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으로 다스리라"
2002-06-07 18:57:12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2월 25일
010225.ram(LOAD:82)



예레미야서 4 : 1∼4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리고, 너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리고 네가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주의 복을 받고, 그들도 주를 자랑할 것이다." "참으로 나 주가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한다.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묵은 땅을 갈아엎고서 씨를 뿌려라. 너희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너희는 나 주가 원하는 할례를 받고, 너희 마음의 양피를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서 너희를 태울 것이니, 아무도 끌 수 없을 것이다." 아멘.

베드로전서 4 :12∼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이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
에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이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기십시오. 아멘.

마가복음 10 : 20∼28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렸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아멘.



-------------------------------------------------------




우리는 오늘 82년 전 3 .1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기념하며 이 예배를 드립니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토요일에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한 서울의 3 1운동이나 평양과 원산과 광주와 대구와 전국 각지에서 시작된 3 1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가 자유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난 운동이었습니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 절절한 외침은 그 다음날인 3월 2일, 주일날 각 교회의 예배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마다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이 민족에게 독립과 자유를 주시기를 비는 기도가 드려지고, 자유를 갈망하는 찬송과 설교가 울려 퍼지고 선포되었습니다.

그때 82년 전의 함성을 오늘의 용어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 빵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갈구합니다. 자유를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당시 시인 이상화가 읊은 시의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시 한 구절에는 자유의 봄을 갈망하고 독립을 갈구하는 절절한 마음이 시적으로 압축되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36년이 아니라 400년 간이나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자유를 꿈꾸며 살았습니다. 성서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3 1운동과 비슷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해서 유월절 날 저녁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결단하고, 그 다음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나온, 우리로 말하면 8 .15 같은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아마 우리의 3 1운동 비슷한 시도를 여러 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이 없을 뿐일 것입니다.

그 유월절 날 저녁 이스라엘은 아마 이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노예의 땅, 억압과 굶주림을 벗겨줄 자유의 봄은 오는가." 모세를 통해 확실한 대답이 임합니다. "야웨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기로 다시 결단하면 자유는 온다. 나와 함께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가로질러서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가자." 이스라엘 백성이 실현되기를 고대했던 약속, 이집트에서 해방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약속, 바빌론에서 풀려나 시온에서 찬양하게 되리라는 약속, 그 약속의 핵심을 그들은 다음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자유!"

하나님의 이름은 뭡니까. 야웨가 아닙니까. 그 뜻이 뭡니까.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야웨라는 이름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유입니다. 거기서부터 사랑도 자비도 인자도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3. 1절 82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는 지금 한마디로 고백합니다. 자유이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독립과 자유로 인도하여 주셨다고. 그러나 82년 전 독립운동의 함성이 전국을 메아리쳤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직접적인 강권통치를 펴던 일본이 조선인의 강렬한 독립 욕구를 보고 교활하게 그 수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는데, 그것이 소위 문화통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문화통치라는 이름 하에 착취와 억압을 더 심도 있게 폈습니다. 3 .1절 이후부터 1945년 8 .15 해방을 맞기까지에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 어느 족속에게도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자유를 허락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뒤에 해방을 받았고, 우리는 36년 뒤에 자유를 얻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찾으려는 함성을 들으시고 반드시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자 우리의 믿음입니다.

