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십자가 2002-06-06 13:54:00 갈라디아 6:11-16 2002. 3. 17.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토미라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학 실력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습니다. 그래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방법으로 천주교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첫 날 학교에서 돌아온 토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첫 날이라 그러겠지 하고 엄마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매일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학기말이 되자 토미는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수학에서 A학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엄마는 "얘 이거 어찌 된 거냐? 수녀님들 덕에 이렇게 된 것 맞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토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있잖아, 엄마! 학교에 간 첫 날 첫 시간이 수학시간이 있었는데, 교실 앞에 더하기 표인 십자가가 걸려 있잖아! 그런데 거기에 한 사람이 못에 박혀 있는거야! 그래서 내가 생각했지! 이 학교에서는 수학을 제대로 하지 않고 어물쩍거리면 안되겠구나. 잘못하면 나도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히는 벌을 받겠구나!". 아무튼 토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한 어린이를 수학 성적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더 나가서 1:22-24에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 바울께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어떤 교훈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생명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는 과거에만 그러한 과거형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현재형입니다. 바로 이러한 십자가 위에 우리 기독교는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을 통해 십자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선언하십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 즉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십자가이기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표인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십자가는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희안한 것은 십자가는 논리적으로 해설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에 인용된 신명기 21:23의 말씀과도 같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린 것을 볼 때 사도 바울은 예수는 분명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나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가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점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바뀌었던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었는데, 이를 하나님이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이 새로이 바꾼 그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신학적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신학자들도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참으로 많은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현재 바울신학에서 큰 획을 그었던 E. P. Sanders라는 학자는 결과가 이유를 초월했다는 명제를 내 놓았습니다. 이유가 되는 율법의 말씀으로 십자가를 해석해 보고자 했으나 절대로 설명되지 않았는데, 부활이라는 결과로 십자가를 해석해 보니 하나님이 구원계획을 율법에서 십자가로 바꾸었다는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이 받아들여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몸을 드린 십자가에 대한 신앙은 우리 믿음의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요, 하나님의 더 크나 큰 은혜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단순하고 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잘 표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연관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지난 주간에 십자가 첨탑공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보부터는 첨탑이 올려진 교회의 모습을 주보의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굳굳히 항상 서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로서 서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은 새성전건축위원회의 실행위원이시기도 한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십자가 설계도를 보여주시면서 자문을 구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어떤 문양을 통해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장식은 어떤 신앙고백적인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멋있게 만들려고 한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장식도 필요가 없고 단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단순하고 강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조언을 받으셔서 현재의 간단하고도 단순하지만 강한 모양으로 설치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가 아닌 것으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사도 바울은 목숨을 다해 십자가의 신학을 외쳤던 것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 등 많은 교인들이 십자가의 신앙을 포기하고 율법준수로 회귀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은 다시 십자가의 신앙으로 돌리기 위하여 얼마나 큰 수고를 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비난을 하고 이에 대한 온전한 대안으로 십자가를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데 자신에게 드러나는 그 어떤 표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한 비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데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있음을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새롭게 세운 구원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는 십자가 이외의 것은 알지도 않겠다고 극단적인 선언을 하면서까지 십자가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가 아닌 것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랜 세월 참석했다는 것을 더욱 내세울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덕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했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으로 여기는 모습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전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본질이 되는 것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는 십자가에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바로 그러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 주와 그 전 주를 통해 설교했듯이 우리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죄로부터 온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교회가 공동체로서 얻어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많이 간과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70년대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스텐달 교수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기독교 신앙이 너무 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바탕으로 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이후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개신교 신앙이 흘러왔음을 지적한 후 이제 다시 공동체적 해석으로 돌아서야 할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신앙을 개인적인 면에서 이끌어 올려 민족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십자가의 신앙을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시인이자 민족시인인 윤동주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만주 용정에서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아픔을 십자가(十字架)라는 시를 통해 토로를 하였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는 제1연에서 도래하지 않는 이상이지만 삶의 목표로 십자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희망의 상징물입니다. 하지만 제2연에서는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합니다. 삶의 목표와 시적 화자 사이의 현실적인 거리감을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냐는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3연에서는 신념과 행동의 괴리감(乖離感)에서 오는 고민, 방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 속에 빠져있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그 방법으로 제4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와 같은 자기 희생을 위한 십자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길로써 십자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제5연에서는 자기도 희생을 통해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1941년 발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는 그가 믿는 그대로 희생의 제물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고통이요 죽음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따랐기에 이 나라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물꼬를 튼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기독인된 우리들,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된 우리들도 십자가를 지고가는 신앙생활을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당하는 신앙의 고난을 예수의 십자가에 의지하여 풀어나가는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우리 나라와 민족이 당하는 고난을 십자가의 신앙에 의지하여 해결해 나가는 자세 역시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인들이 지고 나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이 나라와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나라의 나뉨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지난 주간에 25명의 탈북자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는 그 자체가 우리의 고난의 현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먹을 것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서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살펴보고 우리의 아품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를 찾는 자가 있는 반면 아직도 20만명의 탈북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다 남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함께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통일을 이루는 일입니다. 자유를 찾은 자가 있는 반면에 북으로 끌려가는 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2002년 3월 16일 국민일보에 실린 손선생이라는 분은 북으로 다시 끌려가면서 이러한 구절을 담고 있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저는 정말 배고파 온 가정이 쓰러졌을 때에는 세상에서 제일 큰 설움이 배고픈 설움인가 하였더니 지금은 자기가 의지하고 지켜주고 안겨야 할 조국이 없다는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한국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어 못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꼭 불쌍한 가정을 살려주십시요.” 사랑하는 대구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의 다섯 번째 주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리며 또한 그 뒤에 놓여있는 부활을 기대하는 삶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은 영적인 고통으로부터 육신에 이르는 모든 고통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역설적으로 부활을 가져다 주는 십자가이기에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있습니다. 이 신앙을 지켜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