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성경적 의미 2002-06-06 13:48:17 데살로니가후서 3:6-12 2002. 1. 27.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여러분 모두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반대로 시원한 그늘 아래서 노래하는 베짱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로서 나름대로 의미를 전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람이 이 이야기를 썼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겨울 어느 날 베짱이는 개미의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개미는 문을 열고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던 당신에게 줄 것이 없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베짱이는 일을 해서 먹거리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돌아가서 음악회 표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개미의 집을 두드렸습니다. 개미들이 나오자 베짱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음악회를 열테니 표를 사십시오.” 그래서 모든 돈으로 개미들에게서 음식을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개미들은 그 표를 샀고 베짱이는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때아닌 때 개미집 앞에서는 갑자기 즐거운 음악이 흘러 넘쳤습니다. 일을 만들어 하고 먹을 것을 구하는 성경적인 교훈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날 교회 가운데도 베짱이처럼 행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개미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물질을 쌓되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건전한 모습은 서로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베짱이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오늘 본문은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ataktws peripatountos로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군사적 용어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걷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용어를 사도 바울이 사용하면서 교회 안에서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계명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교우들에게 폐와 불신을 끼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향해 교회 안에서 일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미든 베짱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든 서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을 규모있게 행하는 방법으로 우선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줍니다. 우선 오늘 읽은 말씀은 일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이를 가꾸어 나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살아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보다는 좀 덜 아름다운 곳이지만, 역시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요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일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이 선택한 위대한 사도 바울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일을 해서 양식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전문직을 통해 양식을 얻었습니다. 오늘 말씀 8절을 보면 그는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10을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만 해도 천막을 짓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잘 발전된 길드 즉 오늘날로 말하면 동종직업종사자들의 조합인 길드(guild)에 들어 일하면서 동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행하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할 때 먹을 것이 주어진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법칙에 따른 삶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나면서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을 함께 듣습니다. 그 가운데 3:19을 보면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땀을 흘리지 않고도 음식을 먹었던 상황보다는 나빠진 상황을 우선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말씀은 저주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땀을 흘리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는 축복입니다. 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볼 때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보다 더 잘 살게 됩니다. 무위도식하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합니다. 일을 하지 아니하며 먹는 자는 바로 사회의 기생충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도 일에 대해서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육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안식하라는 가르침으로 인해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가운데 박재선씨가 쓴 ‘세계사의 주역 유태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중동지역에서 오래 일했던 외교관으로서 유대인의 성격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보면, 유대인 젊은 여자에게 공장에서 일을 해 적은 돈을 벌것인가 아니면 몸을 팔아 많은 돈을 벌것인가 선택하라고 하면 거의 전자를 선택한다고 서술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왜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되는지 그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바로 하나님의 계명에 따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기독교사회이론가 막스 베버(Max Weber)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17세기 미국의 청교도들에게 훈련과 순종과 기쁨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청교도들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려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은 신앙적 확신의 문제였고 그들은 그것을 다분히 자유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일은 생존의 문제요 사실상 병리적 현상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일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니요 우리 신앙의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상황은 거꾸로 가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우리 사회 가운데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날 정부에서도 복권을 만들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현혹시키고 많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더욱이 합법적인 도박을 더욱 장려하고 백성들도 이를 좋아합니다. 강원랜드의 카지노, 곳곳의 경마장과 경륜장 등은 모두 일하기를 장려하기보다는 한탕을 노리게 하는 정신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에서 우리는 벗어나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신성한 사명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이끌어 나가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일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만, 가끔 하나님이 우리로 일을 그만 두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또 다른 기회와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사업장의 문을 닫는다든지 직장을 사임할 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별로 아니 거의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은 더 나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저도 우리 교우 가운데 한 분이 그동안 피땀을 흘려 이룬 사업처를 정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업예배를 드리자고 제안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받아주었습니다. 물론 기분이야 그렇게 좋겠습니까만 그래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받아준 줄 압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백성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시며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땀을 흘릴 때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법칙을 밟아 살아가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규모있게 일을 하는 목적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가르칩니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이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얼굴에 땀을 흘릴 때 땅이 소출을 낸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을 닮아 약속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가 됩니다. 오늘 말씀 3:6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도 바울도 전한다는 말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일했음을 암시합니다. 정말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열심히 일을 하셨고 자기 제자들에게도 일한 자는 삯을 받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전도를 위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잠자리를 얻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전하는 일로 인해 받는 삯을 당연히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5:1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리고 5:19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작업과 지금도 움직이시는 섭리의 작업을 행하시고 계시는데 그 모습을 닮아 예수님도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대로 잘 움직이는 일을 하나님을 따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쉬고 모든 것이 원래 창조된 모습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며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병으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에 그 병자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기 위하여 병을 고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들고일어난 것이지요. 왜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안식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규정에 얽매여서 일을 했느냐 아니 했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규정만을 보면 진정 마음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정을 붙이고 신앙생활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바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교우들과의 교제가 가능해집니다. 저는 어느 분이 그동안 교회에서 교사로 봉사하다가 낙심하여 교회를 한동안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고자 하면서 아직 교사로 서기에는 부족하기에 차량안내봉사를 통해서라도 자기의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 일거수일투족을 생명록에 기록해 두실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걸림돌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힘든 여정으로 인해 육체가 쉬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예배에 나오는 것은 이 세상의 쉼이 주지 못하는 또 다른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으로 또한 나와 봉사한다는 것 역시 육신적으로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교우들의 평안한 예배를 위해 수고하는 기쁨은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또 다른 보상이 있기에 우리는 이 일을 감당합니다. 요즈음도 안식을 취하는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곤 합니다. 아직도 어느 교단에서는 안식을 취하여야 하는 주일에 일을 하는 것을 죄악시합니다. 물론 주일에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요. 주일에 교회에 오기 위해 운전을 하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일입니다. 차를 타는 것도 일입니다. 물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도 일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박혀 있으라는 말입니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규정에 얽매어 진정 하여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기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불평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자꾸 안 좋은 것만을 지적하고 서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진정한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그립고, 오니 기쁘고, 예배를 드리고 나니 참으로 생명력이 넘치고, 또한 교우들을 만나니 마음이 편하고 하는 사람이 진정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을 따라 일을 행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도 일하기에 우리가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셋째로 일을 규모있게 하게 되면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을 포함한 데살로니가후서를 쓰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의 보상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보상을 기대하며 일을 하는 곳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더욱이 조직체인 교회에 속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전 우리는 지난 수 십 년간 교회에서 일하시고 은퇴하시는 분들을 위한 은퇴식을 거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참석해본 은퇴식 가운데 그보다 더 많은 박수가 나온 은퇴식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진정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일을 하신 분들을 기리는 일이요 그 분들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은 그 이상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어떻게 일을 하고 봉사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대구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올 한해는 여러분들에게 희망이 넘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변함으로 인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일에 있어서도 적용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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