는 자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훈련받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신 상급을 누리게 됩니다.



2. 훈련받는 자의 자세

그렇다면, 성도는 어떠한 자세로 훈련에 임해야 겠습니까?

⑴ "하나됨"을 목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4장 11절로 16절 말씀은 그 앞의 말씀과 연결해 볼 때,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라고 말하고, 또 이어서 사람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봉사의 일을 말하고, 온전하게 성숙, 성장해가는 신앙에 대해서 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3절 말씀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훈련받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볼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세워가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선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서로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훈련을 통해서 겸손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교만한 모습이 드러낼 때가 많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높은 수준의 성경 공부반에서 공부하니까 저 사람보다 신앙생활에 앞선 거야!'하며 우쭐댈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신앙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을 받는 목적이 자신의 신앙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 훈련을 받고, 기도 훈련을 받고, 전도 훈련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자신만이 온전해지면 그것으로 다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훈련은 자신을 온전케 하는 것인 동시에 다름 사람에게 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성도가 있으면, 힘이 되어주고자 훈련받는 것이요, 슬퍼하는 자가 있다면,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해주기 위해서 훈련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 오래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더 많은 훈련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훈련받지 못한 사람을 천시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개가 없었으면, 우리 교회가 참 평안할 텐데'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왜 이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 보입니까?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훈련중에서도 훈련의 참된 목적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훈련을 많이 받은 분일수록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위로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섬기는 삶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훈련이야말로 참된 훈련입니다. 자신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훈련을 받는다면 훈련의 참된 목적을 잊어버린 어린아이의 훈련입니다.



⑵ 열심으로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배우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열심"입니다. 열심이 없으면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을 훌륭한 운동선수로, 예술가, 조각가, 음악가, 사업가로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단한 수련,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입니다. 만약, 우리나라 마라톤의 대표 주자격인 이봉주 선수가 매일같이 훈련은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다가 마라톤 시합에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나마나 등수 안에 들기는커녕 완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봉주 선수는 42.195km를 완주하기 위한 연습으로 15000km 정도를 뛴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한 분야에 열정을 쏟고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노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분야에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착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왕 훈련 받는다면, 아니 받고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왕 할 것이라면, '하고 싶다'로 마음을 바꾸세요. 처음 어떤 훈련을 시작한다는 것-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내 마음 속에 하고 싶은 열정을 부어주세요.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새로 나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면 훈련받기를 꺼려합니다. 낯선 교회에 와서 처음부터 교육을 받으려고 하니 어색하지요. 그냥, 조용히 다니고 싶었는데, 어찌나 빠른 지 벌써 새로운 분임을 알고 다가가 훈련받으라 권면하면, 마음속으로 '아이구 이 교회에 다니다간 너무 깊이 발을 드려놓겠는 걸!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이 교회 다니려고 한 이유는 좀 조용히 다니려고 선택한 것인데, 그러면 안 돼. 다른 교회 알아봐야지!' 이렇게 스스로 체면을 겁니다.

먼저, 이 자리에 이런 분들이 혹시나 계시다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너무 부담가지지 마세요. 글쎄, 어떤 분들은 훈련받으라고 하면, "목사님! 저 제대로 할 자신이 없어요. 지금은 무척 바쁘거든요. 나중에 시간되면 받을게요"합니다. 물론, 제대로 하는 것 중요하지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훈련받는 것이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또 압니까? 훈련받다 변화되어 예수 믿는 신앙생활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말씀드리죠. 살다보면 어려운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훈련받아야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훈련받아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소 한 번도 하나님과 생활하는 삶을 살지 못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만나집니까? 물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만날 수 있겠지요. 그래도 우리가 꾸준히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더 많게 되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고, 우리도 그 위기를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훈련받기 꺼려할 필요 없습니다. 먼저,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그냥 부딪쳐보는 것입니다. 이런 애착을 우리 하나님께 보여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한 걸음을 딛는 순간, 그 다음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지금 훈련 받고자 힘쓰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음 순간을 예비해주시고, 시간이 부족하면 시간을 채워주시고, 일에 쫓긴다면 그 일을 순조롭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 내 삶의 모든 것을 맡겨 보세요. 그리고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지시길 바랍니다.



⑶ 훈련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훈련 받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하십니까? 지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훈련받고자 하십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진정 훈련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아멘"하는 순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만을 채우는 훈련은 필요없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훈련을 통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서 훈련시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못된 것들, 한 번 고생 좀 해봐라"하시고 벌주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해서, 앞으로 어떠한 환난이 닥쳐와도 "아멘"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계획 놓으신 훈련에는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멘'이라고 순종할 수 있는 자리,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춘천중앙 교회 온 성도들은 배울 때마다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훈련에 임해서 어떤 환난 속에서도,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멘"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훈련을 통해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배움에는 분명한 결과가 뒤따라야 합니다. 실컷 배워놓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면, 시간 낭비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1장 5-7절 말씀을 봅니다.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어떤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삶 속에서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이예요. 바로 이 위에 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도덕적으로 뛰어남을 뜻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 없이 믿음만 있으면, 균형을 잃고 뒤뚱뒤뚱 거립니다.

다음으로 뭘 말하고 있습니까? 절제입니다. 세상에서 지키기 가장 힘든 게 절제일 것입니다. 말을 절제하지 못해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절제하지 못해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절제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절제하는 성도는 자동적으로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인내는 그냥 참는 것(patience)이 아니라, perseverance, 즉 마지막의 승리가 나의 것임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당당하게 참는 것을 말합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지요! 언제 싸움이 커집니까? "나는 잘못 없다! 네 잘못이다!"할 때 싸움이 커집니다. 나 자신을 죽이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깐 싸우고 이혼하는 것 아닙니까?

또한 성도는 훈련을 통해서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경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누워도 하나님, 일어나도 하나님, 앉아도 하나님, 먹어도 하나님, 잠을 자도 하나님, 서도 하나님, 걸어도 하나님, 뛰어도 하나님, 넘어져도 하나님입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입니다.

일곱 번째 "형제우애"입니다. 형제우애란 형제간에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같이 훈련받으면서, 서로에게 안부전화도 하고 관심 가져주고 기도해주는 것, 이것이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감싸주는 것입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목회비전 네 번째 시간 "훈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세워가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해서 하나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믿음에 덕을 세우고, 덕에 지식을 세우고, 지식에 절제를 세워야 합니다. 또한 절제에 인내를 세우고, 인내에 경건을 세우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세우고,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덮어야 합니다.

주보에 올해 있을 훈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확인하셔서 미리 미리 일정을 정하시고 기도로 준비하셨다가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부디 바라기는 2002년 춘천중앙교회 성도들은 앞으로 있게 될 훈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훈련받음으로써, 세상 한 가운데서 승리자로 우뚝 서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비록, 첫걸음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첫걸음 디딜 때, 하나님께서 그 다음 걸음을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훈련받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큰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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