몇 주일 전에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님이 와서 우리 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지요? 헝가리 사람들은 1956년 공산주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부다페스트에서 대규모로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군의 군화에 무참하게 짓밟혀서 그 항거는 무위로 끝났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에, 당시 자신들의 항거는 비록 무위로 끝났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자유를 주시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많은 시간이 흘러 1989년 완전히 공산세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1956년의 저항의 피는, 자유를 갈구하던 그 피는 아직도 살아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떠나면서 그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들려주셨습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서 모여들었지
만, 프라하의 진정한 봄은 이십여 년이 지난 1989년에야 왔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들불처럼 한반도를 뒤덮었지만, 빼앗긴 땅에 봄은 수십 년이 지난 1945년에야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많은 민족의 자유는 그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감사하며, 자유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주신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구권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동구는 지금 모든 나라가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구권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당시보다 지금의 경제여건이 훨씬 더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글로벌 경제가 들어섰다고 하는데, 오히려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90%가 공산주의 시절보다 경제적 여건이 훨씬 더 나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유럽 전체의 가족당 월 소득액이 30달러라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지난주에 타임지가 이 문제를 특별 보도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동유럽 사람들은 경제 여건이 더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유가 말살된 그 지긋지긋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그렇게도 좋지만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는 어렵습니다. 자유는 훌륭한 복이지만 자유를 만끽하는 데에는 엄청난 고뇌가 수반되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어서 독립을 이루고 자유를 누렸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분단을 비롯해서 얼마나 큰 고난이 우리 사회를 엄습했습니까. 훌륭한 자유, 그 자유는 값이 비쌉니다. 엄청난 희생도 요구합니다.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동유럽이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공산주의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린다는 동유럽 사람들에게 지금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동정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타임지에 의하면, 지금 유럽에 큰 문제 하나가 생겼습니다. 매년 2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동유럽의 젊은 여성들이 빵을 찾아서 서유럽으로, 북미주로, 전세계로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3 1운동 이후 해방 전까지 얼마나 많은 우리의 꽃다운 처녀들이 일제에 위안부로 끌려갔습니까? 그런데 지금 식민지도 아닌데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미국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팔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팔려가는 거점이 어디냐 하면, 주로 전쟁이 있었던 코소보,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등이랍니다. 이곳을 통해서 팔려갑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자유, 이념적 자유만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자유까지를 누릴 수 있게 되는 날은 언제입니까? 세계는 양심을 이야기하고 도덕을 소리 높혀 말하는데, 그 양심과 도덕의 논의 속에 우리가 쉴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한두 명, 열 명, 백 명, 천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이 매년 같이 팔려갑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3. 1운동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3 1운동으로 대표되는 이 자유를 위한 갈구는 지금 전세계에서 함성으로 터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도 분단을 극복하자는 또 하나의 3 .1운동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의 함성이 있습니다. 인간이고 싶지만, 그렇지만 먹을 것을 위해 인간을 팔아야 하느냐고 외치는 동유럽 여성들의 외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세계의 3 .1운동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 현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마다 나라마다 족속마다 국가마다 다 지금도 3 .1운동의 정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를 찾아온 부자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풍족한 재산을 소유했고 그리고 율법에도 철저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에게는 아직도 영원한 자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저한테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야웨 하나님의 자유가 제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저한테 영적, 인간적 자유를 확인해줄 방법은 없습니까?" 그 말을 이 부자 청년은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표현합니다. 예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부자인 이 청년이 근심을 하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유를 향한 갈증을 끝내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성서 말씀에 보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아무리 불가능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낙타와 바늘구멍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오늘 낙타라는 말에 관련된 성서신학적인 토를 하나 달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람어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람어로 이 이야기를 말씀하셨는데, 후에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이 헬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람어에는 낙타란 말이 '깜라(gamla)'입니다. 그런데 아람어에는 그 깜라라는 말과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 단어가 '깜타(gamta)'입니다. L자와 T자 차이입니다. 깜라란 말은 낙타를 뜻하고, 깜타라는 말은 배를 매는 동아줄을 뜻합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 일부는, 아마 예수께서는 깜타, 그래서 밧줄을 바늘구멍에 넣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했을텐데,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깜타가 비슷한 발음의 깜라 곧 낙타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논의를 보면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밧줄이든지 낙타든지 바늘구멍 속으로 못 들어가는 것은 매일반이라는 점입니다.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는 현실, 이 현실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재산을 팔아라." 예수께서는 재산이 이 부자 청년주인에게는 속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가진 재산이 그에게 풍요를 주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유이신 하나님을 믿는 데 지장이 생긴다면 그 재산을 팔아서 자유를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가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지혜든 권력이든 어쨌든 그 재산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못한다면, 그 자유를 사기 위해서 속박인 것을 팝시다. 새로운 인간으로, 자유의 민족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이 겨레가 지금 팔아야 할 재산은 무엇입니까?

모든 재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위탁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주
인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마저도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위탁받아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팔라고 하면 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 재산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팔았습니다.

하나님도 파시는데,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파시는데, 왜 우리가 못 팝니까? 팔고 나면 부활이라는 영광이 기다립니다. 이 부활의 영광을 여러분이 족하게 생각하시면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재산을 파십시오. 그걸 팔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사십시오. 그 자유를 가지고 다시 재산을 모으십시오. 그 자유 위에다 다시 지식을 쌓으십시오. 그 자유 속에다가 다시 우리의 평화를 심읍시다.

여러분이 얻은 자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자유는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복을 받
으라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자유라면, 이 자유를 우리만 누릴 것은 아닙니다. 3 1운동을 놓고 생각한다면, 우리 한민족만 이 자유를 누릴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을 침략한 일본도 함께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아직도 침략을 정당화하고 싶어 하고 망발을 일삼는 것, 그것은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일본은 지배욕을 팔고 빗나간 국수주의를 팔고, 우리는 비참했던 과거를 팔고서, 하나님의 해방의 자유를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그 속에 평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선물이 주어집니다.

3 1절을 기념하는 우리는 옛날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지금 21세기에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의 삶, 행복하고 책임 있는 삶, 그 삶으로 이 나라가 복되고, 일본도 그런 뜻에서 복된 나라가 되어서 두 나라가 함께 공동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소명인 줄 압니다. 일본이 필요하면 회개하고, 우리도 필요하면 회개하고 그리하여 함께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자유가 오늘 우리의 자유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우리는 오늘 82년 전 3.1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기념하며 이 예배를 드립니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고 합니다. 토요일에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한 서울의 3.1운동이나 평양과 원산과 광주와 대구와 각지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자유를 위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날, 주일날 교회마다 눈물이 섞인 외침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엎드려서 이 민족에게 독립과 자유를 주십시오 하는 찬송과 기도와 설교가 울려퍼지고 선포되었습니다. 그때 82년전 함성을 오늘의 용어로 요약하면 하나님,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 빵도 필요하지만우리는 자유를 갈구합니다. 이 자유를 주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 이상화가 읊은 시 중에 한구절을 인용합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말 속에 자유를 갈망하고 독립을 갈구하는 마음이 시적으로 다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36년간이 니라 400년간이나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자유를 꿈꾸며 살았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3.1운동과 비슷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해서 유월절날 저녁 전 대 사람들이 모여서 결단을 하고 그 다음날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나온 우리로 말하면 8월 15일 같은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아마 3.1절 비슷한 시도를 여러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이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마 이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저녁. 지금은 노예의 땅 억압과 굶주림을 벗겨줄 자유는 오는가. 모세를 통한 확실한 대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기로 다시 결단하면 자유는 온다.

나와 함께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가자.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가자. 이스라엘 백성이 꿈꿨던 이집트에서 해방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자는 약속, 그 약속을 전부 모으면 유대 백성들은 다음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그것은 자유. 하나님의 이름은 뭡니까. 야웨가 뭡니까.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란 말의 뜻은 자유, 하나님은자유. 거기서부터 사랑도 자비도 인자도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까지 지내온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3.1절 82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는 지금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자유이신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독립과 자유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82년전 그렇게 많은 독립운동의 함성이 전국을 메아리쳤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헌병통치로 시작했던 일본이 조선인의 독립욕구를 보고 교활한 수법으로 다시 억압통치를 시작하는데 그 억압통치는 헌병통치에서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가렴주구와 억압을 더 심도있게 펼쳐나갑니다. 3.1절 이후부터 1945년 8.15 해방을 맞기까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어느 민족, 어느 족속에게도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허락하여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4백년 뒤에 해방을 받았지만, 우리는 36년 뒤에 받았지만, 한번 일으키고자 하는 자유의 함성은 그치지 않고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하는 것이 우리 역사의 교훈입니다. 지난 몇주간 전에 저희 교회에 와서 설교한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헝가리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들은 1956년 공산주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부다페스트에서 항거를 했습니다. 그 항거는 여지없이 바르샤바 조약권의 군화에 짓밟혀서 항거가 무위로 끝났습니다. 그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록 무위로 끝났지만 4백년 이후에 자유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도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1989년 완전히 공산세계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1956년의 저항의 피는 자유를 갈구하는 피는 아직도 살아 면면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예배를 마치고 떠나면서 이분이 해주셨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가면 프라하광장이 있습니다. 1967년 프라하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서 움직였습니다. 프라하의 봄. 바르샤바 조약군에 빼앗긴 프라하에도 봄은 옵니까. 소리를 쳤지만 오지않고 89년에 왔습니다. 3.1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파고다의 함성은 수십년이 지난 45년에 왔듯이 세계 여러 나라의 자유를 위한 갈구는 항상 그 당대에 오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왔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 약속을 지금도 믿는다고 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감사하며 자유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주신 자유를 진실로 만끽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동구권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동구는 89년에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지금 자유와 독립을 얻어서 이제는 자유스러운 나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구라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당시보다 지금이 경제여건이 훨씬 더 열악합니다. 글로발 경제가 들어섰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90% 인구가 공산주의 시절보다 훨씬 더 여건이 나빠졌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동구라파 전체의 월소득이 가족당 3십 달러라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지난주의 타임지가 특별 보도했습니다. 거기서 보니까 경제 여건이 나빠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그건 절대 아니올시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한 옛날, 그런데 지금 살려고 하니까 힘들어 죽겠습니다. 자유가 그렇게도 좋더만 자유를 누리기가 이렇게도 어렵습니다. 자유는 훌륭한 축복이지만 자유를 만끽하는 책임은 엄청난 고뇌를 수반합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어서 자유를 누리고 독립을 누렸지만 지난 반세기동안 분단을 비롯해서 우리 사회를 엄습했던 얼마나 큰 고난이 우리를 짓눌러 왔습니까.

훌륭한 자유, 그 자유는 값이 비쌉니다. 엄청난 희생도 요구합니다. 그 엄청난 헌신을 요구합니다. 지금도 그런 상태입니다. 공산주의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렸다는 동구라파 사람들에게 지금 글로발 세계 경제는 너무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동정도 없습니다. 지금 구라파에서 큰 문제 하나가 생겼습니다. 내년 2십만명에서 3십만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빵을 찾아서 서구라파로 북미주로 전세계로 지금 팔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이후 해방이 된 다음에 3.1운동에서 해방이 되는그 공간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할머님들이 위안부로 팔려가서 고생을 했습니까?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식민지도 아닌데 서구라파로 향해서 미국 쪽을 향해서 동구라파에서는 구소련의 몰로바지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2십만명, 3십만명 여성들이 팔려오는데 주로 거점이 어디냐 했더니 전쟁이 있었던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쯔고비나 이곳을 통해서 이태리 남부를 통해서 흩어집니다. 이분들의 얘기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 이념적 자유는 받았으나 인간의 실존적 자유는 언제 누릴 수 있습니까? 세계는 양심을 이야기하고 도덕을 이야기하는데 그 양심과 도덕 속에 우리의 운명은 어느곳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도 한 두명, 열명, 백명, 천명이 아니라 수십만명이 매년 같이 흘러들어 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3.1운동은 우리에게 있었던 역사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3.1운동이라고 대표되는 이 자유를 위한 갈구는 지금 전세계에서 함성으로 터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분단을 극복하자는 또하나의 제2의 3.1운동이 우리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는 아프리카의 함성이 있습니다. 인간이고 싶다. 그렇지만 먹을 것을 달라는 동구라파의 여성들의 함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3.1운동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 현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마다 나라마다 족속마다 국가마다 다 지금도 3.1운동의 정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를 찾아온 부자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풍족하게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리고 율법도 다 지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질 영원한 자유가 아직도 없다 해서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저한테는 먹을 게 있습니다. 저한테는 그런데 저한테는 약속한 자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직도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저한테 영적, 인간적 자유를 확인해줄 방법은 없습니까? 그 표현을 이 부잣집 청년은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 소유를 다 찾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부자인 이 청년이 근심을 하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출애굽을 마음 속에 새기고 사는 부자 청년, 율법이 인생의 목표인 것을 다 알면서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 신앙인 부자 청년, 그 사람에게 오늘 부자 청년은 지금 자유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토를 하나 달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무슨 말을 쓰셨느냐 하면 아람어로 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람어로 이 얘기를 하셨는데 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오늘의 성경 사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갑니까 하는 실예가 어디서 나옵니까? 그랬더니 이 아람어에는 낙타란 말이 깜블라 그렇습니다. 깜블라인데 그 깜블라라는 아람어 말고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 단어가 깜타 이렇습니다. L자와 T자 차이입니다. 깜블라란 말은 낙타고 깜타란 말은 배를 매는 동아줄입니다. 그래서 아마 사람들이 예수께서는 깜타, 그래서 밧줄이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을텐데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깜타라는 밧줄이 깜블라라고 하는 낙타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으면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밧줄이 바늘 구멍 속으로 못들어가는 거나 낙타가 못들어가는 거나 똑같습니다. 어느것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은 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오늘 바늘 구멍이라는 조그만 구멍에 들어가야 자유가 있을텐데 이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는 현실, 이 현실에서 예수께서는 말씀이 재산을 팔아라. 이 주인에게는 재산을 바로 속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진 재산이 먹을 것을 주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유이신 하나님을 믿는데 지장이 있다 그러면 그걸 팔아서 자유를 사십시오. 오늘 우리는 무슨 재산을 갖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가 갖고 있는 재산은 물적 재산이든 지식의 재산이든 지혜의 재산이든 권력이라 이름하는 재산이든 그것이 혹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지 않는다고 하면 그 자유를 사기 위해서 그것을 팝시다. 새로운 인간으로 자유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이 민족에게는 지금 무엇이 팔아야할 재산입니까? 모든 재산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 우리는 위탁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저희들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으로서 우리 인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마저도 우리가 주인으로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위탁받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팔라고 하면 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판정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았습니다. 재산은 이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팔았습니다. 죄값을 팔고 죄를 속죄한 다음에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파시는데 영원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파시는 데 왜 우리가 못팝니까? 팔고나면 부활이라는 영광이 기다립니다. 이 기다리는 영광을 여러분이 족하게 생각하시면 파십시오. 그걸 팔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사십시오. 그 자유를 가지고 다시 재산을 모으십시오. 그 자유 위에다 다시 지식도 쌓읍시다. 그 자유 속에다가 다시 우리의 평화를 심읍시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얻은 자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자유는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복을 받으라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가 부족하면 다시 사야 합니다. 3.1절에 노래했던 그 자유가 오늘 우리 국가의 자유라고 하면 국민의 자유라고 하면 이 자유는 우리만 자유할 게 아니라 일본도 함께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아직도 속박을 정당화시키고 싶어하는 망발의 자유,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본과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일본의 소유욕을 팔고 지배욕을 팔고 우리의 비참했던 과거를 팔고 그속에 하나님이 해방시켜주시는 자유를 둘이 나누어 갖고 그 속에 평화라 이름하는 새로운 선물을 싸십시오. 3.1절을 기념하는 우리는 옛날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지금 21세기에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하는 삶, 행복하고 책임있는 삶, 그 삶으로 이나라가 복되고 일본도 그런 뜻에서 복되고 함께 공동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소명인 줄 압니다. 일본이 필요하면 회개하고 우리도 필요하면 회개하고 함께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가 오늘 우리의 자유가 되시길 바랍니다.






admin

�댁쟾�쇰줈